대하소설 「신불산」(761)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8장 만두가게 개업(1)

이득수 승인 2024.06.13 06:00 의견 0

23. 만두가게 개업

10박 11일 스.모.포(스페인, 모르코, 포르투갈) 여행이 끝났다. 귀국길에 들린 네덜란드까지 총 4개국을 거쳤는데 이번 역시 주로 성당과 궁전, 모스코를 구경하는 코스라 해순, 영순 두 순이씨를 비롯해 서현조씨는 그저 건성으로 따라다니며 늘 졸았고 열천씨 혼자 이베리아남단에 심어진 이슬람의 흔적과 모르코의 무어족과 모스코, 또 포르투칼의 대서양을 향한 맨 끄트머리 로까 곶과 네덜란드의 풍차와 암스텔담의 공창(公娼) 이국문화에 흠뻑 젖으며 가이드 김장미씨에게 연일 질문공세를 퍼부은 참으로 의미 깊은 여행이었지만 그 기록은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그간 중국의 장가계와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또 호주와 뉴질랜드, 미 동부와 이번의 여행까지 벌써 5년에 걸쳐 아시아와 아메리카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주까지 섭렵하면서 나름 꼼꼼히 메모도 하고 대하소설에도 기록했지만 그 자신부터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가 힘든 판에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안내보다는 생소하고 지루한 여행담에 짜증이 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집에서 편안하게 하룻밤을 잘 자고 일어난 영순씨가

“보소!”

아직도 거실바닥에서 눈만 빠꼼 뜨고 누운 열찬씨에게

“현서 보러 안 갈랑교?”

“가야지. 아침 묵고.”

“그라면 나는 인지 갈 끼요. 당신도 좀 쉬었다가 현서집에 내려와서 아침식사를 하도록 하소.”

하고 나가버렸다. 텅 빈 집에 혼자 남자 비로소 편안하다는 느낌, 참으로 여유롭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열흘이 훨씬 넘도록 단 하루, 한 시간도 떨어진 일이 없이 아내 영순씨와 함께 있었고 낮 시간 대부분은 열일곱 명의 동행인들, 특히 지근의 거리에서 숨소리까지 듣기는 최현조씨와 해순씨부부에 순간순간 가이드 김장미씨에 인원점검 체크를 당하며 산 것이었다.

아직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 주위가 우물 속처럼 고요하다 가끔 출근하는 사람들의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마치 꿈속처럼 들려오다 문득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참으로 한가하다는 기분이 들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우웅, 이번에는 동해남부선의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해운대와 기장 쪽 사람들이 시내로 출근하고 간혹 시내에 사는 사람이 반대쪽으로 출근하는 네 량(輛)짜리 꼬마열차가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자 이슬에 젖은 가로수와 정원수의 무성한 이파리에서 신선한 이슬냄새가 묻어나며 지나가는 바람에서 싱싱한 냄새가 났다.

(그렇구나! 사람이 한가하다는 것은 바로 문밖으로 나무를 보는 것(閑)이로구나. 그게 고즈넉한 저녁이나 밤이라 창밖으로 달을 보면(閒) 더더욱 신선의 경지에 드는 것이로구나, 그런 그런데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왜 불꽃(閃)이 이는 걸까?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마주친다는 것은 일단은 상대가 자신을 해칠지 아닐지 살펴야하고 의심해야 되는 것이로구나.)

하고 흡족한 기분이 되어 텔레비전을 켜고 어제 한 롯데경기의 재방송을 보며 롯데의 선취점에 입이 헤벌레한데 집전화가 울리더니

“보소, 당신 아직도 안 일랐능교?”

“와?”

“지금 김 서방 나간다는데 얼른 내려오소. 사람도 봐야지만 상을 두 번 차리는 것도 그렇고.”

“그래 알았어.”

주공의 테라스 촌 옆 계 단길을 내려가 호수공원을 지나 다시 선경아파트의 계단을 올라 108동을 비잉 돌아 107동 영서네 집에 들어가자

“다녀오셨어요?”

식탁에 앉았던 사위 김 서방이 꾸뻑 인사를 하고 의자를 밀어주어 앉은 열찬씨가

“자, 묵자!”

숟가락을 들자 비로소 식사가 시작되는데

“아이들은?”

“큰 애는 늦잠을 자고 작은 애는 하루의 삼분지 이를 자는 판이라서.”

“모처럼 아이 보러 와서 허탕이네. 그럼 새벽 댓바람에 온 당신도 아직 아이들하고 눈도 못 맞추었단 말인가?”

“아이들이야 놀면 노는 대로 자면 자는 대로 다 귀엽지.”

“그래 현서는 별 탈 없이 잘 크는가?”

이번엔 아이어미와 눈을 맞추는데

“일곱 칠 49일이 지나면 엄마랑 눈도 맞추고 까르르 웃기도 한다는데 이 아이는 지 언니보다 반응이 좀 느려요.”

“그래. 아이들도 다 개성을 타고나니 그럴 수도 있겠지.”

“또 한 번 울면 울음이 길어요. 고집이 센 것도 같고.”

“삼신할미가 어련히 알아서 다 해주겠지.”

사위 도연씨가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가자

“저 사람은 뭐 진도가 좀 나가나?”

“예. 태광하고 삼호하고 두 군데서 이력서를 한번 넣어보라고 연락이 왔는데 재취업엔 관심이 없나 봐요.”

“왜? 경력사원 재취업엔 연봉도 더 올라간다는데.”

“자재파트의 특성상 얼마 안가 베트남이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로 파견을 나가야 되는데 가족과 떨어지기가 싫은가 봐요.”

“그런가? 나 같으면 오히려 가족과 떨어져 한두 해 지나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 되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것 같은데.”

“어릴 때 외롭게 자라서 그런가 봐요. 멀리 돈 벌러 떠난 아버지는 장애인이 되어 돌아오고 어머니는 회사에 나가고 도연씨 자신이 가장처럼 아버지를 살피고 동생을 건사하고 냉장고에서 김치랑 멸치볶음을 꺼내 점심상을 차리고....”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창업방향은 잡았나, 무슨 아이템,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 말로 득템은 했는가?”

“예. 왕만두가게를 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고 문제는 범어사입구의 가게처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친구를 통해 접선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답니다.”

“그렇구나. 에미 너는?”

“아직도 명목상 퇴사는 않은 것으로 되어있지요. 회사에 크게 남은 일은 없지만 다음 달초까지 마지막 정리를 하고 회사가 청산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다음 주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야 해요.”

“아니 아직 무리가 아닌가?”

“괜찮아요. 처녀 때처럼 몸이 가뿐한 걸요.”

“그래. 알아서 하렴.”

하고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당신, 구서동 밭에 안 가고 싶나? 나는 고추랑 오이, 가지와 토마토가 궁금해서 죽겠다. 열무도 하매 먹을 때가 된 것 같고.”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진데 아직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자는 얼굴이 어데 얼굴인가? 서로 눈을 맞추고 뺨을 비비야 얼굴을 보는 거지.”

“그럼 조금 기다릴까?”

안마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한참이 지나

“할아버지!”

아홉 살 영서가 가방을 맨 채 소리쳤다.

“아이구, 내 새끼! 잘 있었나?”

열찬씨가 번쩍 들어 내리는 순간

“어서 가자. 등교가 늦겠다.”

자동차 키를 든 영순씨가 재촉했다. 영순씨가 돌아온 뒤 한 참 만에 아이가 눈을 떴는지

“아이구, 내 새끼, 요 이쁜 놈 할매가 왔어요. 방실방실 웃어 봐요.”

영순씨의 목소리가 거실까지 가득하자

“현서씨, 예쁜 얼굴 김현서씨, 할아버지가 왔어요.”

열찬씨도 달려갔지만 눈을 빤하게 뜬 아이는 별 표정이 없이 할머니가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주 배가 고픈 경우가 아니면 달리 우는 일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동그란 얼굴선과 뚜렷한 코와 맑은 눈빛이 잘 어울렸다.

“그래 세 번 만에 드디어 작품이 하나 나왔군. 이 애는 성형외과 견적이 안 나와도 되겠네.”

득의양양한 열찬씨에게

“몰라. 혹시 눈에 쌍꺼풀 없다고 해달라고 하면 우짤 거요?”

“무슨 소리. 이 아이는 쌍꺼풀이 없는 것이 매력일 거야. 서편제의 배우 오정해처럼 말이야.”

“글쎄. 과연 그럴까?”

하던 영순씨가 아이의 우유까지 다 먹인 뒤에

“그럼 우리는 밭에 간다.”

일어서자

“저녁에 같이 오이소. 김 서방이랑 영서랑 모처럼 외식이나 한 번 합시다.”

“그래. 그러든지.”

하고 시계를 보니 열시가 넘었다. 둘은 부지런히 구서동 밭을 향했다.

[그림 서상균]

구서동 롯데캐슬 맞은 편 길가에 차를 대고 둘은 달리다 싶이 밭둑을 지나 도랑을 넘고 마침내 교장선생님의 농막 오각정 정자와 우물이 보이자 가슴이 다 울렁거리는 것 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습니까? 교장선생님.”

“어서 와요. 여행은 잘 하고?”

“예.”

수인사를 하고 둘은 곧바로 움막 뒤의 밭으로 향했다. 언제 봐도 넓고 비옥하고 볕이 잘 드는 교장선생이 직접 부치는 밭고랑을 한참 지나 같은 밭뙈기이기는 하지만 폭도 좁고 땅도 거칠고 뒷산언덕의 소나무그늘이 내려와 소출이 시원찮은 땅 40평이 2년째 열찬씨가 부치는 제1농장이었다.

“히야, 교장선생님 고추 좀 봐. 우째 이래 가지도 실하고 거무티티한지? 풋고추 끄트머리에 빨간 빛이 도는 게 한 보름이면 첫 수확을 하겠네.”

하던 영순씨가

“에게게. 이게 뭐야? 오이 꼬라지 좀 봐?”

하면서 땅에 나뒹구는 오리 두 개를 땄다.

“그 흙 묻은 오이하나가 다른 오이 수십 개를 가로막은 애물단지야. 지금은 한창 줄기와 잎이 자라야 하는데 월남아이들 너무 일찍 담배를 배워 키가 안 크듯이 너무 일찍 열매를 맺어 오이줄기 전체가 부실하네.”

혀를 차면서 열찬씨가 바닥 쪽에 아직도 꽃을 매달고 기고 있는 손가락만한 오이 대여섯 개를 따 주고 늘어진 줄기를 비닐 끈으로 매어주는 사이 영순씨도 부지런히 토마토와 가지의 순을 잘랐다. 한 보름 후면 세 가지의 열매를 동시에 수확하는 황금기가 올 것 같았다. 그늘을 피해 한 서너 골 심은 80포기 정도의 고추도 새순을 따주는데 땅이 척박해서 그런지 검고 무성한 기운이 없이 노르스름한 것이 영양부족이 여실했다. 요소와 복합을 섞어 웃거름을 좀 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양분이 없는 토양에 햇볕이 부족해 효과를 볼 지도 의문이었다.

아래 밭의 일이 끝나자 바로 위의 윤중현씨 밭을 지나 올해부터 새로 부치기로 한 박성철씨의 밭으로 향했다. 교장선생님과 청룡국민학교 몇 해 후배로 평생을 여기저기 학교매점을 운영하며 딸만 일곱, 칠 공주를 기르며 살아온 그 집 내외는 그렇게 사는 것이 검소한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매사에 너무 아끼고 남과의 거래에 절대로 자신이 손해를 안 본다는 식으로 매우 복잡한 셈법을 가진 부부였고 남의 것을 받는 것도 꺼렸지만 절대로 남에게 무엇하나를 주는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발상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박성철씨가 술을 좋아해 가끔 열찬씨가 오각정으로 초청해 돼지 족발이나 순대, 하다 못 해 컵라면이라도 끓여 술을 권하면 아예 안주 없이 술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절대로 안주를 집는 법이 없이 소주 2홉 정도는 단숨에 마시고 손으로 입가를 쓰윽 훔치면 끝이었다.

한 번은 그 박성철씨가 혼자 삽질을 하는 열찬씨에게 소주 한잔을 하자고 해서 5각정에 갔더니 됫병 소주에 달랑 무 하나를 들고 와 등산용 스텐 컵에 한 가득씩 술을 부어 건배를 하며 자기는 그냥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고 열찬씨더러 주먹만 한 날 무 한 조각을 안주로 먹으라고 준적도 있었다.

지난 해 밑에 밭을 토박이 정씨네 피붙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로 넘겨주고 땅이 없어 쩔쩔 매자 그럼 자기네 밭을 한 조각 주겠다는 교장선생의 제의로 열찬씨가 옮겨오면서 그 동안 교장선생의 땅을 무료로 소작하던 4집에 비상이 걸렸다. 그 발단은 절대로 남의 신세를 안지고 경우 바르기로 유별난 영순씨가 밭을 옮긴 이상 지난 해 소작료로 정씨네에게 주던 연 6만원의 소작료를 교장선생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엔 이렇게 돈을 받으려고 밭을 준 것이 아니라고 손을 젓던 교장선생이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받았다. 그런데 일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밭에 온 교장선생이 네 명의 소작인 윤중현씨, 박성철씨, 이호열씨와 통장님으로 불리는 김씨를 오각정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해마다 이맘때면 장마에 대비해 도랑을 치고 길가의 풀을 베고 산수도 배관을 손보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고 국수를 삶아 회식을 하는 단합대회 날을 받고 누가 무얼 맡을 지 의논할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다 모이셨는가?”

킁킁 헛기침을 두어 번 한 교장선생이

“저 아래 정씨문중의 땅을 붙이는 사람들은 그 땅이 4,50평이 되든 20평도 안 되든 모조리 일 년에 6만원의 땅세를 내는 것을 알겁니다. 얼마 전 가국장이 정씨네 땅을 떼이고 우리 밭으로 옮기면서 밑에서 내던 관례대로 6만원을 자진납부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형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볕도 잘 안 들고 바닥도 거친 땅에 6만원을 낸다면 보통 50평이 넘는 부드럽고 볕 잘 드는 땅을 부쳐온 여러분들도 공히 일 년에 한 6만원씩을 내어야 내가 다만 토지세라도 낼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고 네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데

“6만 원이면 그저제? 거기다 수 년 간 공짜로 부쳐 먹은 것도 그렇고.”

옆에 있던 사모님이 딱 자르고 나오자 심술이 덕지덕지한 얼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모두 말문이 막혀 숨을 죽이는데

“이 달 안에 6만 원씩을 내소. 새로 온 이국장이 나이도 젊고 계산도 빠르니 소작인총무를 시킬 테니 이국장이 일괄적으로 받아서 내는 것으로 하고.”

하면서 자리를 파하는 바람에 졸지에 열찬씨가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하루는 교장선생이 안 온 날 맨 위쪽에 따로 세운 원두막에 찾아가 이호열, 윤중현, 통장님 넷에게 정말 일이 이렇게 번질 줄은 몰랐다고 죄송한 뜻을 표하자

“이 국장이 무슨 죄가 있어요? 우리는 아무도 이 국장을 원망하지 않아요. 다만 그 야시 같은 할마시가...”

하면서 그동안 사모님만 밭에 왔다 가면 무언가 지주행세를 하는 압박이나 잔소리가 나오고 또 교장선생이 퇴직하기 전까지 밭을 관리하던 교장선생의 누님은 소작인들이 밭을 조금 뒤져만 주어도 반드시 삼겹살 파티를 벌일 정도로 인심이 좋았는데 저 심술궂은 할마시가 한 번 밭에 왔다가고 남매간에 물고 뜯고 싸움이 벌어지다 못해 소송까지 벌어져 기어이 그 인심 좋은 할매를 퇴출시켰다며 다들 분한 얼굴이었고 다혈질인 이호열씨는 이를 부드득 갈기도 했다.

“그나저나 안 줄 방법이 없네. 이 세상에 그 할마시 욕심과 심술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나?”

하면서 각기 호주머니에서 6만 원씩을 꺼내주며

“이 국장도 살아보면 교장선생내외와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 건지 알겁니다. 좌우간 고생 많습니다.”

하고 파전을 구워 술자리를 벌인 적이 있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