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70)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8장 만두가게 개업(10)

이득수 승인 2024.07.12 14:03 의견 0

“같은 형제 중에서도 자신이 젤 고생을 많이 하고 부모 사랑도 못 받고 남편도 잘못 만나고 또 뭐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데 고생은 지만 했나? 망내이 백찬이도 외롭게 크고 부산동생 니만 해도 야간대학 댕긴다고 얼매나 고생했노?”

“그래도 안 그렇지요. 젊어서 자형을 보내고 성식이가 잘못 되서 먼저 보내고 또 현주가 아이 둘을 데리고 지 서방과 헤어지고.”

“그 기 뭐 자랑이가? 짜들 낳기만 했지 자식 단도리도 못 하는 기.”

후덕해서 덕찬이라는 사람이 그 동안 아시언니한테 맺힌 기 많은 모양이었다.

“마 됐심더. 누부는 자영도 야물고 살림도 이루고 미진이 밑에 머시마도 셋이나 나고.”

“그래. 고맙다. 잘 가거라.”

헤어지면서 셋 다 씁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수영의 치과의사 엄영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 죽고 잘 사나?”

“죽지는 안 했지만 잘 살지는 못 한다.”

“와? 어데 아프나?”

“앞니 네 개가 많이 흔들린다. 통 씹지도 못 하고.”

“그래 한 번 내려오너라. 아주 개호지로 만들어주 께.”

영순씨가 언양사람은 인사라는 게 참 인정머리도 없다고 늘 말하듯 데면데면한 인사를 하는데

“참, 니 홈 커밍 데이(Home coming day)행사한다는 소리 들었나?”

“아니. 갑자기 홈 커밍데이는 와? 이 초겨울에.”

“그래 말이다. 올 연말에는 우리 부산아이들끼리 조용히 술이나 한잔 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홈 커밍 데이는 버든출신 부산친구 영호, 진태, 석찬, 용찬, 열찬씨의 네 사람을 아직 평리에 사는 영관, 종석, 석주, 주호, 대승, 찬승씨의 일곱 사람이 고향으로 초청해서 같이 도랑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회식을 하는 행사로 누가 들어도 참 그럴 듯한 행사였다. 한 5 년 전 버든부락이 고속철업무부지로 몽땅 수용된다는 소리가 들리며 마침 예순을 바라보던 또래들이 아이디어를 내어 부산의 친구들을 초청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1951년생 열찬씨를 비롯하여 한창 6.25전쟁중에 태어난 1950년생 사내아이만 버든, 구시골을 합한 평리부락 50여호에 무려 22명이나 되고 계집아이도 7명이 태어났는데 그건 일반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인 1958개띠보다도 7,8년이 빠른 일종의 인구폭발이었다.

보도연맹이니 뭐니 불길한 기운이 감돌던 1949년에서 6.25가 터진 1950년에서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버든마을의 모든 집안에서는 죽기살기로 아이만 낳을 작정이었는지 50여 가구에 스물아홉 명, 그러니까 두 집에 한 명꼴 이상으로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스물두 명의 사내아이 중 버든의 성오, 영근이, 영곤이, 수태, 종천이, 구시골의 기태, 사돈격인 용천이 등 7명이 죽고 12명이 남았는데 이미 고향을 떠나 다시 나타나지 않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수용이, 준권이, 양구등 세 명이니 홈커밍데이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부산이 5명, 이제 버든마을이 뜯겨 근방으로 흩어진 언양사람이 7명이 되는 셈이었다. 처음 버든에서 만나 오랜 만에 남천내에서 물고기를 잡아도 나이들이 들어 저마다 옛날의 가락만 자랑하고 말만 많아 사공이 많은 배가 산에 가듯 통 잡지를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데

“내 그럴 줄 알았다. 촌놈들아!”

문득 1톤짜리 포터를 끌고 나타난 찬승이가

“다 나오너라. 일 끝났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어제 부터 두서 활천에서 도랑을 막아 미리 잡았지.”

하면서 차에서 바께스를 내리는데

“와! 서너 그륵은 되겠네. 우째 잡았노?”

어려서부터 고기 잡으러 물에 들어가는 일이 없던 용찬이, 석찬이 두 점잖은 4촌이 묻는데

“크면서 고기 잡으러 앞새메나 복걸에도 안 들어간 너거는 진정한 버든 사람이 아이다.”

“맞다. 그런데 찬식이 니 와 나는 빼고 혼자 잡았노?”

찬승씨의 아명은 찬식이었다. 대엿 살부터 열찬씨와 복걸과 앞새메를 같이 발발 기다 입술이 새파라져 달달 떨고 집에 오면 찬승이엄마가 구들 목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술독처럼 묻어놓고 키운 아이들이었다.
“니는 벌써 부산사람이 된지 오래라 이론만 밝지, 실전은 안 되더라. 우리 반창회 때 안 해봤나?”

하며 씩 웃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 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거나 노동판을 드나들다 20대 초반에 작천정 안쪽의 오지 화천마을의 두 살 많은 처녀와 일찍 결혼해서 열찬씨 아버지 산소 뒤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아들하나를 낳고 금방 이혼을 했다.

오지마을이기는 해도 간월산 꽃잎이 흘러간다는 꽃내 화천(花川)마을인 만큼 꽤 미인에다 얌전한 각시로 소문이 났는데 말은 성격차이로 이혼이지 친구 찬승씨가 워낙 술을 심하게 마시고 만사에 거칠 것이 없는 편이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찬승씨 부친은 구시골 황부잣집의 셋째로 일찍부터 목수 일을 배워 황대목으로 불렸고 신혼 때 구시골에서 산 너머 큰 마을 버든으로 집을 지어 나와 열찬씨와 찬승씨가 단짝이 된 것이었다. 목수로 돈을 번 황대목은 곧 언양에 집을 지어 목공소를 차리고 집을 여러 채 가지면서 진장과 남부사람 공동묘지일대에 이리저리 흩어진 마을 동산주변의 국유지를 헐값으로 불하받아 버든 제일의 지주이자 부자로 꼽혔는데 문제는 그 땅 안에는 마을사람들의 무덤이 드문드문 있는 것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살아 그 산소에 묻힌 사람의 일부를 ‘어르신’이나 ‘아재’라고 부르며 자란 그는 마을사람들의 요구대로 열찬씨부친의 산소처럼 제 땅에 포함된 산소들을 땅값이라기보다는 그냥 섭섭지 않을 정도로 몇 푼을 받고 헐값으로 죄다 넘겨주기도 해서 처음 마을사람들의 우려대로 욕심이 똥끝에 차서 억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아래위를 알고 동네사람을 챙기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한동안 열찬씨부친의 산소 바로 앞집에서 살면서 닭과 개가 봉분에 나와 놀아 열찬씨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좀 어떻노?’ 실실 따지다가 웃으며 헤어지곤 했는데 아내가 떠나버린 이후 찬승씨는 아이를 모친한테 맡기고 한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다 청춘이 다 지나 머리가 허연 50대에 결코 평탄치 못한 젊음, 절제되지 않는 생활과 술로 이미 머리가 허옇고 벌건 목덜미가 쭈글쭈글한 남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중년이 되어 다시 마음을 잡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하나를 만나 간월에 일품관이란 가든을 차려 제법 장사를 잘 했는데 찬승씨가 장사는 뒷전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거나 계곡의 깔딱매기를 잡는 데만 정신을 파는 바람에 두 번쩨 아내도 마침내 집을 나가버렸다. 다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일품관을 운영하는 동안 열찬씨가 부지런히 부산의 직장과 모임손님들을 인솔해서 드나들었지만 어디론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거나 울주경찰서 3대 골통으로 지목된 상습음주운전으로 경찰서유치장이나 감방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아비를 닮아 일찍 여자를 만나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벌써 국민학교에 다니는 50대 할아버지, 30대 아비, 10대 손자의 기묘한 3대의 가운데인 아들이 늦게나마 식을 올리려고 해서 마침 음주운전으로 복역 중인 아비 찬승씨를 석방시키려고 언양의 동창 몇이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는 끝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을 못 하기로 했다.

“그래 요새는 우째 지내노?”

“그냥 그럭저럭 밥은 묵는다.”

“일은 좀 하고?”

“내가 뭐 답답해서 댕기겠노? 내 암만 골통이라도 언양에 황대목 부자 아부지 만나서 밥 굶을 걱정도 없고 심심해서 한 번씩 사나흘 일 하면 돈백만원씩은 번다.”

“그래 밥해주는 사람은 있고?”

“있다가 없다가 한다. 첨에 돈도 넉넉하고 내가 술을 좀 덜 묵으면 붙어 있다가 집을 비우거나 술을 좀 많이 먹거나 용돈이 떨어지면 슬그머니 나가는데 나는 절대로 한번 나간 여자는 안 찾는다.”

“지랄도 늘어졌네.”

매운탕을 끓여 술잔을 주고받을 때 열찬씨 옆에 꼭 붙어앉아

“그래 제수씨는 잘 있나? 나는 국민학교 우리 동기 중에 장개 젤 잘 간 사람이 열찬이 닌줄 안다.”

“그래 잘 있다. 찬식이 니가 어린 나이에 화천마실에서 제일 예쁜 각시 얻었다고 우리가 부러워한 거는 모리제?”

“골치 아픈 이야기 하지마라. 인자 그 여자 얼굴도 안 생각난다.”

“그러나?”

하던 열찬씨가 문득 찬승씨의 첫 아내가 어쩌면 순영씨와 친구이거나 한두 살 위의 언니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성씨라도 물어보아 나중에 순영씨 만나면 물어볼 생각을 하는데

“친구야, 이것 봐라!”

찬승씨가 지갑 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펴며

“나는 지금도 잠 안 오면 이것 읽어보고 밤을 새운다.”

하는데 자세히 보니 몇 년 전 새벽마다 잠이 안 온다고

열찬씨에게 전화를 해서 영순씨까지 꼬박 잠을 설치자

“찬식이 니 이거나 읽어보고 마음 좀 잡아라.”

하고 시 한 편을 써 보낸 종이쪽이었다.

“니 그거를 아이 가 있나?”

“무슨 소리. 이기 내 잠 안 올 때 묵는 수면제 아이가?”

하던 찬승씨가

“어이 친구들아 들어봐라. 내가 새벽에 잠이 안온다고 해서 우리 열찬이가 내한테 써준 시다. 내 한 번 읽어볼까.”

하고 더듬더듬 읽어나가는데

고추친구 황찬승에게 주는 詩

이득수

이제 내일은

맥 놓고 갱빈에 퍼질러 앉아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을 볼까

쉬어가는 강바람을 기다려볼까

무심히 살다보니 어느 듯 문득

붕디미 돌아간 남천내처럼

돌아올 수 없는 젊음 흘러갔지만

구름 걷힌 저녁 답의 노란 햇살로

아직 조금 남아있을 내 나머지 삶

미워했던 모든 사람 용서해야지

사랑했던 사람 모두 기억해야지

남은 친구 더더욱 고마워하며

내 혈육들 더 살갑게 사랑해야지

내일은 고향마을 찾아가 볼까

가재 잡던 도랑바닥 주저앉아서

참새처럼 여린 시절 추억해볼까

저물도록 흘러가는 구름을 볼까.

(2011. 3. 8)

“그럼, 그럼 버든 촌놈이 물고기 잡는 이야기 하고 갱빈 이야기 빼면 뭐 있나?”

“찬식이만 시를 써 줄기 아이라 우리 친구 모두 고루고루 써 주면 안 되나?”

울주군청의 임업직으로 있다 산림조합에 다닌다는 구시골의 전주호란 친구가 말해 와아 웃자

“짜린 밤에 미영만 삼을 일이 있나? 석찬이 동생집 노래방이나 가지.”

봉당골에 사는 서석주라는 친구, 어릴 때 열찬씨와 동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친구가 채근하자

“그래 암만 고추친구라 해도 숙놈끼리 술맛이 나나? 기나 고동이나 까재나, 그러니까 조개가 있어야 술맛이 나지.”

또 한 친구가 거들어 바로 옛날 마구뜰상계로 불리던 서울산보람병원 뒤의 신 도시 상평마을의 노래방으로 향했는데 아직 영업시간이 안 됐지만 형님들친구라 미리 대기하는 석조라는 동생에게

“여기 맥주하고 양주 하고 알아서 넣고 가시나도 서넛이 넣고 소 잡는 소리가 나도 동생 니는 절대로 여 들어오면 안 된다. 형님들 민망한 꼴 보니까.”

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 노래를 하는 사람 아가씨와 춤을 춘다고 스텝을 밟는 사람도 있고

“야, 이년들아, 촌놈 소 판돈 구경 좀 할래?”

들어서자말자 아가씨들을 주욱 세워놓고 만 원짜리 하나씩을 가슴에도 넣어주고 팬티에도 넣어주다 그 중 아가씨 하나를 잡고 구석자리에서 민망한 짓을 벌이가도 하면서 두어 시간을 놀다 나중에 일부는 뻗어 집으로 실어 보내고 남은 몇이 자리를 수습하고 복국집에서 속을 풀며 마무리한 일이 있었다.

그 후로 답례로 부산친구들이 언양친구들을 부산으로 초청하는데 제대로 주선을 할 사람이 없어 열찬씨가 자갈치시장의 서대신동부녀회장 횟집에 예약을 하고 충무동 부둣가의 허름한 노래방, 시끄럽고 정신 사납기는 하지만 대낮부터 영업을 하고 아가씨든 주인이든 만사 <돈 놓고 돈 먹기>로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노래방에 들러 대낮부터 촌 영감들이 정신이 쏙 빠지도록 질펀한 파티를 벌여 과연 국장님답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 이 후로 한다, 한다 하면서 다들 바쁘기도 하지만 안 되면 다음 하면 되지 하는 식으로 어느 누구도 챙기는 일이 없는데 유독 근래에 울산광역시산림조합장이라는 엄청난 감투를 쓰고 새까만 공용승용차까지 받은 전주호조합장이 유독 사람 모으는 것을 좋아해 여기저기 모임 안 하느냐고 전화질을 해서 마지 못 해 하기는 해도 이제 굳이 힘들여 물고기를 잡느니 바로 한우 쇠고기 집으로 향하고 부산에도 회를 먹고 노래방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예 공식화가 된 것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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