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심술은 하늘이 낸다고 하더니 시누이 심술 역시 하늘이 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평소에 그저 순하고 착해 남의 험담 같은 걸 모르는 덕찬씨가 저렇게 지청구를 해대는 것이 큰말이 없으면 작은 말이 대신한다는 말이 과연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20. 평리부락 망향비(7)
“마 됐심더. 조용하소. 시작하는 갑다.”
열찬씨가 다독거리는데
“지금부터 우리 울주교회 박홍식 장로의 모친 가금찬 집사님의 고희연을 개최토록 하겠습니다. 먼저 찬송가 37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를 찬송토록 하겠습니다. 하니 단상에 한 젊은이가 올라가 지휘를 하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식장이 터져나갈 듯 우렁찬 찬송이 울려 퍼졌다. 하긴 주인공 금찬씨네는 물론 대군이 참석한 순찬씨네까지가 모두 기독교가족인 데다 100명에 가까운 교인들이 참석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곧잘 따라부르는 열찬씨를 보며 국민학교합창단 출신 영순씨도 따라 하는데 늙은 권사 순찬씨는 그냥 입만 달막거렸다. 찬송에서 제외되어 그냥 멍하니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덕찬씨가 백찬씨를 보며
“양산에 원자가 오네. 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는 올 줄 알았다. 신랑도 오네. 아이구 글망해라. 처삼촌 열찬이보다도 더 늙어 보인다.”
백찬씨에게 속삭이며 손뼉을 쳤다. 이어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2절이 끝나자 60대로 보이는 풍채 좋은 목사가 단상으로 나서서
“늘 전지전능하시며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느님, 또 우리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오늘 우리 울주교회 박홍식장로의 어머니이신 가금찬집사의 고희연을 맞아 주님의 늙은 딸을 이 처럼 보호하사...”
유장하게 기도가 이어지더니 다시 찬송을 몇 곡이나 하고 다시 기도를 한 후에 축도가 이어지고 주기도문이 계속되었다. 하마 자기 차례가 오나 조마조마 기다리던 열찬씨가 역시 집사인 둘째 화식씨를 불러
“내 축시낭송은 언제 한다 카더노?”
하고 물으니 사회자에게 가서 뭐라고 주고받은 뒤
“부목사님이 축하예배 끝나고 따로 기회를 준답니다.”
하고 돌아갔다. 마침내 축하예배가 끝날 즈음에
“외삼촌!”
양산의 원자씨가 인사를 하자
“그래 옆에 앉아라. 인자 올 사람은 다 온 모양이다.”
덕찬씨가 신이 나는데
“이상으로 박홍식장로의 어머니 가금찬집사님의 고희연죽하행사를 끝내고 집사님의 형제를 대표해서 남동생이신 이열찬시인께서 축시를 낭독하겠습니다.”
하는 소개와 함께 단상으로 올라간 열찬씨가 인사를 하자
“이열찬! 이열찬!”
김해의 미숙, 미경, 미옥 세 자매가 연호하며 손을 흔들자 와아, 신도들 측에서 웃음이 터졌다. 호주머니에서 축시봉투를 꺼내 펼치며 장내를 살피던 열찬씨와 당사자 금찬씨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뜨끔하더니 머리가 하얀 순찬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여러분, 저는 가금찬집사님의 남동생 가열찬입니다. 저보다 일곱 살 많은 누님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같이 고생하고 지내던 시절이 눈에 선한데 우리 누님이 벌써 칠순이 되었습니다. 매형이 돌아가신 지가 근 20년이나 되는데 그간 엄마를 잘 모신 박일식장로와 조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만 그 보다도 외로운 우리누님과 늘 함께하며 격려해준 목사님과 교인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하니 박수가 터지는데
“여러분, 제가 열세 살, 국민학교졸업반에 우리 누님이 상북명촌으로 시집을 간다고 코로나택시를 타고 골목길을 벗어날 때 저는 눈앞이 캄캄해서 오래오래 울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갔다 오면서 시오리나 되는 명촌마을 등말리까지 찾아가서는 용기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논길 옆 무덤가 도래솔에 숨어 빨간 치마에 파란 저고리를 입고 바글바글 파마를 한 키가 작은 누님이 마당에 오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서 돌아온 일, 무려 50년에 가까운 기억이 눈에 선 합니다.”
하고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
하고 뜸을 들인 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운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읽어나가다 울컥한 기분이 들어 잠깐 숨을 멈추고 금찬씨의 테이블을 바라보다 눈을 돌려 순찬씨의 하얗게 쉰 머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문득 눈물이 핑돌며 눈앞이 흐려지는 지라
“내, 누님같이, 누님같이...”
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내려 손수건을 꺼내드는데 우우,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지자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이 피려고
간밤엔 천둥이 그리도 울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간신히 낭송을 끝내고 자리에 돌아오자
“외삼촌!”
갑찬씨의 큰 딸 원자씨가 다가오는데
“안녕하십니까?”
열찬씨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 새 남편이 인사를 했다. 뺀질이 남서방이 샷시공장을 한다면 장모 갑찬씨는 물론 그 불쌍한 처제 명희씨가 청소부를 해서 번 돈까지 다 가져다 쓰고 바람까지 피우며 나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이혼을 하고 상조회외판을 하다 만난 시내버스기사와 재혼을 했는데 서로가 쓰라린 경험을 살려 원만하게 잘 지낸다고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조카와 조카사위들이 찾아와 술을 한잔씩 부어주며 눈도장을 찍는데
“어이, 준식아!”
금찬씨네 셋째를 불러
“니가 고생이제? 자 한 잔 해라!”
특별히 술을 한 잔 부어주니 당사자는
“예.”
모기소리처럼 낮게 말하는데 건너 테이블에서 바라보던 금찬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날카롭고 정확한 그 아이는 자랄 때부터 친가, 외가를 통틀어 어디 내세울 사람이라고는 공부 잘 하는 두 외삼촌, 자기가 다니는 농업학교에 전설로 통하는 두 사람이 말만 외삼촌이지 좀체 만날 수도 없다고 탄식하다가 이제 자신도 마흔이 넘고 큰외삼촌이 돌아가셔서 단 한 사람 의지처가 될 열찬씨가 좀체 명촌걸음을 안 해서 얼굴을 잊어버리겠다고 탄식하더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자 사회를 보던 부목사를 거느리고 열찬씨네 테이블로 온 목사님이
“이 분은 외삼촌이고 또 이 분은 막내 외삼촌이고 이분은 이모부이고 각각 그 부인들이고요.”
일식씨의 소개로 목례를 나누다
“축시가 좋았습니다. 저도 누님생각이 간절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열찬씨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윽고 금찬씨의 직계가족사진촬영이 끝나고 친정식구기념촬영에도 근 20명의 가족이 사진을 찍고 내려오자
“자, 모두들 김해누님 모시고 버든 생가터에 망향비를 보러 갑시다. 동네가 몽땅 뜯겨나가고 우리형님이 망향비의 비문을 썼으니 이제 두 번 오기도 힘든 둘째 누님하고 기념촬영도 하고.”
해서 저마다 조를 지어 승용차에 타면서 배웅을 나온 일식씨에게
“교회손님들 보내고 누님 모시고 너거 식구들도 오너라.”
“예.”
하고 출발했다.
고속도로 박스 밑을 지나 앞새메 터를 지나 허허벌판 건물하나 없지만 반듯하게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현장에 도착하자
“아, 여게가 말랑떡 탱주나무 골짜기 입구쯤이제?”
덕찬씨가 한참이나 사방을 살펴보다 옛 모습이 떠오르는지
“우리 집터가 저게 쯤이고 요 앞이 우리 갈배기 논이겠네. 그런데 앞새메하고 복걸이 흔적이 없으니 영판 딴 세상 같다. 당수나무도 없고 행상집도 없네.”
하는 사이
“엄마, 여게가 버든동넨데 알겠나?”
순찬씨에게 물어도
“버든이라 버든에는 누가 사는데?”
“엄마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 아이가?”
“누가 태어났다고? 내 동생 열찬이가 태어나서 우리 아부지가 사람 안 된다고 거름밭에 내배리라 캤지.”
“뭐, 거름밭에 내배리라고?”
가뜩이나 큰 모녀의 목소리가 울렁울렁 하는데
“자, 사진 찍자! 치즈!”
막내 미옥씨가 남편과 비석 양가에 서서 아이 하나씩을 비석위에 앉히고 언니 미경씨더러 사진을 찍게 하는데
“영서라캤제? 니 할아버지이름 한번 찾아봐라.”
용철씨가 말하자
“요기!”
영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우리 처남이 크기는 큰 사람인갑다. 비문을 쓰서 빗돌에 이름을 다 올리고.”
고차대씨가 힐끗 열찬씨를 바라보자
“자영요, 보소. 우리가 클 때는 우리 집이나 큰 집이 잘 사는 집도 아이고 뭐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을이 뜯길 때는 우리 이씨들 이름이 비석정면에 대표로 적힌 거 아잉교?”
과묵한 백찬씨도 신이 나서
“언젠가 진장에 산소들이 다 개발이 되더라도 이 망향비는 남을 테니 우리 집안의 뿌리가 될 거 아잉교.”
하고
“자, 모두 모입시다. 김해누님 살았을 때 기념촬영이나 한 번 합시다.”
하자
“명촌식구들이 와 안 오노? 전화 좀 해보지.”
아까부터 고속도로박스 밑을 힐끗거리던 열찬씨가 말하자
“오기 힘들긴데. 교인들 행사가 얼마나 길게 끈다고 술 한 잔 안마시면서 음식은 깨끗하게 다 비우고 또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백찬씨가 전화를 거는 사이
“조리 넘어가면 우리 집이 있던 구시골이다. 큰오빠하고 작은 오빠는 진장의 조두천씨 과수원에서 놓고 나는 구시골에서 낳아 김해로 이사 갈 때 업고 가고 미경이 저 가시나는 배속에 넣고 가고 미옥이는 김해에서 놓고. 엄마 맞제?”
저들 5남매의 출생 사(史)를 들먹이는데
“맞기는 개가 몽둥이를 맞나?”
순찬씨가 엉뚱한 농담 한 마디를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래 말이다. 기냄이 그 가시나는 동네 총각하고 연애를 해서 소문이 나고 술장사하는 동촌떡 딸 금순이 하고 은숙이 하고 말자는 성이 다 각각이었지. 보깡구 박손은 겨울이면 조피를 맨들고 하잠짐손은 가꾸리를 만들고 구시골 항남댁 할배는 꽃당시기를 맨들고...”
흐릿한 기억을 더듬다가
“그런데 일찬이는 어데 갔노? 공부 잘 하는 내 동생 일찬이?”
사방을 둘러보자
“엄마, 외삼촌 죽었다 아이가? 10년도 더 됐는데.”
용철씨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아 주는데
“외삼촌!”
장남 상철씨가 가볍게 비틀거리며 다가오는데
“오빠는 엔간히 마시지. 술 냄새가 등천을 하네.”
미숙씨가 눈을 흘기는데
“마, 놔나라. 지도 나이가 환갑 줄인데 마실 만 하이 마시겠지.”
막내이모 덕찬씨가 말리면서
“갈수록 저거 아부지를 빼닮네. 나는 아까 식장에서 죽은 형부가 살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랬네.”
하긴 그랬다. 작은 키나 길쭉한 초배기상이 얼굴이나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는 습관이나 영판 죽은 아버지와 판박인데다 광신도 권사인 어머니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웬만해선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도 그대로 였다.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시련을 주고 시험을 한다더니 내가 고집쟁이영감은 둘째 치고 내 속으로 낳은 큰아들을 하느님 자식으로 인도를 못 하다니. 주여, 이 죄 많은 딸을 용서하옵시고...”
수십 년 새벽기도의 메뉴이자 순찬씨의 가슴에 못이 된 사람이었다. 아까 63예식장에서 나올 때
“삼촌!”
옆으로 다가와 말끄러미 올려다 보길래
“그래 한 잔 했나? 한 잔 해야제. 니 나이도 벌써 쉰여섯이제?”
동생 백찬씨와 일주일 간격으로 태어났지만 늘 아기처럼 여겨왔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데
“삼촌, 그 시낭송 같은 거는 좀 하지마소. 내가 자꾸 눈물이 난단 말임더.”
하고 휙 지나갔는데 이제 술이 좀 깼는지
“영빈아!”
하고 아들을 불러
“여가 우리 외가마실 터고 저 너머가 우리 집이 있던 구시골이고 조 우에가 내가 태어난 진장마실이다. 그런데 이 망향비를 다 읽을 필요가 없고 그냥 요 밑에 출향시인 이열찬, 이가열찬만 읽으면 된다. 니 휴대폰으로 망향비 전체하고 요 밑에 이름하고 사진 좀 찍어라.”
하는데
“기념사진 찍읍시다! 명촌사람들은 못 온답니다.”
백찬씨의 말이 떨어지자 용철씨가 나서 사람들을 모으고 미숙씨가
“엄마 옆에 외삼촌들 하고 외숙모, 이모, 이모부가 앉고 우리는 전부 뒤에 서자!”
하고 스물도 넘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자
“자, 준비되었으면 찍습니다.”
미숙이신랑 임서방이 제 휴대폰으로 찍고 나서
“가만 고대로 있고 자기 휴대폰으로 찍으실 분 휴대폰만 제게 주세요.”
하는 폼이 하도 능숙해
“저 친구 전직이 의심스럽네. 혹시 관광가이드출신인가?”
열찬씨말에
“많이 배운 사람 같애. 미술이나 성악하는 현지 유학생같기도 하고.”
영순씨도 끼어드는데 용철씨가 나가 임서방과 임무를 교대했다. 사진을 찌고 저마다 자동차로 흩어지려는 순간
“잠깐!”
열찬씨가 일행을 멈추게 하고
“여러 조카들 잠깐 들어보소. 여기가 우리가 조상대대로 살던 고향인데 이제 마을은 없어졌지만 저게 신불산을 한 번 바라보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숨을 한번 몰아쉬고
“참으로 높고 씩씩하고 그러면서도 넉넉한 산이지요? 서울, 부산, 휴전선 할 것 없이 조선천지 안 가본 데가 없고 미국이나 호주 유럽 아프리카까지 댕기며 융프라우라는 알프스에도 올라봤지만 세상천지 저 신불산처럼 훤칠하고 잘 생긴 산이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포근하고 정답고 가슴이 뭉클하고 말이야.”
영순씨가 짧게 끝내라고 손을 잡았지만
“우리 어릴 때 자다가 오줌 누러 마당에 나오면 노란 눈썹달이 걸린 아스라이 높은 산에 겨울철엔 산불이 나서 능선이 불에 단 철사처럼 발갛게 피어오르고 겨울 내내 하얀 눈으로 덮였다가 봄이 오면 얼룩덜룩 잔설이 남고 새파란 봄기운이 일면 배뱁추를 뜯으러 가고.
고속도로가 나고 마을이 두 동강이 나고 고속도로에 가려 봉꼴산이나 향교마을이 잘 안 보여도 저 높은 신불산은 언제나 의연했어. 그리고 중학교 옆에 톨게이트가 있을 때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 그 톨게이트쯤에서 신불산이 보이면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쏴아 강물이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 가슴이 먹먹한 것 있지. 그래서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며 가훈이니 좌우명이니 어떤 훈시 한 마디 않고 그냥 언양에 자주 가고 신불산만 자주 쳐다보면 어디에 내 놓아도 안 모자라는 사람이 될 것이고 여러 조상님들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다행히 다 큰 지금에도 자기들 자식까지 데리고 언양에 잘 댕기고 신불산을 자주 쳐다보는 게 아주 안심이 되고 든든해.
그처럼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어디를 가더라도 신불산을 등에 지고 다니며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산다네. 언젠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저 산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만 이 모양으로 생가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말이야. 아무튼 너거들도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인 언양땅과 저 신불산을 잊지 말기 바라네.”
하는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손수건을 꺼내주며 영순씨가 비로소 손바닥의 힘을 풀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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