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6>1978년 시학 동인

민병욱 교수의 '다시 문학청년으로' <6>1978년 시학 동인

민병욱 승인 2018.02.05 00:00 의견 0

1978년에 결성된 시학 동인. 왼쪽부터 필자, 류종열(현재 부산외대 교수), 하창수(문학평론가). 출처: 민병욱

스크랩 해둔 부산일보 기사를 찾으려고 서재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기억은 불분명한데 아마 1980년 무렵 부산일보 이진두 기자(현재 불교신문 논설위원)가 쓴 시학 동인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문학 동인회에 관한 기사의 스크랩을 찾을 수가 없다.

부산일보의 마이크로필름을 열람하기에 앞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시인 김재홍의 블로그 ‘김 요아킴의 시야, 詩野’에서 시학 동인에 관한 단서를 만났다. 그 글은 월간 『현대시』(2017년 12월)에 평론가 구모룡 교수에 대해서 쓴 김요아킴의 글, 곧 ‘읽고 쓰고 살기- 늘 타자로 향하는 비평’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은 것이다. 2008년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사무국장 간의 관계였고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시인 김요아킴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후 비평공부에 뜻을 같이 한 류종열, 민병욱, 하창수 선배들과 함께 학교 앞 ‘만오다방’에서 일 년 가까이 다양한 담론들을 생산하면서…”

비평공부에 뜻을 같이하면서 세 사람이 만난 것은 1978년 가을 무렵이다. 당시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는, 입학성적을 제외하고는 같은 과라고 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도, 학과 행사도, 학생들의 수업도 거의 똑 같았으며, 심지어 연구실 한 칸에 양 학과의 여러 교수들이 같이 썼다.

서로를 구별하지 않고 같이 어울려 다녔던 1978년 가을 무렵 류종열 선배(당시 74학번)가 75학번이었던 필자와 하창수에게 시학 동인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우리는, 모든 서구 문예이론의 출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etica)을 동인의 이름으로 하자고 즉석에서 합의했다. 그 합의를 우리를 문학공부보다도 의기투합으로 이끌었고 거의 많은 시간을 특히 류 선배와 필자를 붙어 다니게 했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를 비롯한 파리고등사범학교 ‘삼총사’, 마르쿠제(Herbert Marcuse)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삼총사’의 이름을 그 의미도 모르는 채 술잔을 높이 들고 함께 부르면서.

동구청과 수정시장 사이의 골목집, 그 집의 이층에 있던 류 교수의 서재가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그때 그만큼의 많은 책들,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국문학 관련 저서를 본 적이 없던 나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잡비(그래봤자 학교 신문잡지에서 받은 원고료인데)가 생기면 보수동 헌책방으로 가곤했다.

류 교수의 서재와 수정시장 안 허름한 술집을 오가는 동안, 시학 동인은 구모룡(국어교육과 77학번, 현 한국해양대 교수), 김성기(영어교육과 77학번, 현 한국방송공사), 이인균(독어교육과 77학번, 현 울산 시청자미디어 센터장)으로 늘어났다. 필자와의 통화(2018.1.8.)에서 이인균 센터장은, 몇 차례 동인 모임을 갖고서는 초기의 세 사람이 졸업한 1979년 이후에 모임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인을 결성한 셋 사람의 모임은 이어졌다. 우리와 함께 만난 시간을 함께 한 동문 선배는 시인 이정주(약대 72학번)였다. 부대신문에 발표한 시 “개 이야기”(1975.03.24.)로 ‘개정주’로 불리기도 한 시인 이정주는 최시현(의대 72학번)과 시화전(부대신문, 1974.09.30.)을 열기도, 1975년 제13회 부대문학상 시 부문(부대신문, 1975.11.25.)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당시 부대문학회를 이끌어 갔다. 그는 우리에게 ‘부산대학교’에서 대학교를 버리고 부산으로 나아가게 했다.

“장군의 수염이라는 남포동의 허름한 낡아빠진 고무신 같은 싸구려 선술집에서도 그(이윤택)는 자주 나타난다. 부산대학교 약학과의 시인 이정주도, 국립정신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중 급환으로 저 세상으로 날아간 슬픈 철새 같은 시인 최시현도 그를 자주 만나게 된다.” - 권태원, 문화 게릴라 이윤택에 대한 명상(https://m.mariasarang.net/club/)

그의 소개로 시학 동인들은 시인 이윤택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몇 가지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우리의 서재에서 연출가 이윤택도 연극작품의 모티브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친구의 상갓집에서 밤늦은 시간 맏상주(맏상제)가 화투를 치다 문상객이 오면 ‘에고~ 에고~’ 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화투를 치는 모습을 보고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이것이 연극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상갓집 분위기를 유심히 살폈죠. 삼촌·사촌들이 ‘땡깡’을 치고, 아무렇지 않게 성적인 농을 지껄이고, 한마디로 완전 개판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이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살아있는 상주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모든 행위들이 이루어진다고 믿게 된 거죠. 여기서 힌트를 얻었어요’라며 오구의 작품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 이준희 기자, 나의 작품을 말한다(3) 연출가 이윤택의 연극 ‘오구 - 죽음의 형식’, 경남신문 2008.12.16.

언제였든가 필자에게, 그는 ‘놀이의 양식화와 제의의 놀이화가 돋보임으로써 자유롭게 열린 연극, 초자연적인 연극, 신명나는 연극’(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구의 창작 모티브도 그 서재가 있는 골목 이층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청의 열기가 가득 찼든지, 아니면 벗어나고자 했든지, 시학 동인의 결성으로 대학 4년을 마무리 하고 더욱더 멍청한 길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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