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0>서른 즈음에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0>서른 즈음에

김창욱 승인 2017.11.24 00:00 의견 0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1994)는 강승원이 작사·작곡한 노래다. 지난날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노랫말, 서정적 선율에 이따금 떨리듯 흔들리듯 들려오는 트럼펫의 간주(間奏)는 진정 처연한 감정마저 자아낸다.

서른 즈음에 들었어야 할 이 노래를, 나는 마흔 즈음에 처음 들었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렸던 2003년, 그러니까 내가 38살이 되던 해 3월이었다.

‘꿈'이라는 테마로 꾸며진 국제음악제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두루 아우름으로써 그 폭과 깊이를 한층 더한 무대였다. 특히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가 지휘한 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관현악 연주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의 협연은 음악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윤이상의 단막오페라 「류퉁의 꿈」도 무대에 올랐다. 노장사상에 바탕을 둔 「류퉁의 꿈」(1965)은 ‘꿈’을 통해 인간 세상의 덧없음, 부와 권력, 명예를 지향하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장(武將) 류퉁은 지체 높은 궁중 관리의 딸 츠이보와 혼례를 치른다. 그러나 그가 전장으로 나가자, 홀로 남아 외로움에 떨던 츠이보는 곧장 정부 쿠에이를 끌어안고 정을 통한다.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던 류퉁은 재물에 눈이 멀어 아군의 전략을 적에게 누설한다. 집행인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 가던 그는 한 승려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다. 남루한 행색에 비루한 삶을 살던 류퉁. 그러나 깨어나 보니, 한갓 꿈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문을 나섰다. 남망산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고깃배 불빛이 어둠 속에 일렁거렸다. 나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 프라이드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라이터를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행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라디오에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꿈결같은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오늘 내가 뭘 했지? 그렇지. 말로만 듣던 비엔나필, 주빈 메타의 얼굴을 보았지. TV에 나왔던 사라장도 봤지. 그리고 또 뭘 봤지? 아, 그렇지. 윤이상, 류퉁의 꿈도 보았지. 류퉁이 입었던 무대의상이 참 화려하던데. 마누라 바람 피는 바람에 마음 고생이 심했겠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찰라, 갑자기 섬광(閃光)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70살까지 산다면, 이제 얼마나 남았지? 그 순간, 나는 아연 소스라치고 말았다. 아직 어리다고 여겼던 내가, 어느새 인생의 꼭지점을 찍고 마침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재물을 모았고, 어느 정도의 권력을 얻었으며, 얼마만큼의 명예를 쌓아 올렸던가? 내가 성취한 일이 무엇이며, 그 성취는 나를 얼마나 만족시켰던가?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녕 내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 만큼도 남지 않았단 말인가! 40대는 40킬로, 50대는 50킬로, 60대는 60킬로의 속도로 달린다는데, 이 일을 어쩌지? 가속페달을 밟고 있던 다리에 힘이 빠졌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서른 즈음을 지나왔더니, 어느새 마흔 즈음에 이르렀구나. 내가 보내려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오려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지는’ 30대의 슬픔을 ‘뜨는’ 40대의 기쁨으로 위안 삼아야 했을까.

서른 즈음에 https://youtu.be/dHeqQu8a1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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