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1>돈데 보이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1>돈데 보이

조송현 승인 2017.12.02 00:00 | 최종 수정 2020.12.22 16:26 의견 0

돈데 보이 티시 이노호사. 출처: YouTube 캡쳐.

Donde Voy /티시 이노호사   https://www.youtube.com/watch?v=1eXCtBnkZ28  

룸펜(실업자) 시절이었다. 아니 취업준비생 시절이랄까?

20대 말 인생일대의 중대 결정을 단행했다. 진학은 물론 전공을 포기하기로 한 것. 이유를 꼭 꼬집어내기는 어렵다. 하여간 처음엔 시원하고 홀가분했다. 부담스런 물건을 툭 던져버린 기분이랄까? 그것도 잠시,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두어 달을 밤낮없이 당구장에서 지낸 것도 바로 그때였다.

‘너 물리 안 하면 뭐하고 살래?’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스리쿠션을 칠 때도, 나인 볼을 칠 때도 큐대로 당구공을 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을 찌르고 있었던 같다. ‘너 앞으로 뭐 할래?!’

내면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인생의 새 이정표를 찾아야 했다. 그래, 시골에 내려가자. 넉넉한 고향의 품에서 시간을 갖고 찾아보자.

웬걸, 고향이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다. 어머니께 면구스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조그만 면 단위 시골이다 보니 다 아는 안면들이다. 석사과정까지 마친 젊은 친구가 시골에서 빈둥거리고 있으니 의아스런 눈빛을 보낼 수밖에.

인간들은 속을 태우건 말건 세월은 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법. 계절이 바뀌어 봄이 왔다. 장터(면 소재지) 친구가 커피나 한 잔 하자며 손목을 잡아끈다. 신한다방. 안면 받힐까 내키지 않았으나 하도 채근하는 바람에 끌려 들어갔다. 10여 평의 아담한 다방은 10여 명의 손님들로 왁짜했다. 다들 우리보다 나이가 윗길로 초·중교 선배나 형님의 친구 되는 사람들이었다.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친구와 구석에 앉았다. 청아한 음색의 애잔한 노래가 들리는가 싶었을 때 아가씨가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귀에 들리는 노래 분위기와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

“쟤 꼬실라고 장터 아재들이 난리다.”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뗀 친구는 묻지도 않은 ‘정보’를 쏟아냈다. 보통 2달에 한 번씩 아가씨가 바뀐다, 시골다방에 오는 아가씨는 ‘퇴기’들이 대부분인데 이번에 온 이 아가씨는 아주 젊고 예쁘다, 대학을 나온 것 같다는 등. 이 친구야말로 그 아가씨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해보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고, 옷차림은 수수했으나 세련된 도회지 풍이었다. ‘다방 아가씨’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근데 정작 나의 관심은 방금 나온 노래였다. 팝송을 좋아해 웬만한 테이프는 다 갖고 있었지만 아까 그 노래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가사가 스페인어 같았다. 이탈리아 깐쪼네나 프랑스 샹송 풍과 달랐다. 가사만 스페인어이지 수수한 컨츄리 팝송 풍으로 들렸다.

다방을 나서면서 카운터에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스페인어 노래, 그 노래 제목이 뭐죠?” 그녀가 내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말했다. “돈데 보이.” 그녀를 붙잡고 가수가 누구며 가사내용은 뭔지 더 물어보고 싶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문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노래의 제목이자 후렴구인 ‘돈데 보이’를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터넷도, 네이버도 없던 시절 무슨 뜻인지 찾아볼 도리가 없었다. 다만 보이(voy)는 태양계 무인 탐사선 보이저(voyager)1, 2호처럼 여행이나 항해 같은 뜻이라고 짐작되었고, ‘솔로 에스토이(solo estoy)’에서 주인공이 혼자 된 슬픔과 쓸쓸함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감을 잡았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장터로 갔다. 다방 앞에 서성이다 용기를 내 들어갔다. 차를 주문하러 온 그녀에게 ‘돈데 보이’를 틀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테이프를 갈아끼웠다. 10여 곡이 모두 인기팝송이었다. 그러나 ‘돈데 보이’가 끝나면 다른 노래는 지루했다.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테이프를 자주 되감아주었다.

장터 발걸음이 잦아졌다. 신한다방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날이 다반사가 되었다. 하루는 그녀가 커피를 건네면서 눈짓을 하고는 태연히 돌아서 가버렸다. 영문을 몰라 커피 잔을 들었더니 커피 잔 밑에 접힌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오늘 문 닫고 나면 다시 와주세요.’

가슴이 쿵쾅거렸다. 얼굴도 달아오르는 듯했다. 시골이라 9시면 적막강산이다. 근데 지금은 8시, 한 시간가량 남았다.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 하나 건너면 초등학교다. 운동장을 서성이다 플라타너스 둥치에 등을 기대어 서 있기를 한참. 때 아닌 갈증이 왔다. 운동장 옆 수도에 가서 물을 들이켜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다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고 보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다방 홀은 컴컴했으나 주방 쪽 내실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작은 방은 촛불빛으로 가득했다. 방 가운데 작은 상에 생일 케익이 올려 있고 그 위에 촛불을 타고 있었다. 굵은 초 2개, 가는 초 5개.

오늘이 생일이라고, 혼자서 생일을 보내기는 싫었다고, 자기도 ‘돈데 보이’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돈데 보이’를 좋아하는 나를 내심 지켜보고 있었다고. 그녀는 초대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는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촛농이 흘러내리려 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박수를 치며 불러주었다. 샴페인으로 건배하고 한 잔씩 마셨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강가에 가요.”

다방에서 초등학교 쪽으로 100미터만 가면 횡천강이다. 지리산 청학동에서 발원하는 횡천강은 이곳 횡천을 지나고 100리를 흘러 섬진강에 합류한다. 강둑으로 나갔다. 때마침 하현달이 수리봉 위에 떠 있었다. 달빛 아래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소리는 부드럽고 조용했다.

운동화와 바지가 금방 이슬에 젖어버렸다. 그녀가 시골 둑길에 서툴러 손을 잡아줘야 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강둑길을 걸었다.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인생 항로의 푯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나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서로 말이 없었던 것도 동병상련, 이심전심이었기에 애초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얕은 여울을 그녀를 업고 건넜다. 강가 잔디밭에 버드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 있었다. 우린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고 바짝 붙어 앉았다. 여울의 물소리가 첼로선율처럼 부드럽게 귓가에 감겨들었다. 달빛이 적셔주는 강가 잔디밭은 우리 둘만의 새로운 세계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이틀 뒤 다시 신한다방을 찾았다. 그동안 집안 일로 부산을 다녀왔다. 그녀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좀이 쑤시기도 했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참았다가 얼굴 보면 반가움이 배가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터다.

“민이 떠났네!”

청천벽력이었다. “왜 떠났느냐?”고 묻자 다방주인 아주머니는 “다른 얘들보다 한 달 더 있었지” 했다. 원래 아가씨들은 두어 달 간격으로 들고 나니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투였다. 쪽지라도 남긴 게 없냐고 물었다가 ‘총각이 민이한테 마음 주고 있을 줄 몰랐네’하는 놀림만 들었을 뿐이다.

허탈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허탈감 서운함 의문이 마구 뒤섞여 머리를 휘저었다. 왜 한 마디 말도 쪽지도 남기지 않고 떠났을까? 엊그제 이신전심은 착각이었던가? 그녀의 표정은 어째서 ‘돈데 보이’의 색조를 닮았을까?

엊그제 시제를 모시러 고향에 들렀다. 작은 내실이 있는 다방은 그대로 있으나 강은 옛날 그 강이 아니다. 직강공사로 그 옛날 버드나무가 서 있는 잔디밭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20대의 마지막 해 청춘의 고뇌를 이신전심으로 나눈 그녀와 걸어간 강둑길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돈데 보이를 듣고 싶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Donde Voy /티시 이노호사 / 돈 데 보이(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Madrugada me ve corriendo (마드루가다 메 베 꼬리엔도) 새벽녘, 날이 밝아오자 난 달리고 있죠.

Bajo cielo que empieza color (바호 시엘로 께 엠피에사 꼴로르) 태양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에서. No me salgas sol a nombrar me (노 메 살가스 솔라 놈브라르메) 태양이여, 내 모습이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A la fuerza de "la migracion" (아 라 푸에르사) 데 라 미그라시온) 이민국에 드러나지 않도록. Un dolor que siento en el pecho (운 돌로로 께 시엔또 엔 엘 페초) 내 마음에 느끼는 이 고통은 Es mi alma que llere de amor (에스 미 알마 께 예레 데 아모르) 사랑으로 상처 받은 거예요. Pienso en ti y tus brazos que esperan (삐엔소 엔 띠 이 투스 브라소스 께 에스뻬란) 난 당신과 당신의 품안을 생각하고 있어요. Tus besos y tu passion (뚜스 베소스 이 투 빠시온) 당신의 입맞춤과 애정을 기다리면서. Donde voy, Donde voy (돈데 보이 돈데 보이)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Esperanza es mi destinacion (에스뻬란자 에스 미 데스띠나시온)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램이에요. Solo estoy, solo estoy (솔로 에스토이 솔로 에스토이) 난 혼자가 되어버린 거죠. 혼자가 되었어요. Por el monte profugo me voy (뽀르 엘 몬테 프로푸고 메 보이) 사막을 떠도는 도망자처럼 난 가고 있어요.

<돈데 보이>는 목숨을 걸고 미국 국경을 넘는 멕시칸의 애환이 담기 노래다. 1절은 국경을 넘으며 연인과 헤어져 혼자 사막에서 헤매는 심경을, 2절은 국경을 넘은 뒤 연인을 기다리는 쓸쓸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돈데 보이>는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싱어송라이터인 티시 이노호사(Tish Hinojosa)가 1989년 발표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노래다. 노래가사는 스페인어로 썼는데 제목 'Donde voy'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란 뜻이다. 우수와 슬픔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불법이민자의 슬프고도 처절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MBC 드라마 ‘배반의 장미’ 주제곡으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고정필자 김창욱 박사의 땜빵임을 알려드립니다. 혜량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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