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봉 시, 금수현 곡 '그네' 영상음악의 한 장면. 출처: 유튜브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을 바람에 실어가네
‘금수현'(金守賢 1919-1992) 하면, 으레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그네'(1947)다. 결이 고운 모시한복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이미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이다.
나는 생전에 금수현 선생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나는 즐겨 친구의 고향에 놀러갔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벌였다는 안골포(安骨浦) 언덕배기에는 아직 성터가 남아 있고, 그곳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는가 하면, 포터블에 '섹시 뮤직'이나 '펑키타운'을 걸어 놓고 흐드러지게 깨춤도 추었다.
가끔 우리는 '그네' 작곡가인 금수현 선생이 언덕 중턱에 지은 안골음악촌에 놀러갔다. 음악촌은 열 두어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각 조그마한 문패를 달고 길다랗게 늘어서 있었는데, 가운뎃 방에 선생과 전혜금(全蕙金) 여사가 기거하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음악촌에는 으레 휴양과 음악연습을 위해 서울에서 유명인사들이 내려왔다. 기억 나는 이로는 첼리스트 전봉초, 아나운서 차인태 등이었고, 그의 동생 금차현 씨의 방도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니, 바다가 호수인가 호수가 바다인가…”로 시작되는 '안골포'라는 가곡을 썼고, 오페라 '장보고'(張保皐)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금수현 선생과 여러 점에서 인연이 깊었다. 첫째, 선생은 나와 출생지가 같다. 선생은 강서구 대저1동, 나는 대저2동이 고향이다. 둘째, 선생과 나와 같은 핏줄이다. 둘다 김녕김씨 충의공파(金寧金氏 忠毅公派)다. 선생은 26세손, 나는 28세손이다. 셋째 우리는 대저중앙초등학교 동문이다. 언젠가 선생이 모교 방문 때 피아노 한 대를 선물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지연·혈연·학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까.
이런저런 연고로, 한때 나는 초창기 부산음악계의 파이오니어였던 그의 기념사업 계획을 꾸민 적이 적이 있다. 금수현 음악상 제정, 금수현 쳄버오케스트라 조직, 금수현 음악콩쿠르 및 금수현 창작편곡음악제 개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모한 사업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금수현앙상블(피아노3중주) 조차 구성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내년 금수현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강서구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부산시에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저1동 문화시설 용지에 기념관(자료실·공연장)이 포함된 금수현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존의 금수현 생가, '그네' 노래비, 30리 벚꽃길, 대저생태공원 유채꽃밭, 낙동강변으로 이어지는 문화관광 코스 개발을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지만, 퍽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국제음악당, 국제음악제, 국제음악콩쿠르, 기념공원, 기념관 등 통영시의 윤이상 선생 기념사업과 크게 대비되는 실정이다. 부디 금수현 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잘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척박한 서부산권에 마침내 문화의 물결이 넘실거릴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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