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8>점이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8>점이

김창욱 승인 2017.11.10 00:00 | 최종 수정 2017.11.13 00:00 의견 0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짙게 풍겨오는 낙엽향, 병영의 밤은 차고 쓸쓸했다. 그리고 춥고 긴 시간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함께 보초를 섰던 고참으로부터 <점이>(1982)를 처음 배웠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영남이 부른 이 노래는 진남성(본명은 진원용)이 작사·작곡했고, 전주는 물론 오블리가토(obligato, 성악에 종속적으로 사용되는 기악)에도 쓰인 트럼펫 음향이 퍽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우에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조국을 지키는 초병의 눈빛은 언제나 빛나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등병짜리 초병의 눈은 매양 게슴츠레했고, 진종일 내무반 바닥과 침상 닦이, 총기 수선에 매달리느라 언제나 눈꺼풀이 무거웠다.

사실, 졸병시절에 제일 부족한 게 잠이다.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혹은 잠시라도 고참 뒤치다꺼리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무엇보다 휴일 날 종교 활동에 매진해야 했다. 교회·절·성당, 어디가 좋을까?

교회는 시도 때도 없이 찬송가를 불렀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의식이 많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횟수를 쳐도 교회보다 적지 않았다. 나로서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교회나 성당은 예배를 마치면, 언제나 초코파이나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다.

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늘 ‘맨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은 휴일마다 병정들로 차고 넘쳤다. 스님의 목탁소리와 설법이 간간히, 그리고 아련히 들려오기도 했지만, 조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마음껏 졸 수 있는 것은 맨 바닥에 퍼질러 앉자마자 고개를 숙이면 그만이었던 터다.

나와 함께 보초를 섰던 고참은 나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그는 가슴이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다. 고향은 대구였고, 입대 전 공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손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힘도 좋았다. 남들이 꺼리는 일도 늘 앞장서서 도맡았다. 무엇보다 보초를 서면서 “내가 눈 뜨고 있을 테니, 졸리면 좀 자라”는 그의 말 한 마디는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

적막한 어느 날 밤, 그가 내게 물었다. <점이>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는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 주었다.

조영남의 <점이>가 실린 앨범 표지.

고향을 떠나 올 때에 이슬 맺힌 눈동자로 손을 흔들던 점이 얼굴이 꿈속에도 찾아오네.

점이, 딸기꽃이 세 번 피거든 점이, 그때는 마중 오오 점이, 그때까지 소식 없거든 점이, 다른 곳에 시집을 가오.

노랫말은 물론, 서정적인 선율이 순식간에 내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입대하는 날 아침, 마치 연인이 나를 위해 ‘이슬 맺힌 눈동자’로 ‘손을 흔들’어 주는 듯했다. 특히 ‘딸기꽃이 세 번’ 필 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다른 곳에 시집을 가’라는 노랫말에 하마터면 울컥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 노래는 군에서 금지곡이 되었다고 했다. 병정들이 탈영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탈영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군 생활 내내 이 노래를 듣고 부르지 않았다.

조영남의 <점이> https://youtu.be/l9DRbka8r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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