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3>사랑의 서약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3>사랑의 서약

김창욱 승인 2017.12.15 00:00 의견 0

<사랑의 서약>이 실린 한동준의 제3집 앨범 표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모든 사람의 축복에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죠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 때 지금처럼 내 곁에서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나요

함께 걸어가야 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우리들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없다는 것을 믿나요 힘든 날도 있겠죠

하지만 후횐 없어요 저 하늘이 부르는 그날까지 사랑만 가득하다는 것을 믿어요

내일모레는 내게 아주 특별한 날이다. 꼭 20년 전, 그러니까 1997년 12월 17일은 내가 어렵사리 장가를 든 날이자, 그토록 바라던 시간을 마침내 성취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 나는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늘 궁핍했고 언제나 외로움과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어쩌다 한겨울 골목길에서 찬바람을 맞을라치면 한 순간 왼쪽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연애를 하려면, 시간도 있고 돈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의 갈빗대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왜소하고 초췌한 내게 다가올 처자가 있기나 할 것인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어느날 ‘돌콩’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팅 주선 소식이었다. 형이 일러준대로 모월 모일 모시, 때 빼고 광도 낸 나는 광안리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로소 커피숍 문이 열렸고, 돌콩 만한 형이 얼굴을 삐죽히 디밀었다. 곧이어, 한 아가씨가 뒤따라 들어왔고, 그녀의 어깨 너머에 황금빛 아우라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밤마다 만났다.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프라이드는 기동력이 좋았고,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사통팔달 열려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맴돌던 우리는 머잖아 경주와 진주 등지를 쏘다닐 정도로 점차 보폭을 넓혔다.

그렇지만 내 속에는 단 하나의 궁금증이 맴돌기 시작했고, 그것은 좀처럼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사같이 생긴 여자들이 판을 치는 요즘, 믿을 만한 여자가 있을까? 이 여자는 과연 순정이라는 게 있을까? 있다면, 그 진정성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돈도, 시간도 없는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만약 아니면 어쩌지?

그러던 어느 한겨울 밤이었다. 연애질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군! 나 해운대 ○○콘도에 있는데, 지금 좀 나올 수 있나?” 한국음악학계의 태두이신 송방송 스승이었다. 평소 존경해 마지 않는 스승께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어찌 아니 갈 수 있으랴. 나는 그녀에게 곧장 다녀올 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내 마지막 자존심을 타고 휑하니 ○○콘도로 직행했다.

스승의 말씀은 길디 길었다. 내가 과거 영남대에서 사숙할 때 이야기부터 당신이 캐나다 맥길대학에 유학할 때와 국립국악원장 시절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나는 몇 번이고 다리를 고쳐 앉았다. 오직 내 머리 속에는 바깥에 남겨진 그녀 생각뿐이었다. 추위를 피해 어디에 들어갔을까? 두어 시간이나 흘렀는데, 그만 집에 갔을 수도 있겠지. 내가 괜히 나왔나? 대충 둘러대고 차라리 안 나왔어야 했는데….

벽시계는 어언 1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겨우 스승으로부터 해방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영하권의 날씨, 찬바람에 손끝이 시리고, 귀때기가 아려왔다. 나는 다시 내 마지막 자존심에 올라타고, 남겨졌던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차창 밖으로 매서운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1시가 다 됐는데, 아마 가고 없겠지? 벌써 집에 들어갔겠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도착해 보니, 이럴 수가! 아, 상가 지하실 계단에 기댄 채 그녀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그때 나는 그녀의 순정과 그 순정의 진정성을 마침내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녀를 낙점할 수 있었고, 이듬해 겨울을 맞으며, 우리는 혼사를 치렀다.

그날 동아대학교 교수회관은 가족과 친지, 사돈에 팔촌까지 가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축하무대는 후배들로 구성된 금관5중주의 연주로 장식했다. 특히 김광진이 작사·작곡하고 한동준이 노래한 「사랑의 서약」(1995)의 노랫말이 시나브로 가슴 속에 젖어 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는데,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 때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함께 걸어가야 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언제나 변함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저 하늘이 부르는 그날까지 사랑만 가득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오늘,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한 아가씨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오는 12월 17일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혼사를 치른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다. 식장은 ○○웨딩 그랜드홀. 그랜드홀에서 예식을 갖는 만큼 부디 그랜드한 마음으로 살아갈 일이다.

사랑의 서약 / 한동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