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25>사쿠라(櫻)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25>사쿠라(櫻)

김창욱 승인 2018.03.30 00:00 의견 0

중국 전통악기 고쟁(古箏)으로 일본민요 사쿠라를 연주하는 모습. 출처: 유튜브

사쿠라 사쿠라 3월의 하늘은 보이는 곳마다 안개처럼 구름처럼 향기가 퍼진다 어서, 어서 보러가자.

봄은 여울 물소리와 함께 오기도 하고, 버들잎의 가느다란 정맥(靜脈)을 타고 오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봄은 쭉 뻗은 고양이의 콧수염 끝에서 전해 오기도 하리라. 고양이의 털은 미인의 귀밑머리보다 가볍고 보드라우며, 호동그라니 투명한 눈알 속에는 여릿여릿 아지랑이가 피고 있다.

3월의 끝자락, 봄의 찬란한 풍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흐드러져 내린 연분홍 벚꽃이 사방천지에 만발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未堂, 上里果園)도 낸다.

벚꽃은 일본말로 ‘사쿠라'(櫻, さくら)라 부른다. 그들의 나라꽃이다. 해마다 이맘 때 생각 나는 음악이 있다면, 단연 '사쿠라'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때부터 불려진 일본의 전통민요다. 노래를 들어도 좋지만, 섬세한 울림을 가진 현악기 고쟁(古箏)의 연주는 더욱 좋다.

일본의 나라꽃, 일본의 민요 '사쿠라'는 왠지 따스함과 친근감이 느껴진다.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흰옷 입은 백성들, 그들의 핏줄을 타고 난 내가 일본 민요에 친숙함을 느끼다니? 어쩌면, 나는 전생에 친일파였을까? 아니면, 광복군을 토벌하던 일본 순사였는지도. 때때로 식민지 백성의 뜨거운 피가 용솟음 칠 때도 없지 않으니, 어쩌면 대륙을 누비던 독립운동가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쿠라'는 일본 특유의 전통적인 5음계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미야코부시(都節, みやこぶし) 음계, 즉 ‘라·시·도·미·파'의 5음으로 씌어졌다. 그런데 이 음계를 써서 만든 노래는 모두 일본색, 혹은 왜색(倭色)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황성옛터'(왕평 시, 전수린 곡, 이애리수 노래, 1928)나 '목포의 눈물'(문일석 시, 손목인 곡, 이난영 노래, 1935)이다. ‘작곡 이전의 작곡 조건'이라는 말이 있듯이 미야코부시 음계(작곡 조건)로 음악을 만들면 한결같이 그런 색깔이 나기 마련이다.

예닐곱 살 쯤이었을까? 나는 학교에서 동요를 배웠지만, 우리집과 우리 일가는 여전히 일본식 트로트 문화의 자장(磁場) 속에 놓여 있었다. 집안에 큰 잔치가 벌어지면, 마당에 천막이 둘러쳐 지거나, 안방에서 마루청까지 길다랗게 상(床)이 차려졌다. 그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에 진수성찬이 올려졌는데, 일가친척은 물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으레 상을 빙 둘러 자리를 잡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누군가의 선창을 필두로 다들 유행가 한 자락씩을 뽑았다. 좌중은 어김없이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아부지도 두드렸고, 형들도 두드렸다. 삼촌도 두드렸고 이모도 두드렸다. 사돈도 두드렸고, 팔촌도 두드렸다. 노래는 시계방향이나 그 반대방향으로 불려졌고, 어른들은 아이라고 해서 자리에서 소외시키거나 정해진 순서를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돌아가며 똑같이 한 자락씩을 노래한, 이른바 민주적인 노래문화가 꽃 피던 시절이었다.

이때 불려진 주요 레퍼토리가 바로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 대지의 항구, 나그네 설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적 음계로 만들어진 노래, 그런 노래 문화에 익숙했던 유․소년기,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졌던 '사쿠라'. 화류계 입문 30년에 겨우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밖에는 여전히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찬란한 벚꽃에 눈알이 다 시리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머잖아 바람이 불면, 흩날리는 꽃비의 처연함을 볼 수 있으리. 목련꽃 지면,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면 유채꽃 피리. 유채꽃이 진 자리엔 또 무슨 꽃이 피어날까?

일본민요 '사쿠라' https://youtu.be/2BFDy4cX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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