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9>즐거운 나의 집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9>즐거운 나의 집

김창욱 승인 2018.02.09 00:00 의견 0

1914년 발매된 '즐거운 나의 집' 음반 표지. 출처: 위키피디아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Michael William Balfe,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1843)라며 거대하고 화려한 세계를 갈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과 같은 곳은 없다”며 소박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전자의 경우를 욕망하겠으나, 드물게 후자를 택한 이가 바로 미국의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John Haward Payne 1852-1791)이다. 그가 쓴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은 곧바로 영국 작곡가 헨리 비숍(Henry Bishop)에 의해 선율이 붙여졌고, 머잖아 세계인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김재인이 옮긴 노랫말로 널리 알려졌다.

돈과 권력, 명예가 아무리 귀하고 높으며 사랑스럽다 하더라도 오직 가정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다분히 통속적인 내용이다. 따뜻하고 정답고 행복한 노랫말과는 달리, 정작 이 노랫말을 썼던 페인의 삶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13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얼마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프랑스·알제리 등지를 방랑하며 지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페인이 파리의 한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거닐던 중 유리창 너머의 한 가정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평화로운 저녁을 맞고 있었다. ‘나에게도 저런 가정이 있다면…’ 그는 남의 나라 알제리에서 자신의 고향과 행복한 가정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60 평생 독신이었다.

나도 페인처럼 오랫동안 뜨내기 삶을 살았다. 광안리 2층 전셋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가 얼마 후 대저(大渚) 본가로 들어갔다. 행랑채를 지키며 한 3년 살았을까? ‘부자간(父子間) 같이 살면, 머잖아 남편에게 액이 들이닥칠 것이다’는 신내림 받은 어느 점바치 이야기에 귀가 쏠깃해진 엄마가 행랑채 자식 부부를 하단(下端)으로 친히 내 보냈다. 때마침 동네 도로확장 공사로 우리집 땅뙈기가 일부 수용되었고, 그 땅값으로 마련된 전세금까지 아낌없이 쥐어 주면서.

우리는 전세금을 고이고이 모셔가며, 하단에서 당리로, 당리에서 또 당리로 몇 차례 전셋집을 옮겨 다녔다. 50줄이 다 돼서야 겨우 아파트를 하나 장만할 수 있었는데, 급전이 필요했던 집주인이 싼 값에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은 덕분이었다. 물론 은행에서 상당 액수의 대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무릇 세상의 큰 인물이 되려면, 집을 나서야 한다. 예수가 그랬고, 석가도 그랬다. 공자도 그랬고, 마호메트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이 엄동설한에 갈 곳도 없으려니와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을 지키리. 오! 사랑 나의 집, 만만찮은 대출금 즐거운 나의 집. 내 집을 지키리.

즐거운 나의 집 https://youtu.be/eB7PVkf-3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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