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9>에버 그린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9>에버 그린

김창욱 승인 2017.11.17 00:00 의견 0

봄이면 가끔씩 사랑이 움트고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이 피어납니다 겨울이 살며시 다가와 꽃잎이 시들면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그래도 제 사랑이 푸르다면 여름 가고 겨울 와도 싱그럽게 피어 있을 거예요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했던 사랑 변치 않을 거예요

수잔 잭스(Susan Jacks)가 노래한 <에버그린>(Evergreen)은 1980년에 나왔다. 물론 당대에도 폭넓은 인기를 모았지만,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MBC 드라마 <아들과 딸>의 삽입곡으로 쓰이면서였다.

총 64부작으로 구성된 <아들과 딸>은 매주 토·일요일 저녁 8시에 방송된 주말 드라마였다(1992.10.3-1993.5.9). 쌍둥이 남매인 귀남(최수종)이와 후남(김희애)이가 그 주인공. 엄마(정혜선)와 아부지(백일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온실 속에서 길러진 귀남이는 나중에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엄마의 차별과 냉대를 어렵사리 극복한 후남이는 검정고시로 국어교사가 되었고, 마침내 인기 작가로 발돋움한다는 줄거리다.

사실, 80년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남아선호 관념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왔으니까.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실의 변화가 확연했다. 대학마다 단과대 학생회·총학생회의 핵심 요직에 여학생들이 대거 진출했고, 그들은 졸업 때 각종 상장과 상패, 상금까지 휩쓸기 시작했다. 사법시험 합격자도 여성들이 수위를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산전벽해에 천지개벽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큰형과 작은형, 그리고 나를 낳았다. 위로 두 형을 낳은 엄마가 어느날 벌건 대낮, 밥상머리에서 아부지에게 말했다. 더 이상 아이를 못 낳겠다고. 어르신 모시랴, 농사일에 집안일 하랴, 게다가 아이까지 키운다는 것이 만만찮았던 터다. 그러나 순간, 아부지는 밥상을 마당귀까지 던져 뒤엎고 말았다. 덕분에, 나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고, 덤으로 누이까지 얻었다.

아부지의 사내아이에 대한 욕심은 의지할 만한 형제 없이 외동으로 자랐던 터다. 결과적으로, 사내아이 셋이나 낳은 엄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당당해졌다. 그러나 차세대에 이르러 남녀 스코어의 불균형이 심각했다. 큰형과 형수가 1남 1녀, 작은형과 형수가 2녀, 나와 이뿐이가 3녀를 낳았기 때문이다. 3녀나 낳은 이뿐이는 한동안 눈물을 찍어내야 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人間之事 塞翁之馬)라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바뀌었다. “딸 둘이면 금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은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딸 둘이 금메달이라면, 딸 셋이나 낳은 나는 다이아 메달감이 아닌가!

봄이면 사랑이 움트고, 여름이면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꽃잎이 시들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름 가고 겨울 와도 우리는 언제나 푸르름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엄마·아부지가 우리 탓에 빈 껍데기가 되었듯이, 우리는 우리 아이들 탓에 빈 껍데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문풍지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 듯, 어느새 내 무릎팍에도 스멀스멀 바람이 인다.

에버그린 https://www.youtube.com/watch?v=H3evJktdp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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