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13) - 제4장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출발

4.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출발

이광 승인 2023.06.09 14:12 | 최종 수정 2023.06.26 15:25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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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기사의 처 정순이 딸을 순산했다. 덕희는 이를 집안의 경사로 받아들여 시장에서 기저귀 천을 끊어 왔고 남해댁에게 미역국을 끓이게 했다. 딸에 대한 애절한 기억을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그녀는 정순의 젖이 잘 나오는지 아기가 설사는 안 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남해댁이 기철을 거실로 데리고 오면 잔소리를 해대던 전과는 달리 그냥 눈감아주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그럽게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준호는 전 과목 고르게 높은 점수를 받아 반에서 이등을 한 성적표를 들고 왔다. 준호의 말에 의하면 일등보다 총점에서 딱 일점 뒤진 성적이라 다음엔 일등을 노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집안의 경사에 이어 좋은 소식이 잇따르자 덕희는 신이 났고 이정식 또한 크게 기뻐했다. 반면 인호의 성적은 이정식의 기대를 크게 저버린 하위권이었다. 게다가 물리와 화학 과목은 누가 봐도 최하위였다. 인호 역시 성적을 떠나 의외로 낮은 석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두어 과목은 그런 대로 좋은 점수를 받았기에 중학교 때의 기준으로 봤을 땐 중간 정도의 석차를 예상했었다. 지금의 고등학교가 평균 수준이 더 높거나 아니면 모두들 중학교 때보다 더 노력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화가 단단히 난 이정식은 인호를 불러 앉혔다.
 
“인호 너, 학교에서 엉뚱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중학교 때는 공부 잘한다고 네 이모가 자랑도 하고 했잖아, 그 실력 다 대구에 놔두고 왔나?”
 
아버지의 면박에 머쓱해진 인호가 어물거리자 덕희가 끼어들었다.
 
“공부하는 줄 알고 과일 깎아 가지고 가보면 소설책이나 읽고 있고....... 너 그러다간 서울로 대학 못 간다.”
“서울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실력 갖고 갈 대학이 있나가 문제지.”
 
이정식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 끝부분을 쿵쿵 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이번 여름방학엔 머리 단단히 싸매고 공부해라. 대구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 이건 니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다 생각하고 근신해라. 지난번에 말도 없이 집 나갔을 때 매를 들려다 참았는데 이번에 또 허튼짓하면 그땐 니 다리가 부러지든지 몽둥이가 부러지든지 둘 중의 하나니까 알아서 해!”
“알았습니다.”
 
인호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대구에 갈 일이 막막해진 것도 안타까웠지만 그보다 나태하고 안이하게 시험에 임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여보, 애들 방학 동안 보낼 학원부터 알아보고 가정교사도 물색해 봐요. 이놈 이대로 뒀다간 딱 낭패 보게 생겼어.”
“알았어요. 근데 인호, 방학인데 제 이모한테 한 번은 보내야 안 되겠어요?”
“아니, 처형께서 오시면 어때?. 나도 처형 뵙고 싶네. 식사도 근사한 데서 한번 모시고 말이야.”
 
인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인호는 덕희가 지정해준 학원에 가서 영어와 수학 단과반 등록을 했다. 덕희는 대입에서 제일 중시되는 과목이 국어, 영어, 수학임을 잘 알았고 국어는 인호가 어느 정도 해낸다고 보고 있었다. 학원을 다녀와서 인호는 대구 시외전화를 신청했다. 덕희는 출타 중이었고, 남해댁이 소파에서 기철을 옆에 두고 라디오 음악을 듣고 있었다. 라디오 볼륨을 너무 크게 틀어놓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저 정도 소음에 노출되면 어린 기철에게도 영향을 줄 것 같았다. 인호는 전화가 연결되면 통화에도 지장을 주지 싶어 라디오 소리를 낮추었다. 남해댁이 대뜸 화를 냈다.
 
“야, 인호야. 내 지금 라디오 듣고 있는 거 암시로 그라기 있나?”
 
인호는 소리가 너무 크면 기철에게 해롭다는 말을 손짓을 섞어가며 전했다. 그녀는 인호의 말을 알아듣고 잠시 기철을 바라보더니 김이 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라믄 라디오 꺼뿌라. 저 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다 말아뿐다. 똘아, 너거 집에 가서 니 동생이나 보제이.”
 
남해댁이 기철을 데리고 나가고 얼마쯤 지나자 대구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인호는 이모에게 부산 오는 날 루시아, 세실리아와 함께 올 것을 당부했다. 루시아가 오지 않겠다고 하면 세실리아는 꼭 데리고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모 혼자 오면 내 또 가출할지 몰라.”
“알았응께 기다리고 있거래이. 니 엄마가 요번 토요일쯤 오라던데 일찍 출발하꾸마. 나중에 니 엄마 들어오믄 이모가 함 더 통화하께.”
 
이모 옆에 안나 아주머니가 있어 수화기를 통해 그녀가 하는 말도 흘러 들어왔다. 안나는 두 딸들에게 부산 바람 씌우게 해줄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통화를 끝내고 홀가분한 걸음으로 마당을 나왔다. 코리가 어서 오라는 시늉으로 앞발을 들어 보였다. 인호는 모처럼 코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야산을 올랐다. 산 중턱엔 오랜 기간의 풍화로 윗부분이 둥그렇게 파인 원추형의 바위가 눈길을 끌었는데 한 사람 정도 올라설 만한 곳이었다. 바위 위에 서면 유엔묘지의 전경이 주변 경관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전쟁의 상흔인 묘지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였다. 인호는 죽음이 현생의 종결이기도 하지만 자연에의 귀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과 영원한 안식, 의미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차원으로 바라보는 내세관이 그에게 형성되어 있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온전한 부활이라면 현생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전혀 딴 세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만약 현생과 아예 무관한 내세라면 부활이 과연 진정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저녁식사 후 온 가족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자리였다. 인호는 덕희에게 부엌에서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남해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삼년 전 세실리아가 안경을 끼고 밤하늘의 별들을 새롭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엄마, 아줌마 보청기 하면 잘 들릴까요?”
“글쎄. 안하는 것보단 낫겠지. 안 그래도 전에 남해댁한테 하나 장만하라 했더니 안 한다더라.”
“왜요?”
“돈이 아까워서겠지. 아줌마가 돈을 목숨처럼 아껴.”
“그럼 엄마가 사주면 안돼요?”
“그거 생각보다 비싸. 그라고 아줌마 돈 많다. 돈 쓸데가 없으니 월급 받는 족족 돈이 모이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이정식이 얼굴을 덕희 쪽으로 돌렸다.
“보청기 그거 당신이 하나 해줘. 남해댁이 밉상스런 구석도 있지만 인호 무릎 아프다고 약 해준 거 봐, 말은 안 해도 고맙더라고.”
 
이정식의 말에 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방학을 하고 맞는 첫 토요일이었다. 대구에서 경숙이 바깥채 두 딸을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에 이정식은 출근하고 나서 집으로 차를 보냈다. 덕희는 인호에게 역에 나가 이모 일행을 마중하고 다 같이 시내 구경을 하라고 했다. 덕희도 함께할 뜻이 없지 않았으나 승용차 정원초과라 인호만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인호에게 넉넉한 점심값을 손에 쥐어주었다. 인호는 그 돈과는 별도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오백 원도 꺼내 지갑에 넣었다. 덕희가 말했다.
 
“가봐라, 지금 가면 시간이 맞겠다. 황기사한테 이야기해 놨지만 저녁은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할 거니 그리 알고...... 이모는 하룻밤 주무시고 가면 좋을 건데 걔들 때문에 바로 가신단다.”
 
인호가 대문을 열고나오니, 황기사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앞좌석 문을 열고 인호가 앉자 그의 환한 표정을 읽은 황기사도 밝게 웃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호 오늘 엄청 기분 좋은갑네. 그 바람에 내까지 입이 다 벌어지구마.”
“내 얼굴에 신난다, 라고 쓰여 있죠? 근데 아기 이름은 뭐라 지었어요?”
“아직 못 정했다. 내가 기숙이라 하자니까 집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칸다.”
“내가 한번 지어볼까요?”
“니가? 그래 뭐 좋은 기 있나?”
“금빛 어때요? 황금빛!”
“어, 가만 있자. 금빛! 황금빛! 이름에서 빛이 반짝반짝 나는 기 괜찮네.”
 
차가 부산역 앞에 도착했다. 인호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데도 서둘러 승객 출구 앞으로 달려갔다. 도착 예정시간이 좀 지난 후 승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두가 출구를 빠져나올 때쯤 경숙 일행이 보였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세실리아와 루시아가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인호는 양손을 들고 흔들다가 제 자리에서 풀쩍풀쩍 뛰기도 했다. 인호를 발견한 루시아가 손을 들고 흔들었다. 인호는 출구를 빠져나오는 그들 앞에서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이모! 세실아! 루시아 누나!”
 
인호는 이모의 손을 잡고 나서 세실리아와 다시 눈을 맞추었다. 세실리아의 두 눈 속엔 반가움과 설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옆에서 키를 대어보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인호는 하루가 다르게 크나봐.”
“누나는 사과를 많이 먹었나? 훨씬 예뻐졌네. 세실이도 확실히 더 큰 거 같다.”
“난 엄지손가락만큼 컸는데 오빤 한 뼘은 더 큰 거 같아.”
경숙은 애들을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셋을 번갈아보며 웃었다.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황 기사를 알아본 루시아가 들뜬 목소리를 했다.
“황 기사 아저씨다. 야, 드디어 저 차 타보게 되네.”
 
황 기사가 경숙에게 절을 하자 경숙은 득녀를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차가 태종대를 향해 출발했다. 인호가 앞좌석에 앉고, 운전석 바로 뒤엔 루시아 그 옆은 세실리아 그리고 경숙 순으로 앉았다. 황 기사가 백미러로 뒷좌석과 교감하며 관광 안내원처럼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지금 이 차는 태종대를 향해 출발하고 있슴니더. 태종대에 가믄 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가 한눈에 좍 펼쳐짐니더. 가는 길에 영도다리가 나오는데 이기 옛날에는 하루에 두 번씩 밑으로 배 지나댕기라꼬 사람 다리처럼 발을 번쩍 들었다 아임니꺼. 작은 배들이야 수시로 들락날락 그랬지만 큰 배들은 그 시간에 맞차 지나가고 그랬심니더. 영도다리도 늙어가 인자는 두 다리 좍 뻗고 고마 아무 생각 없이 지냄니더. 그건 글코 우리가 가는 태종대는 옛날 신라 시대 태종 임금님이 경치에 반해 쉬고 갔다캐서 전해져 오는 이름임니더. 경치가 뭐시 어떤지 지금 얘기해봤자 소용업꼬 그냥 가서 보시믄 입이 쩍 벌어질 낍니더. 태종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믄 여러분 배꼽시계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싶슴니더. 그라믄 남포동에 가서 완당집에서 맛있는 완당 한 그륵 묵고 또 다시 출발! 송도로 가는 김니더. 송도 해수욕장은 요새 수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낌니더만 아쉽게도 여러분은 일정상 수영은 몬하고 구경만 하는 김니더. 그 대신 케이블카를 타고 구름다리를 건너감니더.”
 
미소를 가득 머금고 황
기사의 말을 경청하던 세실리아가 예전 인호가 들려준 구름다리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구름다리를 되뇌며 앞에 앉은 인호의 왼쪽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인호는 세실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누었다. 황 기사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다음으로 차는 비둘기 떼들이 기다리는 용두산 공원으로 가서, 이순신 장군 동상도 보고 꽃시계도 보고 팔각정에 올라감니더. 거기 가믄 부산 시내가 보이고 좀 있음 우리가 건너갈 영도다리도 보이고,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는 항구도 보임니더. 그라믄 오늘의 관광을 마치고 여러분을 환영하는 저녁식사 장소로 가는 김니더. 부산역 건너편 중국 사람이 직접 하는 큰 식당으로 감니더. 모두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라믄서 안내 말씀은 일단 여서 끝맺심니더.”
 
세실리아가 먼저 박수를 치자 뒷좌석은 박수소리로 넘쳐났다. 인호도 박수에 가세했다. 황기사의 말에 다들 즐거워하는 게 기분이 좋았다. 박수를 받고 흥이 난 황기사는 잠시 후 다시 한 번 일행을 주목시켰다.
 
“여러분, 지금 바로 옆에 보이는 건물이 시청임니더. 그라고 아까 말씀 드린 영도다리가 보이기 시작하네예. 다리에 올라서믄 오른편에 자갈치 시장이 보일 낍니더. 자, 차가 드디어 영도다리 올라섬니더.”
“참 오랜만이데이. 여서 보이 영도는 변한 기 없구마. 영도다리만 늙었는갑네.”
 
차창 너머를 둘러보던 경숙은 잠시 감회에 젖어들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어느새 차가 태종대에 들어섰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기슭을 끼고 바다와 접한 절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태종대 등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차에서 내린 일행은 황 기사의 인도로 기암괴석이 펼쳐진 해안 절경을 보며 수없이 많은 자갈이 깔려 있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갈, 자갈’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 기사가 일행을 멈추게 한 다음 손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야트막하게 돋아 있는 대마도의 윤곽이 눈에 잡혔다. 세실리아가 무릎을 접고 물기에 윤이 나는 조약돌을 집었다 놓았다 하며 고르기 시작했다. 인호가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렸다.
 
“내가 예쁜 돌 찾아줄까?”
“다 예쁜 데 그 중에서 제일 예쁜 거 하나만 고르려고.”
인호가 옆에서 조약돌을 뒤적이자 그녀는 까맣고 작은 돌 하나를 손에 들었다.
“오빠, 이거 어때?”
“좋은데 좀 안 작나?”
“좀 더 큰 걸 가져갈까? 책상 위에 두려면 조금 더 큰 게 좋겠지?”
“자, 이건 어떻노?”
“고것도 예쁘네. 알록달록한 게 참 곱다.”
“그래? 그럼 이건?”
인호는 눈을 번득이며 조금이라도 돋보이는 돌이 있으면 집어 들어 세실리아의 선택을 기다렸다. 잠시 그를 살펴보던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빠, 지난번 대구 왔을 때 파출소에 잡혀갔다면서?”
“음, 그랬지. 내가 니 만나고 갈려고 여관에서 하룻밤 잤는데 경찰이 와서 무슨 간첩처럼 잡아가더라구. 그 바람에 니 보러 가지도 못하고 말았다 아이가.”
“나도 오빠 생각 많이 했어. 첨엔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근근이 참았지, 뭐.”
“내 졸업하고 부산 가던 날, 니 억수로 울었다며?”
세실리아는 수줍은 눈빛을 하며 그날을 상기하는 듯했다.
“그날 니가 준 돈 오백 원 지금도 잘 갖고 있다.”
“그걸 여태 안 썼어?”
“그 귀한 돈 함부로 쓸 수 있나, 오늘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보자, 이 돌은 내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줄게. 이 돌 보면서 내 생각해.”
“그럼 이 돌은 나중에 오빠가 가져. 오빠도 내 생각하면서 이 돌 봐야 돼.”
 
일행은 등대로 통하는 돌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올랐다. 등대를 둘러보고 나서 매점에 들렀다. 먼저 온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경숙은 루시아에게 돈을 건네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오게 했다. 그녀는 태종대 등대 앞에서 남편 최우진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련히 되살아나는 추억 속의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른 지금 혼자 남은 그녀를 찬찬히 위로해주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남기고 간 그리움은 아이스크림처럼 감미롭게 그녀의 가슴을 적시며 녹아내렸다.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낼 즈음 일행은 태종대를 빠져나왔다. 남포동에서 완당을 먹은 그들은 예정대로 송도로 향했다. 처음 접하는 완당의 맛이 입에 잘 맞아 루시아와 세실리아는 한 그릇을 깔끔히 비우고 만족해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라 송도는 해수욕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바다 위의 다이빙대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세실리아가 그들의 안녕을 빌며 지켜보고 있었고, 루시아는 보트를 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며 보트의 수를 헤아리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갔다. 황기사가 표를 끊는 동안 입장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뒤를 인호가 먼저 잇고 세실리아가 바로 따라붙었다. 루시아는 경숙의 뒤에 서서 거북섬 쪽을 가리켰다.
 
“저 섬이 거북섬인가요? 섬이 조그마하네요.”
“그냥 작은 바위섬이데이. 그 옆에 다리 보이제? 그기 구름다리고.”
 
경숙의 말을 들은 세실리아도 구름다리 쪽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있어서 구름다리가 흔들리는 모습은 식별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승강장으로 케이블카가 점점 올라오자 세실리아는 인호의 뒤에 바싹 붙어 그의 등에 손을 대고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는 구름다리보다 케이블카가 더 무서울 것 같아.”
“케이블카는 하나도 안 무섭다. 타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구름다리는 니가 몰라서 그렇지 발이 잘 안 떨어질 낀데.”
 
인호는 경험자로서의 여유를 보이며 구름다리에서 허둥댈 세실리아를 상상하며 웃음을 삼켰다. 일행을 태운 케이블카가 줄에 매달려 목적지 거북섬을 향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긴장이 풀린 세실리아는 넓은 창을 통해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두루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그런 세실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인호를 바라보던 루시아는 고개를 경숙에게로 돌렸다. 경숙 또한 그들을 지켜보다 루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이 웃음을 주고받았다.
 
인호의 예상대로 세실리아는 구름다리 초입에서부터 발을 떼기를 주저했다. 구름다리는 앞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일부러 발을 구르는 바람에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리 아래에는 바위섬과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바다의 현장감을 십분 살려주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두려움을 털어내지 못하고 양손을 인호와 루시아에게 각각 맡기고 간신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그녀도 조금씩 용기를 얻는 것 같았다. 중간쯤에 다다르자 흔들림이 절정을 달해 난간을 잡고 몸을 가누어가며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황기사는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몰고 오기 위해 먼저 다리를 건넜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세실리아가 한 손은 난간을 잡고 한 손은 인호에게 주며 큰 물결처럼 출렁이는 길을 헤쳐 나갔다. 루시아는 경숙과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구름다리는 끝까지 흔들렸다. 무사히 다리를 건너고 나서 세실리아는 힘든 여정을 마친 것처럼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무섭기도 했지만 아슬아슬한 재미도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송도를 거쳐 차가 용두산 공원에 도착했다. 일행은 공원 광장을 둘러보았다. 비둘기들이 먹이를 던져주는 사람들 주변에 몰려 부지런히 부리를 쪼아대고 있었다. 갑옷 차림에 칼을 차고 바다를 지키고 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위엄이란 이런 거라는 본을 보여주었다. 인호는 루시아와 세실리아에게 4.19 혁명 기념탑에 대해 이야기했다. 4,1,9의 숫자 형태로 배와 배의 닻 형상을 담은 탑이었다. 팔각정 부근은 부산 타워를 짓기 위한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만찬 장소로 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황기사는 모두에게 돌아가자는 신호의 손짓을 했다.
 
식당에는 덕희와 준호가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행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루시아와 세실리아가 덕희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늘의 소감을 인호가 짤막하게 즐거웠다고 정리했고 경숙은 황기사의 수고를 치하했다. 얼마 후 이정식이 밝게 웃는 낯으로 들어왔다. 원탁 위에 음식이 놓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요리가 비워지기 전에 또 다른 요리가 차례차례 들어왔다. 그때마다 모두 자기 앞의 작은 접시에 원하는 만큼 덜어먹었다. 경숙은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루시아와 세실리아를 위해 음식을 적당량 접시에 담아주었다.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정식이 경숙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걸었다. 경숙이 웃으며 아주 맛있다고 답했다. 이정식은 현재의 사업이 탄탄대로를 달리며 성장하고 있음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면서 모든 일이 처형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감사의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준호는 식당에서 내어주는 중국차 대신 사이다를 요구했다. 덕희가 경숙을 보며 말했다.
 
“준호가 저리 사이다를 찾아요. 형부가 사이다 공장 하던 때가 가끔 생각나요. 그땐 나도 사이다 참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덕희가 말을 꺼내놓고 괜한 말을 했나 싶은지 말끝을 흐렸다. 경숙은 덕희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찻잔을 들었다.
 
예매를 해둔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역 대합실에 다다라 이정식은 경숙과 마주하며 섰다.
 
“처형, 얼굴 자주 보여 주십시오. 저한테 처가 식구는 처형뿐이지 않습니까. 건강하시고요.”
“제부, 오늘 고마웠심더. 늘 건강하이소.”
 
경숙이 인사말을 맺자 덕희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인호는 세실리아에게 태종대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건네주며 말했다.
 
“부산 온 기념으로 선물 살라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네. 자, 이 돌이 선물이다.”
“오빠, 공부 열심히 해. 나도 잘 하고 있을게.”
 
세실리아도 제가 주운 돌을 인호 앞에 내밀었다. 루시아가 다가와 세실리아를 이끌더니 두 자매는 이정식 부부에게 고개 숙여 절을 올렸다. 마침내 대구로 갈 사람들이 떠나기 위해 개찰구로 들어섰다. 인호는 그 역시 함께 떠나야 하는데 아직 남아서 할일이 있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은 다소 쓸쓸한 일이었다. 그는 오늘 세실리아와 함께한 시간의 꽃을 화병에 담듯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란 꽃도 결국은 시들고 말아 새롭게 피어나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기다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호는 세실리아가 건네준 돌을 꺼내 지그시 쥐어보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지 이 주째 접어드는 날이었다. 간밤부터 큰 비가 내렸다. 서울 지역에 이미 큰 상처를 입힌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학교에서 구덕산 저수지 둑이 무너졌다는 소식과 함께 칠십여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새벽녘에 일어난 사고라 대부분 잠결에 당해 피해가 컸다고 했고 피해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구덕산 저수지는 인호가 어릴 때 아버지와 가끔 찾던 곳이었다. 그리고 수마가 휩쓸고 간 그 곳은 그가 대구로 가기 전까지 살던 동네였다. 또한 현재의 집이 지어져 황 기사가 함께 살게 되면서 그가 비우고 온 집도 거기 있었다. 만약 황기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계속 거기서 지냈더라면 그들도 목숨을 잃었거나 수재민이 되었을 것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에 그저 멍해진 인호는 여전히 비를 뿌리고 있는 잿빛 하늘을 보며 몸서리쳤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 참사는 황 기사네를 완전히 비켜간 게 아니었다. 황 기사가 이사한 후 신혼생활을 꾸리던 정순의 남동생이 그 집으로 살림을 옮긴 것이었다. 그들 부부의 단꿈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린 현장을 찾은 황 기사는 그 사실을 전화로 덕희에게 알렸다. 덕희는 침통한 얼굴로 정순의 방문을 두드렸다. 정순은 백일이 채 되지 않는 딸을 재우고 있던 중이었다. 덕희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정순에게 가까스로 전하고 건너왔다. 그리고 남해댁에게 어서 가서 정순을 돌보라고 했다. 정순은 청천벼락 같은 남동생 내외의 죽음 앞에서 오열을 터뜨렸다. 남해댁이 주문을 외우듯 정순을 위로하는 소리가 잦아드는 빗속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좋은 데 갔다고 생각하거래이...... 좋은 데 갔다고 생각하거래이.”
 
그날 밤 인호는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주님이 당신 품으로 그들을 받아들여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해주시길 청원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 한구석에선 주님을 향한 원망 섞인 소리가 빗발치고 있었다.
 
“주님, 왜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셨습니까? 그들이 사는 동네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많아 일찍 데려가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에게 이 세상의 죄를 물은 것입니까?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서 어찌하여 그들을 사지에서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외람된 항의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묵상에 잠긴 인호는 마음속으로 제 자신이 주님을 대신해 답변을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몰두해도 주님의 뜻을 헤아린다는 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인호는 주님이 그를 성교회로 인도해주셨듯이 언젠가는 그에게 주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해주시길 바라며 묵상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안정시켜 줄 말씀을 접하고 싶어 신약성경을 꺼냈다. 그는 종종 펼쳐보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 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여러 날이 흘렀다. 수마가 할퀴고 간 그날의 아픔도 조금씩 아물어갔다. 황 기사의 딸 금비가 백일을 맞았다. 아침상엔 금비의 백일 떡이 올라와 있었다. 금비는 인호의 작명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정순은 뜻은 좋으나 발음하기 어렵다며 금빛에서 받침 하나를 떼어냈다. 아기의 백일을 축복하기 위해 그들은 수재가 남긴 비통한 기억을 일상 속에서 과거의 영역으로 넘겨주어야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학교에서 인호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여름방학 동안 학원에서 영어, 수학을 수강하며 일시적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였지만 인호는 그 이상 의욕을 가지지 못했다. 머리에서는 공부하라고 명령이 떨어졌지만 가슴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물리 시간이었다. 인호는 물리 교과서 위에 최근 들어 읽기 시작한 소설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옆 자리의 태영이 주의하라는 뜻으로 그의 허벅지를 엄지로 찔렀다. 그러면 마지못해 인호의 시선이 칠판을 향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인호는 물리 선생의 눈치를 살피기는커녕 소설에 푹 빠져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물리 선생은 자신이 열성을 다해 강의하고 있음에도 이를 아예 무시하는 인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보다 못한 선생이 행동을 취했다.
 
“저기, 너! 이리 나와!”
 
그는 지난번에도 분필 조각을 인호에게 던지며 수업 태도를 지적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선생의 눈빛은 화가 끓어올라 이글거리는 반면 인호는 교단 앞에 설 때까지 소설 속의 상황과 당면한 현실 사이에서 초점 잃은 눈빛을 했다. 선생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 않는 죄인을 응징하듯 바로 앞에 다가선 인호의 뺨에다 손바닥을 날렸다. 불시의 일격을 당한 인호는 황당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또다시 두 번째 날아오는 손을 피했으나 뒤이어 턱을 스치는 가격을 당했다. 앞서 뺨을 맞은 부위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웃어? 그래, 너 같은 자식을 두고도 네 집에선 우리 아들 잘되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겠지.”
 
저보다 부모에 대한 모욕 같은 선생의 말투가 듣기 거북해 인호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눈총은 선생의 화를 계속 돋우게 할 따름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인호의 다리 부위로 공을 차듯 발길질을 가했다. 인호는 정강이에 받은 충격으로 그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교실엔 정적이 감돌았고 인호의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선생은 분을 못 이긴 체벌을 자중해야겠다 싶었는지 옆으로 비켜섰다. 진정은 되었지만 앙금이 남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리로 돌아가! 이제부터 네 놈은 열외다.”
 
인호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영은 그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앉도록 걸상을 뒤로 밀쳐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물리 시간은 인호의 독서 시간이었다. 게다가 인호는 독서 시간의 영역을 더욱 넓혀 나갔다. 독일어 시간에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이를 본 독일어 선생은 그의 책상으로 다가가 시집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시집을 도로 내려놓았다. 주변 학생들이 그 순간을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은 손가락을 뭉쳐 수박이 익었는지 두드리듯 인호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려보곤 교단으로 돌아갔다. 태영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인호는 만약 릴케가 아니고 다른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선생도 한때 릴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았다.
 
학교 교지에서 원고를 모집했다. 인호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일전에 적어두었던 시를 살펴보았다. 활자로 만날 자신의 작품을 기대하며 퇴고를 거듭했다.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 형식으로 쓴 시였다. 몇 줄을 버리고 단 한 줄을 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요즘의 심경이 잘 함축된 글이 나왔다. 인호는 창작의 고통과 희열마저 안겨준 시를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제목은 팽이였다.
 
 
배움이 재미나던 학교는 졸업했다
새로운 학창생활 끝은 아직 멀고 먼데
길 위를 겉도는 걸음 자꾸 뒤를 돌아본다
 
마당에서 팽이 치던 그 날로 가고 싶다
주머니 불룩하게 팽이 넣고 다닌 바지
다시는 입을 수 없게 나는 이미 커버렸네
 
언제 어디서든 빙빙 돌며 피어난 꿈
손때 묻은 팽이에는 시간이 멎어 있다
내 마음 휘감을 팽이채 어디 가서 구할까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인호는 이번 학기에도 공부를 소홀히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어, 영어 과목은 다소 향상되었으나 다른 과목들은 지난학기보다 못한 성적이었다. 특히 물리 과목은 영점이었다. 인호는 그에게 모멸감을 주며 폭력을 행사했던 물리선생에 대한 거부감으로 시험 문제지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준호는 일 학기와 마찬가지로 이등 성적을 쥐고 왔다. 일등을 따라잡지 못한 아쉬움이 묻은 표정은 파안대소하는 아버지의 칭찬에 힘입어 해맑게 지워졌다. 이정식은 인호 앞에서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인호는 회초리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아는 이정식은 덕희에게 화살을 돌렸다.
 
“당신. 땅 보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인호가 공부를 하는 건지 공부랑 담을 쌓고 있는 건지 관심 좀 가져요.”
 
덕희는 갑자기 자기에게 날아온 화살에 바로 방패를 내밀었다.
 
“아니, 땅 보러 다니는 거 어디 놀러 다니는 줄 아세요? 지난번에 주유소 자리도 다 땅값이 쌀 때 사둔 덕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면서요. 잘했다고 박수쳐 줄 땐 언제고.......”
“아니, 내 말은, 무슨 방도를 찾자는 건데....... 저놈 저리 놔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단 말이지.”
 
덕희의 적극적인 방어에 어조를 바꾼 이정식은 결국 원인제공자인 인호한테 한바탕 퍼부었다.
 
“니 땜에 엄마랑 싸움 나겠다! 니가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이번 겨울방학 땐 죽자 사자 공부해야 될 거다. 이 성적 갖곤 대학 문 앞에 얼씬도 못해! 내 말 길게 안할라 했는데 니 쳐다보니 입이 안 다물어진다. 니는 우리 집 장남이야, 장남! 제발 아버지 실망 좀 그만 시켜라! 봐라, 니 동생한테 부끄럽지도 않나? 준호는 이등을 해놓고도 일등 못한 걸 뼈아파하는데 니는 또 소설책이나 뒤질 생각 하고 있제? 좋게 말할 때 정신 바짝 차리자. 이번 겨울방학 지켜볼 테니깐 더는 실망하는 일 안 생기게 해라.”
 
인호는 이정식의 꾸지람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부모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은 못할망정 실망만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진한 성적은 수업태도 등 다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다. 인호는 방학 동안 공부에 매진하리라 작정했다. 결의를 다지는 뜻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주님께 인도를 청하는 화살기도를 올렸다.
 
방학이 시작되어 인호는 준호와 같은 학원에 등록했다. 준호는 중학교 이학년을 대비한 수강신청을 했고 인호는 고등학교 일학년 과정을 복습하는 한 단계 낮은 반을 택했다. 덕희는 학원 수업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인호의 가정교사를 알아보았다. 마침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온 서울의 유명 대학 전자공학과 학생이 나타났다. 인호가 학원을 마치고 오면 주말을 빼고 매일 두 시간씩 가르쳐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대학생은 두뇌는 명석한지 몰라도 가정교사로서의 사명감은 갖고 있지 않았다. 주어진 수업시간을 최대한 자기 시간으로 활용했다. 인호에게 공부를 지시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식이었다. 인호가 공부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전공 서적을 뒤졌다. 반면 인호는 그 두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싶었다. 이해가 안 되는 영어 문장이나 수학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그에게 보이면 그는 인호가 충분히 이해하도록 설명해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인호의 수준조차 파악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문제를 풀어 답을 알려주는 식이거나 이런 건 무조건 외워두는 게 상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덕희가 직접 과일이나 다과를 방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에 덕희는 학습지도 하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인호에게 그가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인호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력한 긍정은 곧 부정적임을 에둘러 표하는 것이었다. 이주 정도 지켜보던 덕희는 그에게 반달치 수업료를 내놓고 내일부턴 오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하는 그를 내보내곤 그녀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새파란 게 날로 먹으려고 하고 있어.”
 
덕희는 입주하여 인호를 지도할 가정교사를 알아보기로 했고,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사람을 골라야겠다고 판단했다.
 
 
겨울방학을 맞으면서 선포된 유신헌법은 긴 겨울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 개학이 되어 돌아온 학교에서는 수업 첫날부터 여덟 시간 수업이 이루어졌고 마지막 두 시간은 교련이었다. 교련선생은 앞으론 상부에서 각 학교의 교련교육 상황을 철저히 검열할 거리며 총검술 제대로 못하는 학생이 나오지 않도록 훈련에 집중할 것을 힘주어 말했다. 영어선생은 수업시간 중에 국군 통수권자가 학교도 군대처럼 통솔할 모양이라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는 총통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태영에겐 서울의 대학을 다니던 사촌형이 있었다. 태영의 사촌형은 지난해 대학 교련 반대시위에 가담했다가 군대에 강제 징집 당한 경우였다. 그는 육군 최전방 부대에서 복무하다 얼마 전 의병 제대를 했는데 다리를 전다고 했다. 학생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자대에서 몽둥이찜질을 받은 후유증이라는 것이었다.
 
학교 교지가 배부되었다. 인호는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교지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게재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 편집 실수로 누락되었나 싶어 목차부터 다시 뒤져보았지만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내 작품이 수준 미달이란 말인가. 일학년 응모자가 몇 되지 않을 텐데 거기에서 탈락되었다면 작가로서의 소질이 없다는 말인가. 별 거 아니라고 스스로 달랬지만 괜스레 씁쓸해졌다. 목차의 시 부문에는 일학년생 세 명의 이름과 작품명이 적혀 있었다. 그들의 시를 쭉 읽어보았다. 한 명의 작품은 생동감 있는 표현과 마음을 끄는 시구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인호가 보기엔 공연한 넋두리이거나 정서적 사치로 꾸며낸 언어의 모자이크란 느낌이었다.
 
이학년을 앞두고 새로운 반 편성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졌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은 번호순으로 한 사람씩 호명하며 각자 이학년이 되어 소속될 반을 알려주었다.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나누어지고 우수한 성적의 학생은 특별반으로 부름 받았다. 인호는 문과가 적성에 맞았으나 자신의 성적으론 이과로 배정될 게 확실했다. 지원자가 많은 문과반의 편성 기준은 적성이 아닌 성적순이었다. 반에서 꼴찌를 번갈아 하는 몇몇은 특수반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특수반엔 두 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 중의 하나가 인호였다. 인호는 제 귀를 의심했으나 놀라워하는 태영의 얼굴에서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나중에 반별 명단이 유인물로 나올 거다. 그리고 이인호, 나 좀 보자.”
 
인호는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담임선생을 따라나섰다. 담임선생은 그를 교무실로 데려가지 않고 상담실로 이끌었다. 상담실에서 마주 앉자 담임선생은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않는 인호를 측은히 바라보았다. 그는 먼저 인호를 일반반에 올리지 못한 담임으로서의 역부족을 탓했다. 그리고 인호의 특수반 배치 결정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특수반은 너도 알다시피 예체능 특기생을 한 반에 관리하면서 학업성적이 심히 부진한 학생들도 별도 훈육한다는 학교장의 방침으로 생긴 거다. 낙제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유급시키지 않고 구제한다는 취지도 있지. 그런데 이게 설령 좋은 제도로 출발했다 해도 학급의 평균 점수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학생들만 따로 모아 방치하는 문제점도 있다고 본다. 이런 제도가 교육적으로 오히려 나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 거지. 너도 거기 가면 그나마 유지하던 성적마저 더 떨어질지 모른다. 몇몇 교사들이 특수반 제도의 시정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전체적으로 봐선 학습 환경개선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면서 바로 묵살됐어. 이런 일은 공립이 아닌 사립이라 가능한 건데 문제는 학부모 위원들도 대부분 찬성한다는 거야.”
 
“선생님, 제 성적이 특수반으로 떨어질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학업성적 부진도 보지만 올해부턴 학습환경 개선이란 이름으로 학습태도 불량을 더 문제 삼는 거야. 학습태도는 담임하고 학년주임 의견이 반영되는데 나는 우리 반에는 그런 학생 없다고 했다. 건데 주임선생이 네가 백지 답안 제출한 것과 수업태도 불량을 거론하며 처음부터 양보할 생각을 않더라. 인호야, 특수반에 가더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한다면 다음 학기에 일반반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학년주임은 다름 아닌 물리선생이었다. 인호는 “이제부터 네 놈은 열외다”라고 싸늘히 내뱉던 물리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말을 너는 없는 셈 칠 테니 수업시간에 소설책을 읽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해석한 게 오산이었다. 담임선생은 학부모의 학교장 면담 신청이란 것도 생각해보아란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호는 허탈에 잠겼다. 반에는 그보다 낮은 성적에다 수업태도 또한 형편없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명은 아버지가 시청의 고위직이었고, 또 한 명은 타 학교에서 사고치고 전학 온 학생이었다. 그는 일찍이 공부를 포기했고 걸핏하면 주변 급우들에게 시비나 거는 불량학생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예체능 특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일반반에 계속 남아 있는 친구도 있었다. 바이올린 특기생인데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가 레슨을 받고 왔다. 그 역시 인호보다 낮은 성적이었지만 음악 경연대회 수상 등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 공로가 인정되었다. 인호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교지 게재 탈락에 이어 연달아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상담실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담임선생이 학부모의 학교장 면담 신청을 언급할 땐 그의 특수반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학교 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학부모가 기부를 하면 야간반 학생이 주간으로 편입되는 경우를 인호도 보아왔다. 그러나 인호는 부모님껜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덕희는 준호의 학교엔 학부모회 활동으로 자주 가는 모양이었지만 인호의 학교엔 그리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인호의 가슴속에서 불붙는 듯 공부에 대한 열망이 치솟아 올랐다. 왜 진작 이런 마음을 가지지 못했을까 의아심이 들 정도로 강렬한 열망이었다. 인호는 다음 학기엔 반드시 특수반을 벗어나리라 맹세했다. 특수반 배정 사실은 집에 오니 덕희도 알고 있었다. 비상 연락망을 보고 담임이 덕희에게 전화하여 학교장과의 면담을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덕희는 그를 앉혀놓고 따졌다.
 
“너 엄마한테 말 안할 작정이었어?”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공부 열심히 해서 달라진 모습 보여드릴 테니 날 믿으세요.”
“엄마가 내일 학교 가서 교장 선생님 만나봐야겠다.”
“가지 마세요. 내가 특수반에 떨어진 거 우리 반이 다 아는데. 엄마가 가서 상황이 바뀐다 해도 그거 정말 원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 아들이 어느 정돈지 내가 한번 가봐야 되겠다.”
“엄마, 부탁인데 제발 가지 마세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지도 말고요. 공부, 제가 알아서 열심히 할게요.”
 
인호는 말을 맺으며 덕희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던졌다.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해 덕희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세상 돌아가는 건 손바닥 위에 놓고 봐도 정작 자식 속은 들여다보질 못하니......”
 
덕희는 푸념을 하면서도 인호의 진지한 표정과 비장한 말투에서 다 큰 남아의 패기 같은 게 전해졌다. 인호는 한 번 더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특수반에 가면 독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고 보세요.”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덕희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집안이 어려울 때 가족과 떨어져 지낸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구 생활을 하는 내내 환하게 피어 있던 얼굴은 요즘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성당에 나가는 걸 반대한 자신의 고집이 인호의 안정을 흐트러뜨린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내심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성당에 가도 된다고 허락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올 겨울방학기간 중엔 학원도 열심히 다니며 공부에 의욕을 보인 것도 같고, 특수반 배정을 계기로 각오도 단단해진 것이라면 덕희는 인호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급선무는 성실한 가정교사를 구해주는 것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학교는 며칠간 봄방학에 들어갔다. 인호는 대구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세실리아와 통화할 수 있길 기대했다. 지난번 대구와의 통화에서 세실리아가 삼년 개근상을 받고 졸업한다는 소식과 루시아가 은행 시험에 합격하여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인호는 세실리아와의 통화를 원했으나 경숙은 요금 많이 나온다며 그간의 안부만 나누고 끊자고 했다. 시외전화라 요금도 요금이었지만 ‘용건만 간단히’가 전화예절로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경숙은 인호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음엔 꼭 세실리아를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요한아, 잘 있제, 공부도 잘하고?”
“이모도 별 일 없지? 안나 아줌마도 잘 계시고?”
“그래, 좀 기다리래이. 세실이 바까주꾸마.”
수화기 너머 그녀가 세실리아를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달려오느라 가쁜 숨소리가 섞인 세실리아의 반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빠아.”
“그래, 잘 있었나?”
“응, 오빠도?”
“나도 잘 있다. 졸업 축하한데이. 꽃다발 들고 가야 했는데.......”
“괜찮아. 나도 오빠 졸업식 못 갔는데, 뭘.”
“그래도 졸업 선물은 보낸다. 소포로 부칠게.”
“고마워, 건데 비싼 건 하지 마.”
“누나한테도 취직 축하한다고 전해줘.”
“그래. 오빠도 잘 지내고, 공부 열심히 해. 이제 끊자.”
“아니, 이야기 좀 더 안하고? 아직 일 분도 안 지났다.”
“요금 많이 나오잖아. 빨리 끊어. 할 이야기는 모아뒀다가 나중에 만나서 하자.”
“그럼 니가 먼저 끊어라.”
“그래. 그만 끊을게. 오빠, 안녀엉.”
“그래. 안녕.”
 
인호는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하고 입속말로 “사랑해”라고 읊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음엔 이 말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들려주리라 다짐했다. 이학년이 되면 열심히 공부해 한 학기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여름방학 때 떳떳하게 대구로 가기로 마음을 다잡으니 의욕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인호는 세실리아의 졸업기념 선물로 만년필을 샀다. 세실리아가 인호의 중학 졸업선물인 손수건 속에 넣어주었던 오백 원을 보탰다. 인호는 곧장 우체국으로 갔다. 만년필을 소포로 부치고 나오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나는 듯했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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