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특집 부산의 꽃부리, 동래】 문학전통 : 동래기생의 춤바람, 아름다운 치맛바람 - 송희복

장소시학 승인 2023.12.07 17:24 | 최종 수정 2023.12.12 12:20 의견 0

 

문학전통

동래기생의 춤바람, 아름다운 치맛바람

 

송 희 복

 

1. 신명나는 춤의 고장

경상도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감정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감정에는 솔직하다. 사람은 누구나 화가 나면 화를 낸다. 하지만 그들은 정도가 심하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때와 장소에 따라 잘 누그러뜨리는 것도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취약하다. 그들조차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아주 통속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멋대가리가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에, 밥맛 떨어지는 것 같은 반응에, 때로 무뚝뚝한 말투와 태도 때문이리라. 세상의 이치는 있으면 없게 마련이고, 없으면 있게 마련이다. 소위 멋대가리가 없으면, 무언가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를테면 멋몸이다. 경상도 사람들에게 엿보이는 멋의 몸은 춤과 씨름으로 대표된다.

영남의 춤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신라 때의 황창무와 처용무에서부터, 영정조 시대에 전국적인 명성을 떨친 밀양기생 운심을 거쳐, 대구에 궁중무용과 승무를 전승하게 한 소산 정유색에 이르기까지, 경상도는 예로부터 전통춤의 고장이었다. 특히 부산·대구·진주·통영·밀양·하회 등지가 유명했다.

이 중에서 부산의 경우는 동래로 범위가 확 좁혀진다. 내가 알기로는, 동래라고 하는 지명이 포함된 춤 이름만 해도 여섯 가지에 이른다. 예컨대, 동래야류(탈춤), 동래고무(북춤), 동래학춤, 동래덧배기춤, 동래입춤, 동래한량춤이 그것이다. 동래야류와 동래고무와 동래학춤은 유명한 춤이며, 나머지 셋은 덜 유명한 춤이다. 동래야류는 국가 단위의 중요무형문화재(18)로 지정되어 있다. 동래학춤은 동래가 저습지와 소택沼澤이 많아 학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1)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춤은 지금에 이르러 외국인에게도 관심을 받고 있다.2) 앞으로는 더 긍정적으로 재평가될 것이라고 전망된다.

이상으로 열거한 동래의 여섯 가지 춤에서 동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지방색이 강한 향토 춤이라고 추론되는 것은 동래덧배기춤이다. 이것은 동래학춤과 동래한량춤의 원형으로 보인다. 북쪽으로 갈수록 춤은 천신을 향해 뛰어오르려고 하는 도무跳舞의 성격이, 반대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춤은 지신의 터전을 밟는 답무踏舞의 성격이 뚜렷하다. 동래의 춤들은 대체로 동래지신밟기라는 종합 연희가 있듯이 상승의 이미지보다 하강의 이미지가 강하다. 덧배기란, 일종의 벽사辟邪(사악함을 물리침)의 의미를 지닌다. 땅을 내리 딛으면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한다. 그만큼 주술적이기도 하다. 동래학춤의 활갯짓사위는 상승의 이미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늘로 비상하는 면 못지않게 땅으로 활강하는 면이 있다.(이런 점에서 잘 알려진 검무도 도무와 답무의 양면성을 가진다.) 동래학춤은 부산과 경남의 전형적인 덧배기춤이다. 동래한량춤은 교방 춤의 영향을 받은 민속춤이다. 이 춤을 추는 남성 춤꾼은 솟구치려는 욕망보다는 사뿐히 밟아서 사악한 기운을 지신이 계신 땅 아래로 누르려고 하는 의도를 보인다.

동래의 춤, 범위를 더 넓히자면 부산의 춤은 부산의 문화적 환경과 부산사람들의 기질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관해서라면, 다음의 인용문이 적절하게 활용될 듯싶다. 부산예고와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한 무용수의, 여간내기의 글 솜씨가 아닌 글이다. 부산이 고향인 나에게도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경상도에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추는 허튼춤을 덧배기춤이라고 하는데, 덧배기에서 가장 특징적인 춤사위가 배김새이다. 너울너울 날아오르거나 호흡을 서서히 올리다가 콱 내려 박는 동작을 뜻하는데, 한쪽 다리를 굽히고 다른 다리를 길게 펴서 배기기도 하고,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배기기도 한다. 그랬다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주의자의 관대한 디딤새를 이어가면서 쥐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것이 덧배기춤의 멋이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부산도 이런 느낌으로 기억된다. 유려하게 팔을 쫙 펼치고 천천히 멋 부리며 걷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정색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또 헤헤 웃기도 하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뒤끝 없는 사람들, 나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을 텐데 복잡하고 정신없는 서울에 너무 오래 살았나, 나에게 배김새 같은 감수성이 언제 있었는지 가물거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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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술의 맥 : 부산의 무형문화재, 부산은행, 2007, 140쪽, 참고.
2)세계적인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최근 명작인, 압구정동의 건물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동래학춤의 곡선미를 창작의 영감으로 삼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허유미, 춤추는 세계, 브릭스, 2019, 89쪽.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배김새는 동래 지방의 탈놀음에서, 몸을 어느 한쪽으로 힘차게 던져 디디고 감정을 맺은 뒤 천천히 푸는 것을 말한다. 배김새의 감수성이란 표현이 사뭇 의미가 있고, 말맛 역시 은근히 남는다. 긴장과 해이, 빛과 그늘, 밀물과 썰물, 날숨과 들숨, 볼트와 너트, 맺힘과 풀이, 맺음과 풂 등이 되풀이되는 변화의 여지, 혹은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동래라는 지명이 포함된 춤 중에서 다소 배김새의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있다면, 기생과 관련된 춤인 동래고무와 동래입춤이다. 비록 그것이 부족해도, 풍류와 격조는 한결 더해 보인다. 동래고무는 일종의 북춤이다. 고려시대의 궁중무용인 무고舞鼓에서 비롯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무고의 기원은 고구려의 신맞이 굿인 영고迎鼓라고 본다. 고려의 고관인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지금의 경북 영해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고무鼓舞를 정착시켰다. 말하자면, 향악정재鄕樂呈才 4)가 지방적 토착화를 시도한 첫 사례랄까? 하지만 영해 지방의 고무는 사라졌다. 요컨대 영해에서 동래로 전해진 고무가 바로 동래고무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통영으로 전해져 승전무로 변형한다. 고무의 전통은 동남해안으로 계승된 향토 춤의 계보라고 볼 수 있다. 동래고무는 춤의 규범이 엄격하고 품위를 중요시하며, 우아하고 화려하며 섬세한 발 디딤이 특징5)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양팔을 위로 동시에 뿌려 모으는 북춤사위도 볼 만하다.6) 동래입춤은 동래교방의 정장한 기생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추는 춤을 말한다. 일반인들도 유튜브를 통해 이 두 가지 동래의 본래 교방 춤을 감상할 수 있다. 동래기생들의 우아한 춤바람은 오늘날에 전통 문화재로 전승되고 있다. 이 전승의 가치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아니겠나?

옛날 말 가운데 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기생 치마폭엔 묻히고 만다.”7)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잘 알려진 말은 아니다. 이 말의 유래나 근거나 해석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이 말이 동래기생의 춤 문화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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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시대의 궁중에서 잔치를 할 때 우리 고유의 음악을 반주로 삼아 연행하는 북춤인 궁중무용을 가리킨다.
5)예술의 맥 : 부산의 무형문화재, 앞의 책, 258쪽.
6)동래고무는 무용가이며 무용학자인 김온경이 동래기생 출신의 김해월과 석국향(석음전), 지역의 남성 춤꾼인 김동민과 문장원의 고증을 얻어서 1986년에 복원했다. 동래구지 편찬위원회 엮음, 동래구지(1-4), 부산광역시 동래구, 1995, 693,
7)진옥섭, 노름마치 ․ 1, 생각의 나무, 2007, 75쪽.

 

2. 동래교방과 역사의 잔영

전국 지방의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사회는 기생이나 교방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봉쇄했다. 어느 지방에서라도 지방 읍지에조차 기생이나 교방에 관한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접대 문화의 어둡고 습한 면을 감추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성리학을 추앙하고 전통 예술을 비하하기 위해서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돈 문제에 관해서라면 뭔가 켕기는 것도 있어선지 모를 일이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할 무렵에 평양기생을 조선의 3대 적폐로 꼽지 않았나? 이 사실을 유추해볼 때,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부정한 일을 저지를 때 현 퇴직 기녀들이 은밀히 동원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19세기 말에 진주목사 정현석이 지방의 공식적인 도서 교방가요를 펴낸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이야말로 조선조 기생의 역사에 관한 복원에 매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 예술의 이론적 지침서로 지금도 잘 활용되고 있다.

동래교방은 언제부터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꽤 오래 전부터 존속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17, 8세기의 교방 본관은 여덟 칸이고 행랑은 세 칸이었다. 현종 때 임자년(1672)에 부사 이하가 창건했고, 그 다음 주한 기생들은 적지 않은 규모였다. 기생이 36, 동기(수습생) 32명이었고, 일하는 비녀婢女들이 3 40명에 이르렀다.8) 모두 관아에 소속된 기능직 공무원들이었다. 동래기생은 일본 사신들의 접대를 위한 외교적 목적에 따라 양성된 관기였다.9) 이 경우는 중국 사신들의 접대를 위한 외교적 목적에 의해 양성된 의주기생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송도기생 황진이는 시조로, 진주기생 논개는 순국으로, 제주기생 만덕은 선행으로, 밀양기생 운심은 검무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수백 년의 수많은 동래기생은 명기는커녕 평범한 이름조차 문헌의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오진호의 논문 조선후기 동래부의 악공, 기생의 공연 활동 연구(2010)는 전통의 동래기생에 관한, 거의 유일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19세기 말 이전의 동래 전통 기녀의 습속이나 문화에 관한 흔적은 극히 미미하다. 동래지역의 읍지 유인 동래부지동래부사례 등과 같은 고문헌에 단편적으로나마 악공이나 기생의 수에 대한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의 관변 기록화인 동래부산접왜사도에 취고수와 세악수의 연주하는 모습 및 기생이 춤추는 모습이 하나의 시각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또한 증정교린지에 왜의 사신을 접대할 때 연향의 종류와 연향의宴享儀의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왜국의 외교 사절로 인해 1년에 35차례 이상의 공식적인 연향의와 동래부사 행렬의 행진음악 연주로 말미암아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비번하게 공연 활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때 동래야류나 수영야류 등의 지역의 민속 연행 및 무속의식의 반주도 곁들여 관아의 행사와 민간의 연행이 초청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동래 관기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동래구지(1995)는 국배판(A4)형에 1590쪽의 방대한 책인데, 동래교방의 관기에 관한 기록은 단 여섯 줄에 지나지 않는다. 교방의 위치는 학소대 아래의 도화동에 있었다는 것. 조선 말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고관과 동래부사의 정치적인 담론에 끼어들어 대화를 유연하게 이끌어다는 것.10) 이 얘기가 어디에서 근거해 나온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척 흥미로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동래교방의 관기가 요즘 말로 정치 토크쇼의 사회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동래 관기에 관해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본 결과는 단 하나뿐이었다. 영남사림파의 일원으로서 결국에 사화를 당한 이종준李宗準 (1458-1499)에 관한 기사이다. 그는 고향이 안동이며, 김종직의 제자다. 대과(문과)의 금방金榜(합격자 명단)에 장원급제 다음의 2등으로 이름을 올린 재사였다. 그가 일본으로 공무를 수행하기 전에 동래 객사에 머물렀을 때 동래기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이루지 못한 비운의 러브스토리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유저 추강집 7권 잡저雜著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이, 원문을 인용해 본다.

 

李宗準(……)性風流倜儻少有時譽乙巳試登科第二名丁未秋差日本護送官至東萊縣有妓年可十 二三李鍾愛改名曰榜眼兒待汝未嫁再受使命定作因緣也謂其合琴徽曰改名此其志也是年冬受平安 評事之命南北悠悠重來無由也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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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동래구지편찬위원회 엮음, 동래부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1995, 참고.
9)왜국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을 두고 연향대청(宴饗大廳)이라고 한다. 진주기생의 연행 무대가 촉석루였듯이, 연향대청의 넓은 마루도 일종의 무대다. 무대와 자리(座)의 경계가 없는 일종의 열린 연희공간이다. 동래기생은 왜국 사신을 위해 동래고무를 연행했을 것이다. 이 접대 공간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항에서 가까운 동 이름 대청동은 남아 있다. 지금은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동네이다.
10)동래구지 편찬위원회 엮음, 동래구지(제1편-제4편), 앞의 책, 605쪽, 참고.
11)한국고전종합DB, 재인용.

 

이종준은 성정에 풍류가 있었고, 기개는 빼어나 젊은 시절에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성종 때인 을사년(1485)의 과거시험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정미년(1487) 가을에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수행원(호송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던 동래현의 객사에서 당분간 머물러 있었다. 이때 나이 열두어 살 정도의 기생을 만났다. 그는 이 어린 기생을 몹시 사랑했다.(소위 로리타 콤플렉스 취향은 아니다. 이 개념은 현대 산업화 사회의 개념이다.) 그는 이 기생에게 자신의 별명을 방안아榜眼兒라고 일러주었다. 금방에 장원 다음의 2등으로 이름이 올린 젊은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린 동래기생에게는 별명을 금휘琴徽라고 지어주었다. 거문고 금 자에, 아름다울 휘 자다. 이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거문고의 줄을 고르는 자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거문고의 앞쪽에 둥근 모양으로 박은 크고 작은 열세 개의 자개 조각임을 가리킨다. 특히 금으로 박은 것을 금휘金徽라고 이른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거문고 금 자의 금이 반드시 거문고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현악기를 총칭한다. 거문고뿐만 아니라, 해금이나 가야금도 해당된다. 옛날에는 현악기를 총칭해 이른바 줄풍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종준이 사랑한 동래기생 금휘줄풍류(현악기)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류 명인이라는 뜻으로 새길 만하다. 하루는 그가 금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방안아는 네가 시집가기 전에 다시 사명使命을 받아서 꼭 인연을 맺을 것이다.”

여기에서 시집을 간다는 개념은 어린 네가 남자를 알기 전이라는 뜻일 게다. 그 역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래 동래현감으로 발령을 받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그는 서울에서 평안도 평사評事의 명을 받아 떠났다. 평안도와 동래는 남북의 거리가 아득하여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까닭이 없었다.

먼 훗날에, 이종준은 정치적으로도 불우했다.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그가 함경도 땅으로 유배를 갔는데, 한 역원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자신의 심경을 나타낸 중국의 한시 한 편을 메모로 남겼다가, 함경도 관찰사의 고자질로 임금에 대한 불경죄를 물어서 국문을 당하던 중에 죽임을 당했다. 사실상 그때의 임금인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이래저래 비극적으로 살다간 인물이다. 젊어서 이루지 못한 사랑, 또한 중년의 억울한 죽음이 그의 삶을 대변해준다.

나는 방안榜眼의 재사 이종준과 동래기생 금휘의 사랑을 부산의 스토리텔링, 문화콘텐츠로 제안하는 바이다. 온 세상 바다를 떠돌아다닌 중국의 목각 오리 이야기가 세계적인 스토리텔링, 문화콘텐츠가 되었듯이 말이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의 옷에 옷을 덧입히는 것. , 본래의 이야기에다 다른 얘깃거리를 덧붙여 포장하는 것이다. 이종준과 금휘의 이야기에다 허구 하나를 덧붙이면, 온전한 스토리텔링이 된다.

실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컨대, 이종준은 의성현감 시절에 가노家奴를 통해 금휘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는 일종의 격조 높은 연애편지다. 금휘는 이종준이 연산군의 역적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교방에서 극한의 슬픔이 담긴 음곡을 줄풍류로 연주한 다음 날에, 동헌 뒷산의 소나무 가지에 비단으로 목을 매단 채 죽음을 택한다. 본래의 콘텐츠에다 이처럼 문화의 덧옷을 입히면, 이른바 문화콘텐츠로 거듭나게 마련이다. 이런 개방적인 담론 구성이 필요하다. 문화라는 게 좀 삭막해 보이는 내 고향 부산에서는.

나는 앞 장에서 동래의 지명을 포함한 춤 종류 여섯 가지를 소개한 바 있었다. 춤의 고장 동래에는 춤과 춤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고 본다. 춤마다 자립한 것이 아니었다. 춤과 춤은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춤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 저런 부류의 사람이 끼어들었다. 예컨대 동래학춤만 해도 선비(), 한량(), 아전()이 함께 향유한 춤이었다. 이와 유사한 동래한량춤는 교방 춤의 영향을 받은 민속춤, “협소한 장소에서도 정중동으로 멋을 부려 출 수 있는 아름다운 춤12)이란 점에서 일제강점기의 기방에 특별히 초청되어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래의 춤 중에서 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인 동래야류가 한말韓末에 고을 축제의 대동大同 연예종목이었다. 고을 축제에서는 읍성에서 온천으로 가는 오리길 가장행렬이 있었다. 이때의 모습이 동래에선 오래 구전되어 왔다.

 

(정월 대보름날 낮에) 행렬의 군데군데에 큼지막하게 만든 일산등, 무지개등, 용등, 봉등, 학등, 거북등, 포도등, 가마등이 배치되며, 갑옷차림의 말을 탄 중군이 호위를 하고, 말 위에 오른 팔선녀(기생)가 연화등을 들고 노래 부르며 간다. 이때 기생들의 말고삐는 한량들이 잡아준다. 그 뒤로 수양반 차양반 등의 오광대가 분장한 채 따르고, 가마를 탄 할미, 우마차를 탄 또 다른 기생과 한량들이 장구를 치며 난봉가와 양산도를 부르며 따른다. 인근 마을의 농악대도 합류하여 신나게 풍악을 친다. 아마 이렇게도 화려한 길놀이패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놀이마당에 장작불은 타오르고 밤이 되어 놀이패가 놀이마당에 당도하면 놀이마당 가운데에 세워둔 큰 장대에서 줄을 내려 길놀이꾼들이 들고 온 청사초롱과 모형등을 매달아 공중으로 올린다. 이것은 놀이마당을 밝혀주는 조명등이 되는 동시에 놀이장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야류가 공연되려면 한밤중이 되어야 하므로 그 동안에 관중들이 나와서 신명나는 덧배기춤으로 군무를 추기도 하고, 각자 장기가 있으면 스스로 나와서 노래나 만담을 하기도 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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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예술의 맥 : 부산의 무형문화재, 앞의 책, 308.
13)이 인용문은 문화재청 누리집에 소개된 내용에서 따왔다.

 

김해부는 입춘이 되는 날에 춘경제春耕祭를 벌인다. 19세기 초의 유배객 이학규의 증언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부민들은 향리의 주관 아래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땅을 가는 시늉을 한다.14) 동래의 정월 대보름날 행사도 일종의 춘경제였을 것이다. 모두가 새해를 맞이해 벽사진경을 위한 제사 및 축제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 동래야류를 위한 길놀이는 지신을 밟는 행위로서 향리층, 관속, 한량, 기생, 백성들이 모두 참여한 일종의 성대한 향촌 대동제였다. 나는 수 년 전에 국문학과 민속학을 넘나드는 원로 학자인 정상박과 윤광봉과 서울 잠실 모처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일이 있었다. 문학과 민속에 관한 얘기들이 많이 오갔다. 인품이 인상적인 정상박은 그때 동래야류를 위한 길놀이가 가진 전승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동래 부민들은 정월 대보름날에 모닥불이 재가 되어 꺼지는 새벽녘까지 동래야류에 동참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동래학춤은 남성 춤꾼()만의 몫이 아니었다. 악사도 있고, 구음 소리꾼도 있어야 한다. 동래의 마지막 예기 유금선이 동래학춤의 구음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동래의 춤 문화에 기생문화가 가세되었음을 말해주는 증좌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녀의 구음을 두고, 누군가는 이런 감상을 적절하게 달았다.

 

동래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멋지게 추는 동래학춤은 유금선 선생의 구음으로 인해 더욱 그 춤태가 고와 보인다. 김소희 선생과 박병천 선생의 구음이 유장하고 장려하다면 유 선생의 구음은 청아하고 맑기가 수장 같아 그 소리가 옥을 구르는 듯하다. 듣는 사람이 학춤 따라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착각마저 느끼게 한다.15)

요컨대 선비와 한량의 흉내무용, 기생들의 실내무용, 민중이 탈을 쓴 마당춤, 풍물패의 잡색놀음 등이 어우러진 동래의 연행 문화에는 융합과 통섭의 비전이 깃들어져 있고, 탈경계성의 의의가 온축되어 있다. 또한 이제는 역사 속의 잔영으로 남아 있는 동래의 기생문화 역시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새 시대에 맞는 참뜻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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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박진태,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 새문사, 1991, 307쪽.
15)주경업, 부산의 꾼․쟁이를 찾아서, 부산민학회, 2007, 122쪽.

 

3. 동래권번의 근대적 성업

조선 왕조의 국권을 상실한 해인 1910년에는 오랜 전통의 관기 제도도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관속의 교방도 더 이상 존재할 이후가 없었다. 문제는 그동안 축적해온 가무악의 전통은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가이었다. 1910년대에 지방 각처에는 기생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동래의 기업妓業도 읍성으로부터 나와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1910년에 처음으로 생겨난 이 조합의 명칭은 동래기생조합이었고, 초대 조합장은 동래권번의 행수기생이었던 가야금 명인 이운초李雲初라고 한다.16) 1912년에는 동래예기藝妓조합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 두 조합의 명칭은 동래권번의 먼젓번 이름이 되는 셈이다. 동래권번이란 이름은 1920년부터 새롭게 사용된다.17)

기생의 업도 이제부터 투자와 자본의 논리에 따른 자유업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수령에 대한 전통적인 수청은 사라졌지만, 돈 많은 상류층 인사에게 정절을 바쳐야, 즉 화초머리를 얹어야 비로소 요정에 나아가 손님을 접대할 수가 있었다. 이 인사를 속칭 기생의 기둥서방이라고 한다. 기생과 기둥서방은 반드시 성의 계약관계를 맺는 것은 아닐 터이다. 순수한 예술적인 후원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동래기생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918년에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이다. 여기에 동래예기조합의 기생 13명이 등재되어 있다. 그 당시에,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모두 가무가 특기라고 적혀 있는데, 이 중에서 김계월金桂月은 가무뿐이 아니라 서화書畵도 특기라고 적혀 있다.18) 이 사실을 두고 볼 때, 동래권번은 가무 중심의 권번이라고 할 수 있다.

권번의 의미는 양면적이고 다면적이다. 이영태 지음의 권번(2015)에는 권번은 기생의 교육기관이자 활동조합이었다. 권번은 기생들에게 교육, 관변, 사회참여, 공연 예술, 접대부 소개 등의 역할을 했다.”19)라고 적혀 있다. 권번의 다면성을 설명한 뒤 문장은 무슨 뜻인지는 통하지만 문제가 있다. 관변이란 낱말의 쓰임새도 자연스럽지 못하고,20) 기생들에게 접대부를 소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권번의 정의를 다른 데서 찾아보면, 다음의 문장이 비교적 논리의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권번은 동기들이 성장하고 전통 예능을 배우는 하나의 학교였으며, 예기로서 화대를 받으며 윤택한 삶을 살아가다 거기서 일생을 마치게 되는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이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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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동래관광호텔 기획실 엮음, 『동래온천소지』, ㈜동래관광호텔, 1991, 129쪽.
17)권번(券番)은 에도 시대에 생긴 말로서 게이샤 사회의 일본식 명칭이다. 권번은 문서화된 접대 순서를 가리키는 듯하다. 번은 당번이란 말이 있듯이 접대하는 여인이 손님의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시중에는 차 시중, 술시중, 가무(歌舞) 시중, 연주 시중 등이 있다. 번은 우리말로 ‘갈마듦(교체)’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18)이주희․추정금, 「동래권번에 관한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24집, 한국무용예술학회, 2008, 166쪽.
19)이영태, 『권번 : 기예는 간데없고 욕정의 흔적만이』, 한겨레출판, 2015, 6쪽.
20)여기에서 관변은 관변 활동을 가리킨다. 관에서 주도하는 각종 공식 행사에 기생들을 동원해 대중의 호기심을 끄는 행위를 말한다. 위의 책, 39쪽.
21)이주희 ․ 추정금, 앞의 책, 161쪽.

 

권번은 요컨대 학교이면서, 대기소이다. 권번마다 성격이 다른 면이 있다. 기성권번(평양)과 진주권번은 학교의 인상이 뚜렷하고, 동래권번과 용동권번(인천)은 대기소의 이미지가 강하다. 1910, 동래기생조합이 설립될 때, 조합의 건물은 명륜동에 있었다. 이것은 10년 후에 권번의 건물로 사용되었고,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22)에 권번 자체가 온천동으로 옮겨진다. 이른바 온천장은 온천과 여관과 요정이 모여 있는 관광지였다. 권번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오리 길을 왕래하는 것도 불편했고, 업자들이 그들을 신속하게 하지 못하는 것도 불편했다. 서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권번이 명륜동에서 온천동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마지막 동래의 권번기생이라고 일컫는 유금선 역시 온천동 권번에서 기예를 학습했다.

명륜동 동래권번은 기생조합의 시대에서부터 30년을 운영했다. 온천동 동래권번은 이로부터 20년 정도 존속하다가 동래국악원으로 개칭되었다. 근대적 성업의 전성기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고해 볼 때, 온천동 권번의 시대가 아닌가 짐작된다. 1940년 이후의 온천장의 번화로움과 동래권번의 성업을 짐작하게 하는 동래구지의 대목을 다음과 인용해본다.

 

온천장의 중심지에는 숙박업소 15개소, 별장지역 4개소, 권번 1개소, 기생합숙소 4개소, 관공서 2개소, 요식업소 4개소, 공중목욕탕 2개소, 주택 등이 입지하고 있었다. 일본인 소유의 숙박업소에는 온천 원탕이 있었고 원탕을 갖지 못했던 한국인 소유의 여관은 운영상의 애로가 많았다. 온천 취락의 특이한 시설은 기생예기조합이라 부르는 권번(券番)이다. 권번은 조선조의 관기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부채춤, 가야금, 장고, 판소리, 예법 등을 익힌 수준 높은 기생들이었다. 1940년대 초에는 9개의 숙박업소가 개업하였고 병원, 약국, 주류 판매점, 미장원 등이 입지하였다. (줄임)1950년대 중반기에 권번의 소속 기생은 120명에 도달하였으며 숙박, 욕객의 수도 급증하였다. 온천장의 지명도가 점점 높아지자 온천장은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고23)

 

동래권번은 지역에서 경쟁관계에 놓인 권번들이 있었다. 하나는 오키야(置沃) 권번이며, 다른 하나는 봉래권번이었다.

본디 동래온천의 개발은 일본의 몫이었다. 구한말의 궁내부에서 개발권을 따냈기 때문이다. 일본 게이샤들의 본거지인 온천장의 오키야 권번은 구한말에서부터 번성했다. 일본인 중에서는 우리의 전통 기예, 즉 이국취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에, 동래기생조합이 애초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키야 권번은 기모노 차림의 게이샤, 왜식 현악기인 샤미센, 민요 고우다, 민속춤 봉오도리(盆踊) 등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지닌다.

동래권번이 명륜동과 온천동 일대에서 형성되었다면, 봉래권번은 초량동과 영주동 일대에서 형성되었다. 봉래권번은 1915년에 권번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점에 있어선 부산 지역에서의 최초의 권번이라고 할 수 있다. 봉래권번은 처음에 초량동에 세웠다가 신작로가 생기는 바람에 영주동으로 옮겨졌다. 봉래권번의 역사를 개관한 유일한 자료는 박원표의 부산의 고금(1965)에 실린, 6쪽 분량의 원고 기생 권번이다. 부산의 객주업 유지들이 출자해 창업한 것이 봉래권번이다. 초대 조합장은 구한말의 군관항수(오늘의 경찰서정에 해당하는)를 역임한 조 아무개였다. 이 이후에는 어대성과 임월선이 조합장에 차례로 피선되어 권번을 운영했다.24) 내가 알기로, 어대성魚大成은 자신의 이름대로 수산업자로 크게 성공을 거둔 부산지역의 인물이다. 임월선은 기생 출신의 인물이다. 한낱 기생으로서, 권번의 조합장이 되었으니, 퇴기로선 가장 성공한 경우라고 할 만하다.

1940년에는 봉래권번에서 초량권번이 딸려 나왔다. 새로 생긴 이 권번에는 고운 말씨에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기생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일본어에 능숙한 이도 있었다. 요컨대 봉래권번과 초량권번은 일제의 국책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25)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는 권번에도 압력을 가했다. 봉래권번의 기생들은 남포동에 가서 일본 가무를 배우고, 소위 사쿠라 여자청년단을 조직해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이에 비해 동래권번은 일제의 압력에 대해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다. 동래권번이 끝까지 지킨 국악과 우리 춤은 민족정기를 유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통속적인 구분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과거에 기생의 등급을 상중하로 3등분해, 1패 기생, 2패 기생, 3패 기생으로 나누기도 했다. 1패 기생이란, 기예기생, 즉 가무악에 재능을 가진 기생이다. 2패 기생은 화초기생, 즉 재능보다는 용모가 빼어난 기생을 말한다. 그럼, 3패 기생은? 매춘기생, 즉 몸을 파는 기생이다. 이 기생은 기생이란 이름도 붙여주지 않는다.

동래권번의 기생은 기예기생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는 동래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초량권번의 기생이 일본어를 잘 하고, 말씨가 곱고, 미모를 갖추었으며, 전통 기예보다는 유행가를 잘 불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화초기생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동래권번의 기생이 1패라면, 초량권번의 기생은 2패다. 봉래권번의 기생은 이 가운데에 놓인다. 굳이 말하자면, 1 5패 기생이라고 할까? 3패 기생은 사실은 기생이 아니라 매춘부다.

매춘 행위는 은근히 몰래 하는 경우와, 공공연히 대놓고 하는 경우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동래권번은 매춘을 엄금하지만 여기에 소속된 극소수의 기생 중에도 빚에 쪼들려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라고 몰래 매춘을 한 사례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은근히 매춘하는 기생을 가리켜 은어로 은근짜라고 한다. 공공연히 대놓고 하는 매춘을 두고 공창公娼이라고 한다. 직업 매춘부가 관의 허가를 받고 자행하는 매춘을 말한다. 일제 때의 부산 지역에는 미도리마치(속칭 : 완월동)’마키시노마가 유명했다. 해방과 함께 공창이 폐지되면서 이곳은 유명한 사창가가 되어 오래 유지했다.

한국전쟁의 시기에 이르면, 전국의 기업妓業은 급격히 사양화된다. 난세에는 예술이고 문화고 알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황폐화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동래권번은 예외였다. 오히려 1950년대 말에까지 번성했다. 부산 지역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임시수도였고, 전후에는 온천장이 전국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전국의 기생문화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것이 동래권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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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어떤 자료에는 193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23)동래구지 편찬위원회 엮음, 『동래구지』(제5편-제11편), 부산광역시 동래구, 1995, 1436-1437쪽.
24)박원표, 『부산의 고금』, 현대출판사, 1965, 57-59쪽.같은 책, 61쪽, 참고.
25)같은 책, 61, 참고.

 

4. 권번기생의 수련과 놀음

동래의 권번기생들이 기예를 어떻게 학습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 없다. 진주권번의 경우는 기생은 아니지만 권번의 학습자로 공부한 김수악이 남긴 구술 자료가 남아 있어 진주권번의 학습활동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동래권번의 경우는 이주희 추정금 공동연구자가 동래권번 출신의 기생으로서 공연 현장인 기방에 드나들었던 유선화(유금선)와 춤꾼 문장원의 증언을 토대로 논문을 구성한 바 있어 동래권번의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래된 옛날의 일이기 때문에 기억에도 한계가 있다.

동래권번에서는 소리가 기본이었다.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판소리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경상도는 판소리의 큰 시장이었다. 조선 말기의 송흥록이 경상도에 진출한 이래 외지의 판소리 명인들이 부산과 대구 등지의 경상도로 진출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동백(1866-1949)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진주에서 3년간 소리를 공부한 후에, 30대 중반부터 9년간 창원읍내에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를 취입한 영남 출신의 기생 소리꾼이 적지 않았다. 에를 들자면, 이화중선, 배설향, 박록주, 오비취, 권금주 등이 대표적이다. 판소리계에서는 과거 한때에, 소리를 전라도에서 배워 경상도에서 깪인다하는 말이 나돌았다. 내가 짐작하건대 이 깪인다라고 하는 표현은 깨우쳐 완성도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서면 부전천을 처음으로 복개할 때 첫 번째 복개 구간이 완공된 후에 공터에는 공연과 약 판매를 위한 가설극장이 세워졌다. 내 기억으로는 몇 년간 지속한 것 같다. 레퍼토리는 판소리, 신파극, 막간 유행가, 만담 등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판소리였다. 열 살 정도의 나는 심봉사와 심청이 이별하는 대목의 판소리를 듣고 예술을 통한 비극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객석은 할아버지 석과 할머니 석으로 반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만좌滿座한 어르신들의 진지한 표정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은 판소리의 시장이었음에 틀림없었다고 본다.

동래권번의 수련 과정에서, 필수과목인 판소리 말고도 많이 불려진 것은 민요였다고 한다. 민요는 판소리를 기본으로 습득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으로,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양산도 등이 동래권번에서 주로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권번기생들이 판소리와 민요를 배운 다음에야, 무용이나 음률 등의 다른 기예를 배웠다.

 

아침 한 아홉시가 되면은 모두 공부하러 간다고. 선생님이 앉아 계시거든. 요새 같으면 판소리 공부해요. 그때는 육바탕 하는 별반 안했고 흥보전, 심청전, 춘향전, 안중근 역사가 육관순 역사가 배웠다. 제일 첫머리는 판소리 공부 하지. 판소리 공부부터 해가지고…… (그 다음은) 우리 민요라.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양산도……26)

 

동래의 마지막 예기로서 동래 기생문화의 대미를 장식한 유금선은 해방 이후에 동래기생 4인방 시대를 열었다. 김강남월과 원옥화와 김계월과 유금선은 여기저기에 겹치기 출연을 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유금선은 이처럼 판소리와 민요를 배웠지만, 정작 기방에서는 주로 권주가, 육자배기, 시조, 판소리단가, 토막소리 등을 불렀다고 한다. 청중의 요구라면, 유행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목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면, 유행가도 막힘이 없었단다. 그녀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소리기생이었다. 권번에서 기예를 배울 때 애최 가야금도 배웠는데 소리를 버린다는 조언에 따라 그만두기도 했다.27)

 

우리는 악기를 선생님 손잡고 배운 적은 없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다.28)

 

그녀가 판소리를 배울 때, 판소리 여섯 마당29) 외에 안중근 역사가와 육관순(유관순) 역사가를 배웠다고 했는데 시점이 잘 맞지 않는다. 해방 이후에, 판소리의 신흥 레퍼토리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권번에서 배운 것이라기보다 해방 직후에 해방의 감격과 함께 놀음의 현장에서 연행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동래권번의 기예는 가무악 순서로 중시했다. 소리 학습이 주를 이루었으며 음률(연주) 학습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예기들이 기예를 연행할 때 악사들을 따로 불러 연주하는 형태가 아니라 악사의 역할도 같이 겸했다.30) 동래권번의 음률사범인 강태홍의 영향으로 가야금 연주가 중시되었으리라고 본다. 음률 학습은 사범의 직접적인 실기 지도보다는 조교를 활용한 습득을 되풀이한 학습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방이 춤 중심의 가무악이라면, 권번은 소리 중심의 가무악이었다. 대체로, 교방의 춤은 고무와 검무와 승무 등이 중심이었다. 승무는 민간의 춤으로 뒤늦게 합류되었으리라고 본다. 동래교방 역시 가무악 중에서 춤이 가장 중요한 연예종목이었다. 진주교방의 연행을 기록한 정현석의 교방가요는 제목이 교방가요이지 실은 교방 춤에 관한 기록이다. 이 사실만 보더러도 교방은 역시 춤이다. 권번 시대에는 요정의 기방이 협소하기 때문에 춤보다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소리는 협소할수록 공명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교방의 동래고무는 애최 실내의 독무로 연행되다가, 세월이 지난 후에 야외의 군무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요정의 기방으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을 터. 기방에서는 동작이 작은 연예종목인 동래입춤이 연행되고, 동래한량무가 특별히 출연되었을 터.

협소하고 폐쇄적인 연희공간인 기방에서는 종래의 동작이 큰 춤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당이 굿판에서 추던 살풀이춤이 1910년대에 속무俗舞의 성격에서 벗어나 기생들의 기방 춤으로 새로운 격조를 부여했다고 보인다. 우리 전통춤의 특징인 정중동이 잘 표현된 데다, 이것의 네 가지 이상인 멋태를 고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기방 춤으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본다. 4박자의 느릿한 굿거리장단과 섬세한 동작의 수건놀음은 협소한 기방에서 적절했다. 이에 비해 동래의 기방에서는 이른바 강태홍제 산조 춤이 수용되었다. 동래권번이 온천동 시대로 전환되면서 이 춤이 새로 등장한 것 같다. 강태홍31)이 동래로 내려온 이후로 동래의 기방 춤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기방에서 주로 명인 명창들에 의해 가야금 독주와 가야금병창이 경남 지역 진주 및 동래 등의 권번에서 많이 이루어졌으며 가여금산조의 명인 강태홍은 1939년 동래권번의 예능사범으로 재직하였는데, 그때 자신의 가야금산조 가락에 춤을 얹어 형성시킨 강태홍제 산조 춤 이 그의 제자()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32)

 

기업妓業으로서의 공연 놀음은 요정이나 개인집에서 초청을 받아 기예를 연행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을 두고 소위 놀음이라고 한다. 기생이 요정에 불려나가서 공연하는 것을 놀음 나간다.’라고 하였고, 개인집으로 가는 것은 사랑舍廊 놀음 나간다.’라고 했다. 출화出花라는 비유적인 표현도 사용했다. 기생을 꽃에 비유해온 관습적인 표현에 따른 것이다. 기생들이 요리점이나 개인집에 불려가 연희를 베풀고 받는 기생의 출연료를 가리켜, 은어로 화대花貸, 해웃값, 놀음채라고 했다. 동래기생의 수익은 서울 못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향리 후손이나 부유층 자제들이 공공연히 후원자로 자처해 조선시대의 한량 역할을 이어받았고, 관광지로 인해 외지 손님도 몰려들었다. 동래기생의 놀음에 관한 현장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인에 의해 쓰인 책인 기생물어妓生物語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본인 화가가 조선 관광을 위해 부산에 도착했다. 대체로 보아 1930년대 초반의 일이다. 부산항에서 온천장까지 한 시간 걸렸다. 일본식 온천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가 여관에서 차려준 식사를 마치고, 여관의 방 안에서 삽화를 그리고 있는데 뜰을 사이에 둔 건넛방에서 동래기생이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차례의 비통한 가락의 조선 노래가 끝나자, 일본인의 감흥을 위해 일본의 유행가를 불렀다. 노래의 제목은 카고노도리()이다. 우리말로는 새장의 새.33)

 

いたさ たさに
さを ……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
려움을 잊고서……

 

이 노래는 1922년에 작곡된 일본의 유행가이다. 일본 가요사의 관점에서 볼 때, 창가와 엔카의 과도기에 유행했던 노래다. 1920년대에 센토고우다(船頭小唄)와 함께 가장 크게 유행한 노래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아이타사 미타사니 코와사오 와스레로 시작한다. 일본적인 5음계인 요나누키음계로 조용하고도 애상적으로 불러야 일본인들이 좋아한다. 다소 시끄러운 조선 노래, 예컨대 밀양아리랑 같이 왁자지껄한 노래는 딱 질색이란다. 일본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본 유행가까지 불러야 했던 동래기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전통 예술을 지킨다는 기본적인 민족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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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이주희·추정금, 앞의 논문, 162-63쪽.
27)진옥섭, 앞의 책, 78-79쪽.
28)같은 논문, 167쪽.
29)‘육바탕 하는 별반 안 했고’는 오리지널 판소리 여섯 마당은 특별히 공부한 게 없었다는 뜻인 것 같다. 변강쇠가가 20세기에 연행이 되지 않았으니, 사실은 다섯 마당이다. 여기에서 말한 흥부전, 심청전, 춘향전은 맥락으로 보아선 다섯 마당에 포함되지만 오리지널 판소리인 박타령, 심청가, 춘향가의 변형인 듯하다.
30)이주희·추정금, 앞의 논문, 165쪽, 참고.
31)강태홍(1893-1957)은 전남 무안 출신이며, 주로 서울․대구․부산에서 거주했다.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의 제자인 그는 일찍이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을 음반에 취입했다. 40대 후반에 부산에 살면서 원옥화 ․ 김춘지 등의 제자를 길렀다. 김춘지는 이 부문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만년에 불교에 심취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525쪽.
32)김온경, 「부산 ․ 경남 춤 원류 연구」, 『우리춤 연구』 제4집, 한양대학교 우리춤연구회, 2007, 73쪽.
33)요시카와 헤스이(김일권 ․ 이에나가 유코 옮김), 『조선기생 관찰기』, 민속원, 2013, 181쪽.

 

4. 사회의 선한 영향력

동래관광호텔 기획실에서 1991년에 동래온천소지東萊溫泉小誌라는 제목의, 쪽수가 157쪽인 소책자를 간행했다. 여기에 우리나라 기생문화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동래 기생에 관해서는 36쪽에 달한다.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이 책의 실질적인 집필자가 부산 지역의 소설가인 신태범인 것으로 알고 있다.34) 36쪽의 내용은 잘 정리된 동래의 기생문화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동래 기생 출신 중에서 몇몇 분들이 사회사업가로서 지역사회에 기여했다는 얘기들이 눈길을 끌었다. 나에게는 이것을 책의 핵심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년35)은 동래 교방의 행수기생 출신이었다. 1910년에 동래기생조합이 창설될 전환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기품이 있고 가무에 능해 영남의 한량들에게 이름이 높았다. 그녀의 인기가 절정이던 서른 살 즈음에, 선교의 목적으로 동래권번에 찾아든 독신주의자 목사 김만일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그는 독립지사의 외아들로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그의 설교에 감화되어 기생들이 기독교에 귀의할 수 있게끔 다리 역할을 했다. 그와 그녀는 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청혼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1년 동안에 걸쳐 청혼과 거절을 되풀이해온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사회사업에 더 헌신했다. 슬하에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 딸 역시 사회사업가의 아내가 되어 부산에서 살았다.

동래권번의 선생은 제자 기생에게, 또 선배는 후배에게 반드시 가르치는 게 하나 있다. 남자에게 함부로 정을 주지 말라. 기생이 사랑에 빠지면,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경우처럼 비극의 히로인(여주인공)이 되기 십상이다. 동래기생 연홍蓮紅은 동래고보 학생으로서 3 1운동 때 투옥된 적이 있던 한 청년을 깊이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해 애써 모은 돈을 대주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했다. 청년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았다. 훗날 그는 교수가 되었고, 그녀는 사업가의 소실이 되었다. 그녀는 해방 이후에 온천장에서 작은 여관을 업으로 삼다가 모은 재산을 가지고 고아원을 운영했다. 그녀가 병이 들어 죽을 때에야 비로소 지인을 통해 장관이 된 그에게 부음을 전하게 했다. 장관인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930년대에 남도창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연숙도 사회사업가로 여생을 보낸, 온천장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호산장이란 이름의 요정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훗날에 그녀는 동명목재의 실업가 강석진과 함께 청소년 선도운동에 앞장섰다. 불우시설 지원에도 헌신했다. 그녀의 3남매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특히 큰아들은 암 연구에 정통한 의학자로서 국내외에 이름이 잘 알려졌다고 한다.36)

내가 24년에 걸쳐 진주에서 국립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주의 기생문화 및 지역의 역사 등에 관해 적잖은 관심을 가졌지만, 진주권번 출신의 여성이 부를 축적하여 사회사업에 헌신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국의 기생들은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대부분이 만년에 가난하고 불우하게 살아갔다. 심지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동래 명기들의 치맛바람은 온천장 거리를 온통 주름잡는 치맛바람이 아니라, 서상敍上한 바와 같이 은퇴한 이후에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치맛바람이었다. 다음에 인용한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만년에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며 의롭게 보내는 일이 동래권번 출신들의 보이지 않는 전통처럼 되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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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나보다 10년 이상의 문단 선배인 이 분은 나와 1980년대 중반에 동인지 ‘지평’의 동인으로 함께 잠시 문학 활동을 했다. 그때 이 분은 시청에 재직하고 있었다. 『동래온천소지』의 사실상의 집필자가 이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만남을 청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즈음에 커피숍에서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 책을 전해 받았다.
35)다른 자료에는 기명이 설향(雪香)이라고 한다.
36)㈜동래관광호텔 기획실 편, 앞의 책, 139-141쪽.
37)위의 책, 141쪽.

 

얼마 전에 방시혁은 BTS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우리 국민들이 모두 감동했다. 앞에서 소개한 동래권번의 명기들은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중년 이후에 사회사업을 통해 이웃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명기의 본색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 같은 아름다움을 실현할 수 있었겠는가?

 

◇ 송희복

| 문학평론가. 1957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대학원 졸업.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진주교대 교수 역임. 저서로 『그리움이 마음을 흔들 때』 외 다수가 있음. hbsong@c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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