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리스 로마의 중심지인 지중해 연안을 비롯한 유럽이 중세에 철학과 과학의 암흑기를 맞고 있을 때 중동과 이베리아반도 등 이슬람권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는 곧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돼 르네상스를 촉발시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럽은 오랜 세월의 기아 상태로부터 겨우 탈출해 11세기 말부터 동과 서를 향해 팽창을 시작했습니다. 동으로의 팽창은 십자군전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라는 슬로건 아래 유럽의 군대가 몇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탈환한 것은 가능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슬람 군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보다 훨씬 뛰어난 이슬람의 세계를 보고 배운 게 많았습니다. 유럽이 진보하는 데 십자군 원정 때의 새로운 경험이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럽이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를 직접 더 많이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은 동쪽보다 오히려 서쪽 진출에 의해서였습니다. 11세기 말에 유럽은 동으로 십자군을 파견하고, 동시에 서쪽의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계를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 이래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1085년에 이슬람의 학술도시인 스페인 톨레도Toledo를 점령한 것입니다. 때마침 톨레도에는 이슬람의 대도서관이 있었고, 거기에는 이슬람 학술도서가 엄청나게 보관돼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톨레도 도서관에는 고대 그리스의 학술연구를 아라비아어로 번역한 서적도 많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에서 고대 그리스 학술문화 역수입 ... 아리스토텔레스 재발견
톨레도 도서관을 발견한 유럽의 신학자들은 즉각 방대한 학술도서를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이 가장 활발한 시기는 1125~1280년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번역자는 크레모나의 제라르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톨레도로 온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제라르드는 1175년 『알마게스트』를 번역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슬람 학문의 모든 분야에 이르는 80여 편의 저작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저작들은 다시 유럽으로 역수입됩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권으로 수출되었다가 다시 그리스 등 유럽으로 역수입된 것입니다. 즉 이 때 유럽은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했습니다. 이슬람권으로부터 학술 서적의 역수입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은 곧 유럽 혁신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2세기부터 이슬람의 학술이 한꺼번에 유럽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유럽의 학술문화는 빨리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에 도시와 대학이 생겨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이로써 유럽인은 점차 중세적인 미망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고대 그리스 과학 및 철학과의 만남,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발견은 유럽 기독교 사회가 가진 지식체계에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유럽사회의 정신적 통일성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독교 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신앙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기 전까지 유럽인의 우주관은 기독교와 플라톤주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서(창세기)와 창세 신화가 있는 『티마이오스』에 토대를 두었습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플라톤주의가 유일하게 빠뜨리고 있는 것은 수육(受肉, incarnation)의 교의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부들은 플라톤의 우주관을 수용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주의는 기독교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사상은 기독교 교의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앎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에 대한 연구를 성서 연구에 종속시키고, 지적 호기심에 끌려 자연을 연구하는 것은 기피해야 할 욕망으로 보았지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머리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앎을 욕망한다.”고 선언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전적으로 긍정했습니다. 또 기독교는 신의 기적을 인정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있으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에서는 어떤 일도 자연에 반해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사실상 기적을 부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계는 자연에 내재하는 자신의 운동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완성된 것이지, 초월적인 타자가 자연의 바깥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월자의 자의(恣意)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및 플라톤주의 자연관과 세계상이 ‘피조물로서의 자연’과 ‘영원한 세계’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세계상은 ‘스스로 완성된 자연’과 ‘처음과 끝이 있는 세계’로 상반된 입장을 보였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탐구의 대상' 사상 ... 유럽 '자연 발견의 시대' 촉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에 따라 탐구하고 파악해야 될 대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유럽인들의 자연을 대하는 자세, 자연에 대한 관점 자체를 변화시키기에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이슬람 사회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던 12세기가 ‘자연 발견의 시대’라 불리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기독교 우주관 사이에 마찰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내 13세기 초 유럽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위험성을 간파했습니다. 1210년 파리 교구의 교회 공회의는 파리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강의를 금지했습니다. 이어 1215년 교황의 특별사절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의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마침내 1255년 파리 대학 학예학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강의 과목에 넣을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신학부의 하위 부서였던 학예학부가 ‘철학학부’로 사실상 독립함으로써 신학과 독립적으로 철학의 진리를 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과 유럽 교회와의 갈등은 불가피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조화롭게 편입시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 1225~74)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동서 문화의 용광로였던 나폴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256년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해 1273년까지 기독교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통합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신학대전』은 그의 필생의 역저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합리적 체계로써 기독교 신학을 재편성해 마침내 새로운 철학인 스콜라 철학을 완성했습니다. 『신학대전』은 “신의 의지는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나타나며 신앙은 이 계시에 의지한다. 따라서 세계에 태초가 있었다는 것은 믿어야만 할 대상이지 학문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외형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학을 통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철학을 기독교의 교의에 반하지 않게 교묘하게 논증한 것입니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꾀한 토마스 아퀴나스 ...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논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적 이성을 통해 인식되는 철학적 진리는 신앙과 모순하지 않으며, 이성은 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포섭될 수 있다.’
이는 곧 앎을 추구하는 이성의 자율성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신의 계시와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이성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시적인 진리를 고려하지 않고, 신학적인 동기 없이도 자연을 합리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퀴나스의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는 그 용적의 구석구석에까지 물질을 가득 채운 구(球)로서, 진공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운동은 움직이게 하는 힘과 움직여지는 물체 사이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물리적인 접촉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의 존재 증명의 첫째는 천구의 운동은 제1 추동자(원동자), 즉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의 활동은 천구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으며, 천체의 운동은 5세기의 디오니시우스가 가정했던 아홉 계급의 천사에 의해 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콜라철학은 나중에 자연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쪽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스콜라철학의 방법, 특히 그것의 논증 형식에 돌려야 할 것입니다. 13세기의 시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자연과학(자연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