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 오디세이 - 다세계 해석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비판과 반론
코펜하겐 해석의 논란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아직까지 양자역학에 큰 하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아이슈타인의 강력한 ‘불완전성’ 논증에도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코펜하겐 해석은 전통적인 과학관에 반하는 요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험적으로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이 확인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코페하겐 해석은 19세기에 지배적이었던 단순한 유물론과 실재론에 익숙한 물리학자들의 자연관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이 철석 같이 믿고 있던 물리적 실재론과 인과론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고, 양자론을 고전물리학과 물리적 실재론 개념과 부합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양자론의 수용을 꺼리는 것은 양자론의 수학적 형식이 아니라 철학적 내용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자론의 반대론자들의 소망은 한결같습니다. 그것은 고전물리학적 실재 개념, 더 일반적인 철학 용어로 말하면 유물론적 존재론으로의 되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우리가 관찰하건 못하건 간에, 우리가 흔히 보는 돌이나 나무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세계의 표상(表像)’으로 되돌아가고픈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원자 현상에 대한 심상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자적 현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희망을 공식화하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과제는 아닙니다. 그들의 과제는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양자론을 반대한 대표적인 과학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의 토대를 쌓은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입니다. 이들의 반대론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코펜하겐의 해석이 진실로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자론의 수학적 체계는 원자현상의 통계학에 대한 아주 적절한 설명입니다. 원자과정의 확률에 관한 양자론의 주장이 전적으로 타당하다면 이 해석은 우리들의 관찰과는 무관하게 원자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데 뭔가 일어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무엇인가’는 어쩌면 전자, 파동, 입자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것인 한, 물리학의 과제는 충족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오로지 관찰행위의 문제이다.”라는 말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물리학자 역시 스스로 만들어 놓지 않는 세계, 과학자가 없어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세계를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자기 학문에 전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코펜하겐 해석은 원자과정에 대한 아무런 실제적인 이해를 보증하지 못합니다.
이상의 비판은 바로 유물론적 존재론, 즉 객관적 사실적 세계의 표상, 더 쉽게 말하면 물리적 실재론을 요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코펜하겐 해석은 어떤 반론을 펼 수 있을까요?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한 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특성 안에서 자연에 대한 관계나 자연설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해든 그것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언어에 달려 있고, 우리가 사상을 전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현상, 시도,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설명은 이해의 유일한 수단인 언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는 일상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념은 고전물리학에서 더욱 정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이제 각각의 실험의 과정과 배열, 그리고 그 결과를 보다 분명히 이해시키고, 전달하는 유일한 도구가 됩니다.
‘원자물리학자는 실험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요구할 경우 ‘설명’, ‘실제로’, ‘일어난다’라는 단어는 단지 일상생활 혹은 고전물리학의 개념과 관련된 것입니다. 물리학자가 이 근본원칙을 깨고자 하면 바로 정확하게 이해시킬 가능성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학문을 더 진전시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났는가 하는 진술은 전부 고전물리학의 개념으로 진술됩니다. 고전 물리학의 개념은 열역학과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원자과정의 개별적인 사태에 관해 원래 불완전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결코 실증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는 관찰자의 감각 인상에 기초해 실재의 요소를 말하는 반면, 코펜하겐 해석은 고전역학 언어와 개념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과정, 즉 현실(the actual)을 물리적 해석의 기초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미시물리학 법칙의 통계적 속성은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에 대한 인식은 이 같은 특성, 즉 양자역학적 법칙 때문에 자연히 불완전한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적 존재론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묘사가 원자 영역에서도 근사적으로 가능하다는 환상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슈뢰딩거의 ‘파동’ 해석입니다. 양자론의 수학적 형식인 파동역학을 창안한 슈뢰딩거는 ‘파동’을 실제파가 아닌 확률파동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기술하는 ‘파동’이 3차원 현실의 파동이 아니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의 대안을 찾아서
양자론의 표준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은 현상을 잘 설명하는 유력한 해석이지만 양자론의 근간이 되는 확률파동의 중첩과 관측에 의한 붕괴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표준해석을 대체할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온 대표적인 대안 해석으로는 에버렛(Hugh Everett)의 다세계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 데이비드 보옴(David Bohm)의 숨은 변수 이론(hidden variable theory)과 양자 포텐셜 해석, 디터 제(Dieter Zeh)의 양자적 결어긋남(quantum decoherence), 서울대 장회익 이중원 교수 등의 ‘서울해석’ 등이 있습니다.
다세계 해석
다세계 해석은 미국의 물리학자 휠러(John Wheeler)의 제자로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에버렛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양자역학의 상대 상태 공식화(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가 원점입니다. 이 해석은 양자역학적인 상태가 항상 실재의 완벽한 기술이며, 측정에 의해서 그 상태로부터 손실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전제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양자계의 가능한 모든 상태를 중첩하고 있는 확률파동은 관측에 의해 단 한 가지 가능성만 남고 나머지는 즉각 붕괴됩니다. 이에 비해 다세계 해석은 비록 관측을 하더라도 확률파동은 각각의 상태를 지닌 채 그대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많은 세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에버렛은 양자론이 자연계의 기본원칙이라면 그 원리는 미시세계에만 한정되지 않고, 미시세계의 물질로 구성되는 거시세계의 모든 것에, 나아가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우주는 지금부터 약 137억 년 전에 한 점(특이점)이 빅뱅이라는 대폭발을 일으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무수한 미립자가 탄생하고, 별들이나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만들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우주의 역사에 양자론을 적용하며 어떻게 될까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진공으로부터 빛 등의 미립자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는 양자론으로는 확률적인 문제가 됩니다. 이때 우주는 ‘미립자가 생긴 우주’와 ‘미립자가 생기지 않는 우주’로 나뉜다고 에버렛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능성의 정도만큼(코펜하겐 해석으로 말하면 ‘서로 겹침’이 되어 있는 상태의 수만큼) 계속 반복되어 우주 속의 하나가 우리들이 있는 현재의 우주이고, 동시에 ‘다른 내가 있는 우주’와 ‘내가 없는 우주(평행 우주)’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세계 해석의 최대 장점은 슈뢰딩거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확률파동의 붕괴’라는 가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이 관측하는 순간 특정 파동으로 수렴해 입자가 발견되고 동시에 나머지 파동은 모조리 붕괴된다는, 즉 ‘파동으로서 운동을 하는 전자’와 ‘입자로서 발견되는 전자’라는 불가피한 괴리를 갖는 코펜하겐 해석의 난점을 해결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측되기 전 전자의 위치에 대해 ‘여러 장소에 있는 상태가 겹쳐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이것에 비해 다세계 해석에서는 관측하기 전 전자는 어딘가 하나의 장소에만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가 복수로, 예를 들어 ‘전자가 A점에 있는 세계’, ‘B점에 있는 세계’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의 전자가 ‘각각의 장소에 있는 상태’가 겹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각자의 장소에 있는 세계’가 겹쳐져 있는(동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관측자도 각각의 세계에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뉜 각각의 관측자는 자신이 어느 세계에 와 있는지를 전자를 관측하기까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전자를 관측하고 난 다음 비로소 ‘여기는 전자가 A점에 있는 세계다.’라고 아는 것입니다. 단지 사전에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가능한데, 이는 코펜하겐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동함수의 확률해석’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다세계 해석으로 ‘슈뢰딩거 고양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상자를 열기 전에는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의 세계가 겹친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에 반해 다세계 해석에서는 관측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상자 안과 밖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뉩니다. 그 하나는 ‘상자 안에서 방사성 물질이 원자핵 붕괴를 일으키고 그 때문에 독가스가 발생돼 고양이가 죽고, 그 상자 밖에 관측자가 있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상자 안의 방사성 물질이 원자핵 붕괴를 일으키지 않고 따라서 독가스는 발생하지 않아 고양이는 살아 있고, 그 상자 밖의 관측자가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계의 관측자가 상자를 열면 고양이는 죽어 있고, 뒤의 관측자라면 고양이의 생존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세계 해석은 반생반사 상태의 고양이나 파동의 붕괴라는 요상한 개념도 필요 없고, 논리적인 모순도 없이 ‘슈뢰딩거 고양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단, ‘고양이가 살아 있는 세계와 죽어 있는 세계가 정말로 평행하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확인해주지 못합니다.
다세계 해석을 양자역학의 본질을 내포한 ‘전자의 2중 슬릿 실험’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전자총에서 발사된 하나의 전자는 ‘왼쪽 슬릿을 통과한 상태’와 ‘오른쪽 슬릿을 통과한 상태’가 겹쳐져서 간섭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스크린에서 관측될 때는 파동의 수축에 의해 어느 한 점에 발견되지만, 이것을 몇 번 반복하면 전자가 발견된 위치의 흔적은 간섭무늬 모양이 됩니다.
다세계 해석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한 개의 전자가 2중 슬릿을 통과할 때, 세계는 둘로 나뉩니다. 이들은 ‘전자가 왼쪽 슬릿을 통과할 때의 세계’와 ‘오른쪽 슬릿을 통과할 때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뉜 뒤 다시 만나고, 서로 겹쳐집니다. 따라서 이 전자는 두 개의 다른 과거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의 전자 안에 두 개의 역사가 서로 겹쳐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전자는 좌우 양쪽의 슬릿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하는 간섭무늬를 스크린에 그립니다.
다세계 해석은 발표 당시에는 외면 받았지만 에버렛의 사망(1982년) 후 많은 물리학자와 우주론학자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요즘 물리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평행우주론과 다중우주론은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MIT 물리학과 교수인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는 최근 발간한 ‘맥스 테그마크의 우주’를 통해 “빅뱅의 난점을 해결해주는 인플레이션이론에서 평행우주가 수학적으로 도출된다”며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다세계 해석은 비록 코펜하겐 해석의 난점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주긴 하지만, ‘평행우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데다 상식과 너무나 괴리가 큰 ‘무수한 우주’, ‘무수한 나’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낸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다세계 해석은 논리적인 모순은 없지만 일반적인 과학이론의 요건(필수요건은 아니지만) 가운데 자주 인용되는 두 가지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 하나는 반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가능하지 않은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다세계 해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물리적으로 우리 우주 안에서 다른 우주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세계 해석에서 말하는 지금 내가 속한 우주 외의 다른 우주의 '나'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또 그 우주마다 나 아닌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는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오컴의 면도날’ 원리를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오컴은 “조금이면 족할 것을 가지고 많이 사용하는 것은 낭비다”고 했습니다. ‘무한개 파동의 붕괴’라는 가정이 불합리하다면서 ‘무한개의 우주’를 지어낸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요?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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