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4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7장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2)

이득수 승인 2024.05.21 10:56 의견 0

영순씨를 흔들어보았지만 끙끙 앓기만 할 뿐 일어나지를 못 하더니 아침 여섯 시나 되어 겨우 눈을 뜨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몸을 가누지 못 해 급히 슬비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병가를 내기로 하고 열찬씨도 사무실에 미리 연락을 해 한나절 연가를 내고 영순씨를 병원에 데리고 간 일도 다 있었다.

그런 영서가 자라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판에 다시 아이가 태어난다니 아이하나를 키우느라 무릎관절이 다 망가져 병원에서 뼈 주사까지 맞는 영순씨가

“이번에는 도저히 아이를 못 봐준다, 또 낳으려면 너거 아이 너거가 봐라!”

하면서 눈길은 매번 열찬씨를 향했다. 두 번째를 낳을까 보다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낳으라고 한 열찬씨가 이렇게 아이들의 직장마저 흔들리니 생각하면 할수록 괘심한 모양이었다.

17.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2)

그러나 저나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설날 이틀 전에 열찬씨와 영순씨의 운동화 한 켤레씩과 상품권 몇 장을 들고 온 내외가

“엄마, 상품권이고 운동화고 이번 설이 마지막일 거야. 아마.”

“아버님, 죄송합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인사를 하고 슬비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자 도연씨가 따로 열찬씨에게 10만 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하나를 내밀었다.

“됐다. 너거도 힘들 텐데.”

“아닙니다. 직장이사 다시 취직하면 되지요.”

하며 기어이 주고 갔다. 상품권이야 몇 장을 주어도 모두 영순씨 몫이라 따로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정석이와 며느리가 와서 저녁을 먹고 저들끼리 따로 맥주를 마시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너가 늙고 시설투자를 않는 세원이 퇴출 될 뿐 제2전성기를 맞은 부산의 신발산업은 박연차게이트로 유명한 태광산업을 비롯해 아직 쟁쟁한 회사가 여럿이라 자재업무나 개발업무에 어느 정도 일꾼이라고 평판이 난 둘은 금방 다른 곳에 취직할 수가 있어 슬비는 이미 여러 곳에서 전보다 훨씬 나은 조건으로 스카우트제의가 오고 있다고 했다.

이튿날 오전 정석이내외가 도착했다.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영순씨에게 영서가 굳이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아이들의 심리가 본능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을 좋아한다더니 제 어미 보다 젊고 아직 아이가 없는 외숙모가 너무나 좋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마친 정석이가

“어어, 누나랑 자형은 본가에 안 가도 되나?”

“응, 그렇게 됐어.”

심드렁하게 슬비가 대답하는 사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신혼시절 명절 전날 아들내외가 들이닥치면

“우리 집엔 제사도 없고 하니 뭐 이래 급하게 올 필요도 없어.”

자신도 아직 회사에 다녀서 그런지 명절이라고 뭐 별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일도 없이 평소처럼 대부분 시장안의 반찬가게에서 사온 오뎅과 일미볶음 등으로 건성으로 상을 차려내고 명절당일에도 쇠고기를 사다 콩나물로 국을 끓이는 정도면 끝이었다. 제사가 없으니 그러려니 이해하려던 슬비가

“어머니, 그래도 명절인데 우리도 음식을 좀 장만하도록 하지요. 어머니 바쁘시면 다음부터 제가 장을 봐서 만들게요.”

해도

“제사음식이나 명절음식이 괜히 돈만 들지 무슨 맛이 있나?”

하고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러다 자신보다도 두 살이나 많은 시누이 남희씨가 시집을 가자 이번엔 사위도 오고하니 음식을 좀 할 줄 알았으나

“손서방이 입이 짧아 통 먹어야 말이지. 처가라고 오면 그저 잠이나 잘라카고.”

입이 뾰르통해지면서 여전히 음식장만을 안 했다. 시어머니 김금자여사는 딸이 4년제 간호학과를 나왔으니 금방 수간호사가 되고 잘하면 의사나 최소한 약사니 뭐니 하는 자격증이 있는 전문직업인과 결혼할 줄 알았는데 서른하나가 되어서 처음으로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으나 정작 당사자를 알게 되면서 그만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가시나야, 니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자 보는 눈이 그밖에 안 되노? 니가 가방끈이 짜리나? 직업이 없나? 인물이 빠지나?”

당장 그만 두라고 했으나 남희씨는 끄덕도 안 했다.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 부터 제 앞을 못 가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남희씨는 매사 소극적이고 혼자 조용히 책이나 보는 성격으로서 직장일이나 남자를 사귀는 일까지 도무지 흥미랄까 열정이 없었다. 어쩌다 집에서 쉬는 날에도 어머니 금자씨가 텔레비전의 스포츠중계에 몰입하는 동안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말 한마디 잘 나누지 않고 한나절을 보내곤 하다 가끔 시장골목의 통닭을 시켜다 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던 남희씨가 서른 살이 되던 설날 아침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어머니 김 여사가

“남희야, 니 지금 머리 꼴이 거기 뭐꼬? 그러니까 여자 나이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지?”

하고 운을 뗀 뒤 밥상을 치우자말자

“니 지금 당장 엄마랑 미장원에 가자!”

몰아붙이는데

“엄마, 오늘은 미장원 쉬는 날 아이가?”

남희씨가 반문해 넘어갔지만 이튿날 출근하는 남희씨에게 “니 근무 끝나고 나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하고 들어오너라. 만약 저녁에도 머리를 수세미나 풀 방구리처럼 하고 들어오면 문도 안 열어줄 기다.”

단단히 오금을 박고 내보내자 과연 그날 저녁 산뜻하게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남희씨를 보고

“봐라! 어데 우리 딸이 보통 인물인가? 옛날 같으면 평양감사가 뒤돌아본다지만 요즘세월엔 판검사가 줄을 서겠다.”

하며 좋아했다. 체격이나 얼굴이 모두 어머니 금자씨를 닮아 이목구비가 반듯하기는 하지만 아주 오목조목 깜찍한 매력을 풍기는 어머니와 달리 눈이 너무 크고 얼굴이 넓어 이목구비하나하나는 그럴 듯해도 어딘가 좀 불안한 빛이 감도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그렇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아이구, 우리 남희가 머리를 다 하고. 내 동생이 이래 미인인 줄 몰랐네.”

도연씨도 거들고

“애기씨는 이렇게 이목구비가 다 반듯하니까 얼굴 가꿀 생각을 안 했구나? 참 부럽네요.”

올케 슬비씨까지 나서자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는지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두 번 미장원에 가서 손질을 하고 오더니 어떤 때는 머리를 자르고 또 어떤 때는 파마를 하고 그러다 다시 파마를 풀고 염색을 해보며 극성을 뜬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 참 희한하네. 우리 남희가 진짜 남자가 생겼는가?”

도연씨의 말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아기씨가 매일 헤어스타일을 바꿀 정도면 이건 틀림없이 남자가 생긴 것이야. 이건 뭐 여자로서 내 직감일 뿐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지.”

하고 시어머니에게 넌지시 떠 보게 했다. 그래서 이튿날 남희씨가 퇴근을 하자

“가시나 또 머리 색깔을 바꿨네. 니 혹시 남자 생겼나?”

묻자 평소라면 펄쩍 뛸 남희씨가 가타부타 말이 없이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터라

“그것 봐라. 머리만 자주 해도 금방 남자가 생기지. 그래 병원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가?”

잘 하면 의사 아니라도 원무과 사무직원이나 물리치료사 따위를 염두에 두고 묻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 지라

“그러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나 보호자 총각인가?”

해도 또 고개를 흔들어

“혹시 니 오빠친구나 동네총각이가?”

“아니.”

“아이구 답답해라. 그러면 출퇴근길에서 만난 사람이가?”

“아니.”

하고 고개를 젓다

“좌우간 지금 니가 만나거나 마음에 둔 남자가 있지?”

“응, 그렇지만 이제 서로 알아가는 단계야. 나중에 때가 되면 이야기할 게.”

하고 이야기가 끝났다. 신이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상대가 궁금해서 도연씨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나 오빠가 아닌 같은 세대의 여자인 며느리가 나서서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전부터 소심한 시누이 남희씨가 가끔씩 거의 우울증에 빠진 사람처럼 만사에 의욕을 잃고 눈빛이 멍해지면 같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간호사인 자신이 점점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이제 초등학생보다도 못 한 아버지를 낫게 하거나 자주 돌보지도 못 하는데 많은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을 알고

“그런 아버지를 둔 세상의 모든 딸이라면 누구나 다 아기씨처럼 느끼고 슬퍼할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으니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다 가시게 하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지금부터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며느리인 내가 알아서 신경을 쓸 테니 아가씨는 어서 좋은 사람 사귀어 시집이나 가도록 하세요.”

“언니, 고마워요.”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시누이가 단박에 언니라고 부르며 눈물을 흘리게 한 일도 있어 병원 일을 마친 뒤 저녁이나 하자며 약속을 해서 만나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 용건을 꺼내니 뜻밖에도 아직은 언니만 알고 있으라며 순순히 밝히는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고 나서 평소 꽤 대범한 슬비도 그만 깜짝 놀랐다고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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