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49)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7장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3)

이득수 승인 2024.05.22 07:00 의견 0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시누이가 단박에 언니라고 부르며 눈물을 흘리게 한 일도 있어 병원 일을 마친 뒤 저녁이나 하자며 약속을 해서 만나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 용건을 꺼내니 뜻밖에도 아직은 언니만 알고 있으라며 순순히 밝히는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고 나서 평소 꽤 대범한 슬비도 그만 깜짝 놀랐다고 했다.

17.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3)

남희씨가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병원 앞의 어느 마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자르면서 거울을 보는 순간 그만 숨이 콱 막히며 가슴이 와들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가위를 든 남자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하얀 얼굴에 땀구멍이 다 드러날 정도의 반질반질한 피부에 노랗게 염색한 헤어스타일까지 누가 보아도 숨이 막힐 꽃미남이었다.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 남희씨에게

“우리 미용실에 처음이세요?”

남자가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데 목소리도 깊고 고요한 샘물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맑았다.

“이 동네 사시는지, 아니면 혹시 동의의료원에 근무하시는지요?”

하는 순간

“예에.”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고 이어

“어느 과에 근무하세요? 혹시 제가 몸이 아프면 신세라도 좀 지게.”

“저 병동에 근무해요. 입원환자를 돌보는...”

하고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마침내

“자, 다 되었습니다. 어때요? 맘에 드시는지요?”

빙긋 웃으며 쳐다보는 총각에게 차마 눈도 못 맞추고

“네.”

하고 나왔는데 이후로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하듯 2, 3일에 한 번씩 미장원에 가서 괜히 안 해도 될 머리손질을 하며 미용사가 권하는 대로 파마도 하고 헤어스타일도 바꿔봤다고 했다. 그러다 상대도 자신에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걸 알고 창피하긴 했지만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고 총각이 쉬는 월요일 날 만나 시내에 나가 저녁을 먹고 극장에 가고 자갈치해안가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데이트를 했다고 했다.

슬비씨가 깜짝 놀라긴 했지만 내색을 않고 그럼 두 사람사이가 앞으로 잘 진전되면 아가씨는 결혼까지 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이 어떻게 나 같은 못난이와 결혼하려 하겠어요?”

“아니에요. 아가씨도 충분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당한 자격을 갖춘 전문직업인이라 전혀 꿀릴 것이 없어요. 오히려 저쪽에서 눈치를 보아야지.”

하고 다독거린 뒤 앞으로 진도가 나가는 것을 자기에게 이야기하면 도연씨랑 셋이서 어머니의 승락을 받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모처럼 열찬씨내외와 다섯 식구가 식사를 한 뒤

“엄마아빠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슬비가 의견을 묻자

“사돈처녀가 너무 아깝네. 우째 4년제 간호대학 나온 아가씨가 미용사랑 결혼을 하노? 층이 져도 너무 심하게 진다.”

영순씨의 말에

“야, 이게 바로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구먼. 이건 운명이야. 그냥 받아들여야 해.”

시원하게 찬성의 뜻을 표하는 열찬씨를 보고

“당신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능교?”

영순씨와 셋이 동시에 올려다보는데

“이건 내가 군대생활을 할 때 이야긴데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여자가수가 <이별>이란 노래를 부르는 패티김이었지. 짧은 점심시간에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매우 우렁찬 성량에 애달픔까지 가미된 신비한 목소리로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하는 노래를 들으면 논산훈련소에서 각개전투를 교육받느라고 죽을 지경이 된 훈련병들도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짜장면을 먹을 때면은’ 하고 따라 부르며 각자 고향에 두고 온 애인들을 그리워했지. 지금 생각하면 겨우 짜장면을 먹는 것이 무슨 사건인가 싶어도 그 당시에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만두를 먹는 것만 해도 상당히 고급데이트였고 어쩌다 탕수육에 배갈이라도 마시는 날이면 아주 성대한 파티였지. 그 정도 대접을 받으면 여자가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아이구, 제헙어라. 우산이야기 끄집어내놓고 웬 짜장면타령이야?”

이제 언양사투리에 익숙한 영순씨가 항의를 하자

“그렇구나. 당시에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배우가 프랑스의 카트린느 드뇌브란 여배우로 <솔저 불루>, <사브린느> 일명 메꽃 그러니까 모미싹꽃이라는 영화에 출연해서 하얀 얼굴, 날렵한 목덜미와 신비로운 눈빛으로 지상의 모든 사내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에는 <쉘부르의 우산>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데.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한 프랑스의 한 병사가 전쟁의 포연 속에서 부지런히 고향에 두고 온 애인에게 편지를 했는데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애인은 이미 그 연애편지를 배달해주던 우체부와 결혼을 했더라는 이야기지. 물론 너무 열심히 편지질을 해대는 병사를 놀린다고 살을 붙인 이야긴지는 몰라도 아무튼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엉뚱한 결론인데 좋은 남자가 생겨 결혼을 하도록 억지로 미장원에 보낸 아가씨가 덜렁 미용사총각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쉘부르의 우산>인 거지.”

“아빠, 아빠이야기가 맞기도 하고 재미도 있지만 지금 주제는 그게 아니지.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말려야 하는가, 지속시켜 해피엔딩, 그러니까 결혼을 시키는가가 문제란 말이지.”

셋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지는데

“이 일은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어. 지금 남희씨를 말린다면 말릴수록 남희씨는 더욱더 그 남자에게 집착해 집을 나간다든지 해서 괜히 부모자식 간에 정만 상할 수가 있어.”

“아빠는 왜 그렇게 단정하는데?”

“아니, 생각을 해 봐 그렇게 소심하고 내성적인 남희씨가 어떻게 첫사랑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귈 수 있겠어? 만약 모처럼 찾아온 이 첫사랑을 포기하면 앞으로 영원히 노처녀로 늙어갈 지도 몰라.”

하는 순간

“맞아요. 우리 남희가 그렇게 좀 맹한 데가 있지.”

도연씨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지는데

“남희씨의 속도를 좀 늦추게 하고 기회를 봐서 조금씩 안사돈에게 힌트를 주면서 뜸을 들이는 거지. 그리고 그 사이에 자네는 총각의 뒤나 좀 알아보고.”

“예.”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열찬씨의 각본대로 천천히 뜸을 들여 마침내 남희씨가 미용사, 아니 헤어디자이너와 사귄다는 말을 하자

“아이구, 망했다! 뭐 미용사라고?”

단번에 사색이 된 금자씨가 펄쩍 뛰면서

“내 이까짓 미용사사위 볼라고 그렇게 힘들게 니를 4년제 대학 보낸 줄 아나?”

너무나 억울한지 앞에 놓인 밥상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더니

“그래 미용사라면 프랑슨가 어데 유학도 다녀온 사람으로 몇 십만 원 주고 미리 예약하는 그런 전문간가?”

“아니.”

“그럼 열심히 돈을 벌어 제 살 아파트는 물론 가게 낼 상가건물이라도 있나?”

“아니.”

“그럼 그런 가난뱅이를 왜 사귀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따는 할 말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으로 이미 발갛게 상기된 남희씨는 그만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맥없이 3층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었다.

“죽 쑤어서 개 준다더니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미용사나부랭이야!”

아직도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들어간 방문을 흘낏거리던 슬비가 제 남편에게

“당신이 무어라고 말을 좀 해 봐!”

“말, 말을, 내가 무슨 말을?”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선홍색으로 변하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 여동생에 당신엄마 아니야? 어머니는 맨 날 당신이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이라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이나 대책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야?”

“내, 내가 뭐...”

하며 식탁의 의장에 주저앉더니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마셨다.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지만 병든 아버지 밑에서 소심하게 자라 무엇 하나 딱 부러지게 결단을 내리지 못 하는 성격이지만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한참이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슬비씨가 3층으로 올라가

“아가씨!”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이미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바탕이 된 남희씨에게

“이런 애로사항 하나 없이 그냥 순탄하게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사랑이 가만히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고 싸워서 쟁취하는 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야 더 멋진 로맨스가 되고.”

“...”

“아가씨 기분도 이해하지만 어머님이 하시는 말도 그른 말은 아니잖아요? 그게 다 자식을 위한 마음이지 달리 무슨 억하심정이 있을 턱이 있나요?”

하면서 손을 잡아주자

“언니이!”

두 살이나 많은 시누이가 어린 올캐의 품에 안겼다. 한참이나 등을 토닥거려주던 슬비가

“아가씨, 그런데 아가씨는 도대체 얼마나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떡이자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니 같이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예.”

“어머니나 오빠가 정 반대하면 몰래 잠수라도 탈 각오가 되어있나요?”

“예.”

“그리고 그 사람도 아가씨와 똑 같은 생각인가요?”

“예에-, 아, 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럴 거예요. 아마. 먼저 오빠랑 언니를 만나보자고 하니 그러자고 했거든요.”

“그럼 됐어요. 제가 어머니께 한번 이야기해보지요.”

하고 2층으로 내려온 슬비씨가

“어머니, 기분도 꿀꿀한 데 통닭 시켜서 소주 한 잔 할까요?”

하는 순간 도연씨가 재빨리 문을 열고 시장골목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세상에 속 한 번 안 썩히고 시집가는 딸이 있나요? 우리 어머니도 처음엔 그랬는데...”

하다 앗차, 싶어 말을 끊는데

“그래. 니 같은 딸이면 진짜 아무나 주기 아까웠겠지.”

뜻밖에도 화를 내지 않고

“생각도 깊고 자기의사도 분명하게 밝히고 주변사람 챙기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고, 어머니 왜 이러세요? 사람 부끄럽게요.”

하는 사이에 도연씨가 통닭과 소주를 사다 식탁에 늘어놓자

“남희는”

3층 계단을 흘낏거리는 남편에게

“부르지 마세요. 부른다고 올 기분도 아닐 테니.”

하며 접시에 닭고기를 담고 콜라까지 한 병 꺼내니 도연씨가 부리나케 들고 올라갔다.

“자, 어머니, 기분도 꿀꿀한데.”

슬비가 소주를 석 잔 부어 도연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쨍 술잔을 부딪치고 시어머니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려 다시 한 잔 부어주며

“어머니, 어머니는 누구보다 우리 아가씨 성격을 잘 알잖아요?”

“그렇지. 내 딸이니까. 그러나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도 도무지 제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

“그렇겠지요. 우리어머니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아가씨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만약 어머니가 끝까지 반대하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충격이라? 그렇지만 한 번쯤 울고불고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지. 남자가 세상에 지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달랑 그것 하나만 차고 장가를 오는 사람이 어딨겠노?”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공부시킨 딸인데 말입니다.”

“...”

“그렇긴 하지만 아가씨 성격으로 보아 이번 일이 잘못 되면 심한 우울증에 빠질 것 같은 생각은 안 듭니까?”

“우울증?”

“저는 평소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아무에게도 말을 않고 혼자 끙끙 앓은 성격으로 보아 밥을 먹지 않거나 씻지 않거나 직장에 출근하지 않거나 심지어 집을 나가버릴 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

“달래고 어르고 어떻게 수습을 하더라도 아가씨성격에 다시 남자를 사귀거나 다시는 결혼할 엄두를 안 낼 수도 있고요.”

“...”

“날마다 울고 짜고 히스테리나 부리는 노처녀와 한 집에서

평생을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

시어머니의 눈동자에 당황하는 빛이 스치는 것을 보고 다시 소주 한잔씩을 건배한 뒤

“고무신도 짝이 있다고 하늘이 정해준 배필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봐요. 서른이 넘도록 한눈 한 번 팔지 않던 아가씨가 저렇게 죽고 못 사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

“또 요즘 세상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어져 미용사도 기술만 좋으면 돈도 잘 벌고 얼마든지 존경도 받고 말입니다.”

“...”

“일확천금을 꿈꾸는 허황한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기술과 노력으로 먹고 사니 밥걱정도 없고 또 아가씨도 직장이 있으니 금방 돈을 벌어 남 못잖게 살겠지요.”

“아이구, 니 말을 들으니 금방이라도 만사가 해결되는 것 같네.”

탁자에 소주잔을 놓으며 금자씨가 비로소 길게 한숨을 쉬자

“야, 우리 색시 변호사네.”

도연씨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마침 안방에 잠이 들었던 영서가 일어나자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가자며 내외가 일어나자

“슬비야, 니 말은 반대만 하지 말고 한번 잘 생각해보란 말인데 내가 뭐 우째 알겠노? 도연이하고 둘이서 총각도 한번 만나보고 고향이나 집안사정이랑 뒷조사도 좀 해보고 나중에 또 이야기를 하자.”

그새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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