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자 시인과 첫 산문집 표지

고명자 시인이 첫 산문집 『바다, 오선지에 다 담을 수 없는 음계』(전망)를 펴냈다.

서울 출생인 고 시인은 2005년 《시와정신》등단을 시작으로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나무 되기 연습》을 냈고, 시와정신문학상, 이주홍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은 이번 산문집에서 바다를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의 기보로 바라본다. 파도와 물결, 빛과 바람, 항로와 지도는 흔들리고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는 존재들의 리듬을 기록하는 선율처럼 그려진다. 작가는 “시는 나를 단순하게 살게 했고, 산문은 인생을 좀 더 먼 쪽으로 보내보라고 등 떠민다”고 말하며, 말로 다 적을 수 없는 감정과 비밀을 바다의 음계에 비유한다.

삶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잊힌 감정을 조용히 불러내며, 바다가 건네준 태도와 침묵의 무게를 탐색한다. 짧은 문장 속에서 긴 시간을 퍼올리고, 사소한 순간 속에서도 인생의 가장 넓은 지평을 발견하는 글들이다. 이 책은 오선지에 다 담을 수 없는 음계처럼, 말로 다 담기지 않는 감정과 비밀들을 바다에게서, 그리고 삶에게서 배워 온 시인의 기록이다.

책은 1부 ‘야야, 자갈치 가자’에서 4부 ‘영혼의 쉼터, 굴업도'까지 26편을 통해 부산에 대한 애정과 자기 성찰, 도시와 자연·일상과 시대감각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짧은 문장으로 응축해 담았다.

'야야, 자갈치 가자'에서 자갈치시장의 비린내와 활어의 펄떡거림, 봄 도다리와 소주 한 잔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체온을 그대로 전해준다. 자갈치는 시인에게 오늘의 축구장이자 식탁, 휴식처이며, 바다는 미래이자 기도처가 된다. 신분과 빈부, 인종과 정치가 지워진 ‘소리의 바다’에서 사람들의 열망은 큰 파도 같은 대합창으로 하나가 된다.

'시詩 이전에 나라는 것'과 '나 이전에 시詩인 것'에서 시인은 시와 자기 존재의 순서를 끝까지 되묻는다. 꼴찌의 자리까지 달려온 ‘고고한 정신’에서 작가정신을 읽어내고, 극복되지 않는 상실의 한가운데서 서러운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자신의 시로 정의한다. 시는 재앙의 공간인 사막으로 자신을 내모는 동시에, 삶을 더 비장하게 만드는 ‘불확실한 확신’으로 그려진다.

낙동강 하구 대저·엄궁·장낙대교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재판기를 다룬 '법정 306호'에서 시인은 개발논리 앞에 밀려나는 야생 생명과 윤리의 붕괴를 응시한다. 고리 2호기 수명 연장 문제를 짚은 '목소리, 목소리들'에서는 원전 사고의 재앙과 책임 회피를 비판하며, “모든 피조물을 향한 윤리적 행동”을 강조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말을 다시 현재의 과제로 소환한다.

모처럼 한가한 주말 오후 y시인을 만났다. 봄 햇살을 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자갈치시장이었다. 바람에 묻어오는 비린내에 끌렸는지 남포동 시끌시끌한 행렬에 휩싸이다 떠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건어물전이며 생선전을 기웃거리다 사진 찍고 흥정도 하면서 자갈치 1층 활어 센터로 들어섰다. 봄 도다리며 참돔, 광어며 문어, 새우 등 각각의 어종들은 수족관을 뛰쳐나와 금방 바다로 돌아갈 듯 싱싱했고 힘이 좋아 보였다. 활어들의 펄떡거림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우리의 탄성도 한 옥타브쯤 높아졌다.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고 큰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해주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품새가 바다를 닮았다. 목소리는 파도처럼 높고 힘도 세고 투박스럽게 들렸다. 새벽부터 밤까지 생물을 다루는 아지매들은 자갈치의 상징이다. 바다 생물을 살려내 꿈틀거리게 하는 일은 아지매들의 생존과 같은 일이며 시간과 다투는 일일 것이다. 펄떡거리는 생물의 목을 단칼에 쳐서 피를 빼고 지느러미를 쳐내는 솜씨,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꽃잎을 저미듯 살을 발라내는 숙련된 솜씨는 과히 장인匠人이라 하겠다. 바다 옆에 살면 성품도 정신도 닮아가는가 보다. 바다를 일터로 삼아 삶을 일구는 아지매들은 바다처럼 품이 넓어 흥정도 밀당도 화끈하고 인심도 좋아 보였다. 아지매들에게 자갈치는 아니 세상의 모든 바다는 가장 믿음직한 금고金庫이고 목숨을 다할 때까지 등 비비며 의지하고 싶은 등받이 언덕일 것이다.

- 야야, 자갈치 가자' 중 -

『바다, 오선지에 다 담을 수 없는 음계』는 2025년 12월 22일 발행된 190쪽 분량의 산문집으로, 시집처럼 여백이 많은 문장 속에 바다와 도시, 시와 생태가 맞물리는 한 시인의 기록을 담고 있다. 도서출판 전망에서 나왔으며, 정가는 1만5천 원이다.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 본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