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 큰 처남이 산에서 직접 따다 담아준 건데 혼자서는 잘 안 묵어져서...”
하는데
“당신은 쪼깨만 무소.”
제수씨가 한 잔씩 따라주는데
“참, 그 사형 돌아가싰다 안 캤나?”
“예. 5년도 넘었지요. 국민학교운동회 갔다 오다가 경운기가 엎어져서.”
“그렇구나. 그 술이 이적지 남았구나!”
“예. 오늘 한 잔 맛이나 보고 내일 형님 가주가이소.”
“고맙다.”
17.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13)
이튿날 일곱 시에 출근하는 백찬씨의 차로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는데 차에서 내려 백찬씨를 보내고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아무 것도 없이 썰렁했다. 사무실에 물어보니 화장장 입료(入燎)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져 조금 전에 발인을 했다는 것이었다. 차도 없고 길도 몰라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섰는데
“저, 어르신!”
쉰 가까운 사내가 불러 바라보니 어딘가 비심이 있는 얼굴이기는 한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데
“저, 백찬이아재 형님 열찬이아재지요?”
절을 꾸뻑하는데
“그런데 자네는 누구지?”
“예. 버든에 조일댁, 그러니까 김구조카...”
“아, 니가 바로 정구형님 큰 아들이가?”
“예.”
“반갑다. 악수나 한번 하자.”
하고 찬찬이 뜯어보고
“형님비심이 있네. 형수도 좀 닮았고.”
하며 연산동시절 옳은 일자리도 없이 이웃처녀를 만나 덜렁 아이만 낳아놓고 초상화외판을 비롯해 온갖 일을 하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배가 고파 열찬씨를 찾아오면 1공구의 하나밖에 없는 식당 함흥식당에서 돼지국밥에 막걸리를 마시고 이빨을 쑤시며 돌아가던 정구형이 생각나 씁쓸해지면서
“너거 아부지 죽은 지 한 40년도 넘었겠네. 자네가 올해 몇이고?”
“예. 마흔 일곱입니더.”
“그래? 얼라 때 한두 번 안아 준 니를 여서 만나다니 참 세상이 좁다. 참 그런데 니는 여 우짠 일이고?”
“예. 찬우라고 막내상주가 내보다 두 살 많기는 하지만 제가 할배집에서 클 때 친구아잉교?”
“그렇구나.”
“어서 타이소. 제가 화장장까지 모실 게요.”
“고맙다.”
1t짜리 봉고차의 문을 열어주며
“죄송합니다. 이런 차로 모셔서.”
“무슨 소리. 태워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자네 아니면 우리 형님 마지막 가는 길도 못 봤을 걸.”
하고 출발했는데 길이 몹시 막혔다. 방어진의 동쪽바닷가를 점령한 현대자동차와 현대조선의 출근시간인 모양으로 달리는 통근버스도 그 안에서 내리는 사람도 모두 현대그룹의 H자 로고가 선명한 현대공화국이었다. 근 한 시간을 달려 창업주 정주영의 호를 딴 아산로를 들어서자 비로소 길이 좀 트이는 지라
“그래. 형수, 그러니까 너거 엄마는 잘 계시나?”
“예. 부산에서 그럭저럭 지냅니다.”
“몸은 건강하시고?”
“아닙니다. 젊을 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시난고난한답니다. 안 해본 장사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겠지.”
하는 열찬씨의 뇌리에 정구형이 죽은 뒤 아이들을 데리고 버든 본가에 들어온 6촌형수가 마침 교사발령을 받아 밀양으로 떠난 형수 김해댁의 뒤를 이어 아모레화장품의 외판원이 되어 마을을 돌던 일, 그러다 영순씨와 혼담이 오고가자 신부화장품 일습을 사달라고 연락이 온 일이 떠올랐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장사라고 나서기는 했지만 약간 얽은 데다 한쪽 눈길이 좀 이상한 얼굴로 화장품장사를 하는 것이 본인도 힘들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황당하고 애처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면서
“그래 자네는 지금 뭐 하는가?”
“예. 중장비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포클레인 한 대 사서 회사지입차주를 한단 말이지?”
“예. 잘 아시네요?”
“그래. 일감은 많은가?”
“그럭저럭 입니다. 일감이 많을 때도 있지만 일은 적은데 기름 값은 올라가 서울로 항의데모를 하러가는 날도 있고요.”
“그래도 열심히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너거 아부지나 우리가 젊은 시절에 비하면 살기는 엄청 나아졌으니까.”
하는 사이 화장장의 간판이 보여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아, 삼촌!”
하면서 용화, 용자 두 딸과 용우처가 반갑게 맞았다.
“다 끝나가나? 상주들은?”
“예. 저기.”
하며 산길 쪽을 가리키는데 거기 영정을 앞세운 찬우의 뒤에 용우가 유골함을 들고 홍근이와 강서방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미 모든 절차가 완료되어 산에 뼛가루를 뿌리는 산골(散骨)절차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89세를 살고 간 한 농부의 마지막이 겨우 아들 둘과 사위 둘과 조카하나의 호위로 딸 둘, 며느리 하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야흐로 대지의 아들로, 창공의 아들로 그 품에 뿌려지는 것이었다. 늦게 도착한 열찬씨와 정구형의 아들까지 딱 아홉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간해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려 하지도 않고 숙모 명촌댁의 말대로 억지로 편해도 편한 것이 제일 이던 한 소심한 농부였지만 나름대로 자존심도 있고 제 손에 들어온 것을 지키려는 욕심이랄까 집착도 강해 어쩌다 한 번씩
“종제!”
하고 일찬씨나 열찬씨에게 눈을 부라리면 그 조그만 체격이 마치 녹두장군처럼 위엄이 철철 넘쳐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집안의 내력으로 모든 사내들이 기관지가 약하고 알레르기가 심해 열찬씨도 해마다 송홧가루나 꽃가루가 날리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심한데 정찬씨는 특별히 더한 모양으로 열찬씨가 1킬로도 더 떨어진 진장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에에에 에이치!” 하고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며 긴 여운이 귓가를 맴돌았는데 어떤 때는 강 건너 중학교에서 수업중인 열찬씨의 귓가에 이명처럼 우우 들려오기까지 했다.
(형님, 잘 가이소. 버든동네도 없어지고 형수도 떠나갔지만 다 잊어뿌이소. 그래도 형님한테는 할 만큼 했다 아잉교?)
하는 순간 열찬씨가 집안족보를 주도할 때 뜻밖에도 제일 먼저 분담금 50만원을 내어놓으며 고생한다고 손을 잡아주던 모습이며 갱빈의 모래자갈을 쳐서 골재로 판다고 커다란 그물채를 지고 앞 새메를 지나가던 모습과 등 뒤에 잔설을 하얗게 뒤집어 쓴 신불산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한 사내의 일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삼촌, 오셨는가베요?”
이번에도 영정을 든 찬우를 앞세우고 네 상주가 다가오더니
“그래 고생했재? 좋은 데 갔을 끼다. 형님은.”
하고 큰 상주 용우의 손을 잡아주는데
“아재...”
눈이 벌겋게 충혈된 용우가 그 제서야 온갖 생각이 다 사무치는지 울먹울먹하면서
“우짜꼬? 삼촌 늦게 오셔서 아침도 못 잡샀을 낀데 술도 한 잔 못 하고...”
“마, 괜찮다.”
하고 마침 동그랗게 자신을 둘러싼 다섯 상주와 안 상주 셋에게
“동네도 뜯기고 형님도 안 계시고 인자 내가 너거 보기도 힘들겠구나? 그래도 너거 4남매가 어려서 엄마 잃고 고생하면서 살던 정을 생각해서 자주 찾아보고 살아라.”
하는데 훅! 막내딸 용자가 울음을 참느라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신호로 질부와 용화의 눈에도 물기가 번졌다.
“언양에 작은 아버지도 벌써 80이 넘었으니 살아생전에 가끔 찾아보고 집안행사는 언양 홍근이가 연락하면 모이고.”
“예.”
여럿이 대답을 마치자
“인자 나는 갈란다. 우짜든동 너거도 잘 지내거라.”
하고 아까의 봉고차에 올라타는데
“삼촌!”
자동차문을 열며 큰 상주 용우가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기 뭐꼬? 내가 아직 이런 봉투 받을 만큼 영감은 아인데.”
“아입니더. 인자 집안에 어른도 별로 없는데 머리 허연 삼촌 혼자 고생을 해서...”
기어이 봉투를 밀어 넣고 문을 닫더니 한 줄로 주욱 서서 절을 했다.
서울의 가화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산의 영서동생이 태어났다. 하마 산달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아도 영서 때부터 배가 많이 부르거나 어디가 안 좋거나 불편한 일도 없이 씩씩하게 법인정리의 마무리절차를 밟느라고 부지런히 잘 돌아다니다 어느 날 오후 퇴근길에 산기를 느껴 집 앞인 망미동의 어느 산부인과에 입원절차를 밟고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별다른 진통도 없이 순산한 것이었다. 무려 8년만의 출산인데도.
“허허, 그 참 누굴 닮아서 저리 순풍, 순풍인지 모르겠네.”
산모인 슬비를 낳던 날 연산3동 전셋집에서 네 방구석을 기며 내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고 진땀을 흘리는 영순씨를 보고 저러다가 아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이는 둘째 치고 산모라도 별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입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던 생각이 났다. 그 때 어느 순간 방안에서 으앙! 아이우는 소리가 들리면서 서 아랫집 남이할머니와 엄마가
“야, 살림밑천 첫딸이구나!”
하면서도 아무리 남편이라도 여자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며 안 된다고 더운 물로 아이와 어른을 씻기고 머리를 감겨 옷까지 갈아입히고서야
“걱정 많았지요. 이제 아이아빠 들어오세요.”
하고 문을 열어주던 기억이 생생했다.
“아버님, 애기 구경하실랍니까?”
명색 외아들이자 사실상 집안의 종손역할을 하는 사람이 연거푸 딸을 낳아도 뭣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사위 도연씨가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신생아실로 안내하는데
“저기 가운데 머리숱이 제일 검고 코가 우뚝한 아이가 우리 애기랍니다.”
아직 빨간 피부가 다 펴지지도 않고 눈도 채 못 뜨는 핏덩어리 같은 신생아 여남은 명이 담긴 아기바구니중의 하나를 지목했다.
“그래. 이번엔 자네를 닮은 것 같네. 축하하네.”
얼핏 지난 번 영서를 낳을 때 하고는 분위기가 달라 어쩜 제 친가 쪽의 쌍꺼풀이 진 크고 하얀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예쁜 손녀가 드디어 하나 나오는가 싶어
“경사났네! 경사났어.”
저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지는데
“축하하요. 이번에는 불량씨앗책임으로 성형견적을 안 내도 되겠네요.”
영순씨가 옆구리를 지르며 웃었다.
“고생했제?”
병실로 슬비를 찾아가 영순씨가 의 머리에 땀을 닦아주고 열찬씨도 손을 잡아주는데
“아니요. 뭐 우물쭈물하다 보니까 금방.”
산모가 빙그레 웃었다. 미처 침상에 올라갈 틈도 없이 첫아이 영서를 엉겁결에 낳고 나중에
“아이를 가져서 고생하거나 키운다고 돈 들어가는 일만 없이 그저 낳기만 한다면 한 여남 명도 일없이 낳을 것 같아.”
철없는 산모를 보며
(그래 세상에서 아이 낳은 것이 젤 쉽단 말이지.)
하면서 속으로 웃던 생각이 났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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