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물만골의 으뜸 농부(1)
양력 새해는 만두가게 매상액에 따라 일희일비를 거듭하다 어린 현서가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보며 마음이 풀리곤 했다. 그 북새통에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벌어졌는데 여덟 살이나 많은 영서가 제 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혼자 자라며 어미애비로부터의 사랑은 물론 좀 극성맞을 정도로 자식 일에 집착하는 영순씨의 관심을 독차지 하다 이제 별 관심을 받지 못 하니 갑자기 사막에라도 혼자 버려진 느낌인 것 같았다.
보다 못 한 열찬씨가 어린이놀이터라도 가자, 오는 길에 마트에서 과자를 사주겠다고 해도 이젠 이미 과자로 꾈 아이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엄마아빠는 물론 영순씨가 신경을 좀 더 써주기로 하고 영순씨가 김치볶음을 해 주거나 시장에서 순대나 떡볶이를 사다 먹이고 목욕탕에 가서 놀아주는 동안 열찬씨가 대신 영서를 돌보기로 했다. 아이에게 관심이나 애정은 많지만 동작이 민첩하거나 부드럽지 못 해 평소에 아이를 잘 안 맡기던 영순씨도
“자, 현서야. 할아버지랑 바깥구경 좀 하고 올래?”
하며 두꺼운 점퍼에 털모자를 씌우고 또 위에 이불을 덮고 비닐커버가 된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주면 열찬씨가 선경아파트정 옆문을 나와 골목길을 한참 걸어 한가한 노인데들이 볕을 쬐거나 운동기구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는 망미고가도로 밑으로 쭉 걸어 지하철망미역에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로 천천히 걸으면 약 한 시간이 걸려 영순씨가 영서를 돌보면서도 집안청소를 한다든지 저녁준비를 하는 말미를 주었다.
그렇게 첩첩이 덮어씌우고 다니는데도 길가는 사람들, 특히 나이든 아주머니나 운동하는 노파들이 손바닥만 한 비닐덮개 사이로 아이얼굴을 훔쳐보고
“아이구, 그 아아가 참 예쁘기도 하다. 누굴 닮아 이래 예쁜 아기가 나왔노?”
하며 머리가 허연 열찬씨를 올려다보는 것이 할아버지와는 영 딴판이로구나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무참하면서도
“그렇지요? 우리 알라가 새첩기는 참 새첩지요?”
자식자랑도 마누라자랑도 아닌 외손녀자랑에 열을 올리는 열찬씨를 다시 쳐다보기도 했다. 한번은 현서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를 태운 삼십대 후반의 사내 하나가
“아이구, 우리 아름이친구 왔네. 안녕! 하고 인사해.”
하면서 유모차를 나란히 대고 얼굴을 마주보게 하자 저쪽 아이는 방긋 웃는데 현서는 도무지 표정이 없었다.
“예쁘게 생겼는데 왜 표정이 없지? 얼음공주를 닮았는가?”
하다 열찬씨와 눈이 마주치자
“몇 달 되었어요?”
“9개월.”
“우리 아이는 10개월 되었어요. 일어서서 걸음마를 배우는가요?”
“아니. 애가 좀 늦은 편이라 이제 벽을 잡고 서는구먼.”
“재는 혼자 일어서서 걸음을 뗀다고 난리지요.”
하고 종종 골목길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일부러 맞춰 나온 듯 고가도로 밑에서 만나 한참이나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림=서상균 화백]
개업 날을 시작으로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해 일일매상이 손익분기점인 50만 원을 밑도는 일이 잦아진 1월 하순경에는 도연씨와 슬비씨는 물론 종업원 영신씨까지 얼굴이 어두워 서로가 쳐다보기나 말을 붙이기도 힘이 들었고 비교적 대범한 성격의 슬비도
“야, 장사란 게 정말 장난이 아니네. 길가는 사람 걸음걸이 하나하나 표정하나하나 눈빛하나하나를 우리 만두가게에 올 사람인지 아닌지로 보게 되니 말이야. 그래서 옛날부터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했는가?”
했고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면 영순씨가
“장사는 좀?”
“그럭저럭.”
선문답처럼 넘어가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특별한 고생 없이 자란 저 아이가 이 고비를 어찌 넘기랴 영순씨의 걱정이 가득한데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우리 슬비를 보면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부드럽고 주변사람들의 사랑이나 호응을 받아 구비구비 잘 넘어가는 편이야. 이번에도 아주 잘 넘어갈 거야.”
열찬씨가 말하면
“당신 말대로만 되면 얼매나 좋겠소?”
하며 영순씨가 반신반의했지만 개업한지 보름이 지나고 20일이 넘어가면서 슬비씨의 얼굴이 좀 펴졌다. 매상이 연속 5,60만 원을 찍고 7,80만 원이 되는 날도 있었지만 대동병원의 간호사나 직원, 인근 사무실의 여직원 등 이미 낯이 익은 단골이 생기고 특히 입맛이 까다로운 중년의 주부들이
“이 집은 언제 봐도 깨끗해서 믿음이 가. 만두 맛도 좋고.”
하면서 가끔 들러 안면이 익기도 한데 그 중에는 멀리 해운대나 구포, 화명동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고 또 시내나 서면, 구서동, 부산대학 앞에서 지하철1호선을 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개업을 하고 한 일주일 뒤를 봐준 뒤에 회사를 나가겠다는 슬비씨의 계획을 실천한 엄두를 못 내는 것이었다. 회사에 나가 월급을 받으면 종업원인 영신씨의 월급 두 배가 넘으니까 종업원 하나를 더 쓴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지만 문제는 남편 도연씨가 가게를 책임지고 운영할 자세를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내일이 장사를 전망해서 전날 만두소나 찐빵앙꼬를 얼마나 주문하고 당일 오전에 몇 개씩이나 만들어 미리 쪄놓는다든지 도무지 무얼 자신이 알아서 판단할 생각을 않고
“슬비야, 오늘은 얼마를 시키지?”
“김치만두는 몇 개나 만들까?”
사사건건 물어보다 저녁이 되면
“색시야, 몇 시쯤 마치면 될까?”
일일이 물어볼 뿐 도무지 무엇 하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짓는 법이 없었다. 아내인 슬비씨보다도 장인인 열찬씨가 그 점이 늘 아쉬워
“사내자식이 강단이 없어.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보다도 사내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믿음을 주고 또 위기를 만났을 때 의연하게 치고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저 사람은 당최 자기결단이 없어. 저렇게 매사에 연약하고 망설이기만 해서야...”
하고 혀를 끌끌 차면
“강해도 엔간히 강해야지. 당신같이 강한 남편 밑에서 한 평생을 산다고 내가 얼마나 골병이 들었겠소? 당신보다 훨씬 돈 잘 버는 남편들도 부드럽기만 하던데?”
하다가도
“하긴 위기 때마다 눈 하나 깜빡 않고 밀어붙이는 데는 당신만 한 사람이 없지. 본가 7남매, 처가 5남매 일을 하나같이 아무 망설임 없이 밀어붙인 것도 그렇지만 돈 한 푼 준비 없이 두 아이 대학을 시키고 시집장가를 보낸 배짱도 그렇고.”
하다가는 다시
“우리 김 서방이 아버지는 몸이 아프고 어머니는 회사에 가고 어린 동생 데리고 외숙모나 시장골목사람들 눈치 보며 자랐으니 오죽하랴? 이제부터라도 당신이 친아들처럼 잘 토닥거리며 가르치지.”
했지만 그게 가르칠 일도 아니고 당사자 김서방이 장인을 너무 두려워하는 바람에 서로 살갑게 대할 형편도 아니었다.
비로소 궤도에 올랐나 싶던 장사가 음력설 대목이 되지 다시 주춤거리자
“<아, 옛날이여>란 이선희의 노래가 다 생각이 나네. 지금쯤이면 거래처사람들이 인사하러 들어와 저녁에 코가 비틀어지게 한잔을 사고도 봉투를 주고 상품권을 주고, 또 법인카드를 들고 원청회사직원들 접대를 나가고.”
“그럼 시제품 운동화를 또 여러 켤레 가지고 나와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도 주고 말이야.”
두 내외가 회상에 젖다
“슬비야, 니는 우짤낀데?”
김 서방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뭘 우짜기는?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직장에 가면 장사가 제대로 되겠나? 당신은 내일 만두소와 앙꼬를 얼마나 주문하고 밀가루와 단무지, 간장은 또 얼마나 주문해야 될지 도무지 생각도 한 해보는 처지에.”
“...”
“한 달만 연기해 달랬는데 설 쇠고 못 나가면 안 간다고 연락을 해야지. 당신이 개업할 때 며칠만 도와달라고 했을 때 내가 냉정하게 잘라야 했는데 그걸 못 하는 바람에 아버지 말대로 평생 빵집마누라로 살게 되었네.”
“...”
“하긴 당신에게만 맡겨서 될 일도 아니고.”
“고맙다. 색시야.”
“...”
설날 이틀 전에 내려온 정석씨 내외를 위해 만두와 찐빵을 가득히 들고 와 쪄내자
“야, 맛있다. 장사 잘 되겠는데요.”
상미씨가 부지런히 먹어대자 영순씨 품에 안긴 가화도 오물오물 잘도 먹었다. 현서보다 두 달이 빨라 대보름 깨가 첫돌인 가화는 아이가 올백이라 벌써 걷는 정도가 아니라 뛰어다닐 정도였고 키도 컸다.
그런데 제 매형과 소주잔을 간간히 마주치는 정석씨는 만두하나를 찢어놓고 그냥 먹는 시늉만 하는 것이 열찬씨가 그랬듯이 제 누이가 만두장사가 된 것이 뭔가 탐탁찮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열찬씨까지 동석한 술자리가 만만치 않은지 술이 반쯤 오른 정석씨가
“자형, 곱창 집에 가서 한잔 더 합시다. 내가 한 잔 살께.”
“무슨 소리. 우리 남편이 사지. 도연씨는 이제 만두가게 사장이 아니야?”
저도 한잔 한 슬비씨가 열찬씨를 바라보며
“아빠도 같이 가실래요?”
하는 순간 퍼뜩 눈을 맞추는 영순씨를 보며
“나는 좀 피로 하네. 우리는 아이 셋을 볼 테니 너희 넷이 갔다 와라.”
하고 내 보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