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잎이 숟가락보다도 작지만 이미 완전히 활착한 배추모종이 2,3일 만에 올라가면 아기 손바닥만 하다가 다시 며칠 뒤면 어른손바닥만큼 잘도 자랐다. 김장무도 쑥쑥 키가 크면서 잎이 벌어 밭고랑에 빽빽하게 들어차 추석이면 일부를 솎아 <포랑나물>을 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김장에 쓸 대파와 갓도 싱싱하게 잘 자랐고 쪽파도 싹이 터 추석에 생 조리개를 만들어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진도가 좋은 것은 마늘을 뽑은 자리에 심은 들깨였다. 열찬씨가 인터넷인가 어디에선가 들깨들 드문드문 심으면 모종하나가 굵기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키가 2미터가 넘으며 무성하게 벋은 가지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어 많게는 나무하나에 한 홉 가까이 수확한다는 것을 알고 아주 드문드문 심은 데다 마늘이 흡수하고 난 영양분이 남았는지 더 많은 잔가지를 촉발시켜 꽃을 피게 하려고 낫을 들고 들어가 순을 치는 열찬씨의 모습이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크, 들깨도 대박이겠네. 내 세상에 소나무보다 큰 들깨를 본 적도 없지만 나중에 이 많은 들깨를 우째 다 털고 디루고 지고 내려갈꼬?”
위에 밭의 이호열씨가 통장님과 윤병균씨에게 걱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와중에 찜찜한 사고가 하나 터졌는데 어느 날 밭에 올라가니 먼저 와 있던 교장선생이
“가국장! 당신 왜 내 거름 가져갔어?”
교장선생이 천둥치듯 고함을 질러
“거름요? 제가 제 거름 천지로 두고 교장선생님 거름을 왜요?”
하며 오각정 뒤로 돌아가
“여덟 포대 그래도 있네요. 지난 번 열 개 사서 김장 심을 때 두 포 쓰고?”
“무슨 소리? 나는 우리 거름을 쓴 일이 없는데?”
“예에?”
“좌우간 나는 거름을 쓴 일이 없다니까?”
“예에?”
전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가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적이 있어 오늘 정신이 없는가 싶다 하는데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 말을 무시한단 말인가? 교장선생까지 지낸 저 양반이 안 썼다면 안 쓴 거지.”
새파라동동한 표정의 사모가 나서더니
“내 그래 안 봤는데 젊은 사람이 등치고 간 내먹네. 세상에 그 비싼 돈 주고 거름을 사라고 하고는 몰래 훔쳐 가면 우째한단 말이고?”
“예에? 그때 배추 골 탈 때 제가 교장선생님 하고 사모님보는 데서 거름 두 포대 썼다 아입니까?”
“몰라. 나는 기억이 안 나고 교장선생님이 안 썼다면 안 쓴 거지. 당신은 세상에 교육자가 거짓말 하는 것 봤어?”
“예에?”
“사람이 그렇게 겉과 속이 달라서 어떻게 같은 밭에서 농사를 짓겠노?”
“당장 거름이고 무배추고 다 지고 우리 밭에서 나가소!”
그 심청궂은 얼굴에 입을 앙다물었다.
“예에?”
기가 찬 열찬씨가 멍하니 하늘을 보는데
“교장선생님, 그건 내가 옆에서 봐서 아는데 지난번 배추 심을 때 교장선생님 거름 두 포대 쓴 기 맞습니다.”
위의 밭에서 듣다 기가 찬 윤병균씨가 내려와 간곡하게 말하자
“뭐라? 당신이 뭘 안 다고 나이 많은 사람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
“교장선생님보다는 나이 적지만 나도 겨우 세살 적은 일흔여덟이요. 그라고 입은 째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답답해서 펄펄 뛰지 교장선생이 멈칫하는데
“이 준달 없는 양반아, 당신은 뭐 때문에 남의 일에 나서는데? 옳지 만날 같이 술 먹더니 한 통속이 되었단 말이지.”
“아이구, 답답어라!”
평소에 심장이 약한 윤병균씨가 그늘에 쪼그려 앉아 숨을 헐떡거리는데
“교장선생님!”
얼굴이 시뻘개져 들이닥치는 이호열씨를 밀어내고
“제가 보기에도 말입니다. 우리 가국장이 남의 것 손댈 사람도 아니지만 전부터 닭똥이고 소똥이고 자기 거름 가져올 때 꼭 교장선생님도 한두 포 드리고 또 요번 농협거름도 그 힘든 골짝 길을 자기가 지게로 져다준 거름을 손댈 일이 뭐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겨우 한 살 적고 만사 경우가 바르고 점잖은 통장님이 나서자
“그건 그렇지. 그렇지만 내가 거름을 쓴 일이 없거든.”
평소 통장님만은 어렵게 대하는 지라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데
“아니, 통장님은 그럼 우리 관수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 나이 든 분이 깜빡 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넘 걱정 하지 말고 자기 정신이나 채리소. 남의 땅에 원두막이나 짓는 사람이?”
이번에는 통장님의 원두막을 꼬투리 잡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 동래읍의 구둣방을 그만두고 구서동으로 이사 온지 오래된 통장님은 교장선생이 퇴직하고 물망골로 올라오기 이전부터 산기슭의 허술한 땅을 쪼아 농사를 지으며 통장님의 누님과 잘 지냈는데 교장선생이 올라와서 밭을 빼앗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장님집으로 배달증명 하나를 보낸 것이었다.
내용인즉 지금 통장님이 짓는 밭의 일부가 자기명의의 땅을 무단으로 점용한 것이니 당장 작물을 뽑고 철수하는 것은 물론 그간 무단으로 사용한 사용료 5년 치를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놀란 통장님이 과일상자를 들고 교장선생의 복천동집으로 찾아가 통사정을 하고 수습을 한 뒤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거들며 여태껏 지내온 것인데 사태가 불리하자 5년 가까이 잘 지낸 원두막 여태까지 교장선생 자신이 국수를 얻어먹으러 와서 앉았던 오두막을 시빗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세상에 폭군이 따로 없네. 이게 뭐 조선시대 지주도 아이고?”
이번엔 이호열씨가 나서자
“당신은 시방 무슨 소리요? 왜 다 떨어진 삼베바지에 거시기 볼가지듯 튀어나온단 말이요?”
교장선생이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데
“세상에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명색 교육자가 체면이 있고 양심이 있어야지 사람 좋은 이 국장에게 일은 일대로 시켜 묵고 밥은 밥대로 얻어 묵고 거름은 거름대로 받아 묵고 도로 거름도둑으로 몰다니 그게 교육자, 아니 사람이 할 일이요?”
“보소? 당신 말 다 했소? 우리내외가 늙었다고 하는 말인데 당신 시방 한 말 책임질 수 있소? 이래 봐도 우리 아들 하나는 대학교수고 하나는 의학박사고 또 하나는 회계산데 당신이 내 아들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요?”
사모가 나서 이를 앙다물고 쳐다보더니
“아이구, 관수야!”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그래 잘 됐다. 이름이 관수면 박관수 교수네. 동해대학교 영문과 박관수 교수겠네. 내 그 양반을 만나서 당신 아버지엄마가 시방 물망골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보다도 더 포악한 행패를, 지주행세를 하며 소작인의 등골을 뺀다고 그간의 행적을 일일이 까발리고 신문에 댄다고 할까? 대학교수 얼굴을 똥태망태로 맨들까요?”
하자 두 내외의 표정이 금방 멈칫하며
“아니 늙은 사람이 우짜다가 정신없는 경우도 있지.”
하며 통장님의 눈치를 살피더니
“찔레아빠는 말도 잠 청산유수네. 변호사 집안인가?”
멋쩍게 웃던 사모가
“와이라노? 우리 밭에 뭐 구경거리 났나?”
벼락같이 또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울타리 밖으로 금정구청 박씨와 저 아래쪽 정씨 문중의 경작자 서넛과 길가던 등산객 몇 명까지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구경꾼들도 돌아가고 통장님, 이호열씨와 윤병균씨, 최여사와 김여사도 줄레줄레 원두막으로 올라가자
“보소! 이 핀은 저 원두막 언제까지 두고 볼 거요?”
이번엔 영감을 보고 빽 고함을 질렀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자
“보소. 그건 당신이 잘못했네.”
영순씨의 말에
“뭐라고? 내가 뭐를?”
“교장선생님이 의심할 짓을 안 해야지.”
“그게 무슨 말인데?”
“내가 그 때 옆에 거름을 나란히 쌓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 우리 것은 저 안쪽 소나무 밑에 쌓고 덮자고 안 했나?”
“아이구, 이 양반아, 그 때 내 혼자 져 올린다고 숨이 들숨날숨하자 당신이 그건 나중에 하자 안 캤나?”
“그렇지. 그러면 그 이튿날이라도 당장에 해야지.”
“...”
기가 차서 한참을 생각하던 열찬씨가
“당신은 참 머리도 좋네. 교장선생이 잘못한 것은 열두 가지라도 모두 덮고 내가 쪼깨 잘못한 것은 우째 그래 귀신처럼 잘 찾아내노?”
“그러니까 사람이 만사에 조심을 해야지.”
“그 말이 아니고 당신은 책임이 없단 말 아이가? 우짜다가 문제가 생기면 매사 당신은 잘못이 없고 모든 잘못은 언제나 이 이열찬이 몫이고.”
“꼭 그렇다기보다는 당신의 일처리가 야무치지 못 하고 늘 행동이 덜렁거리니까 그러지.”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당신 밥을 굶겼나? 그런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뭐 해준 게 있다고?”
“와? 또 나한테 평생 돈 안 벌고 앉아서 얻어먹었다고 그라나? 그렇지만 나도 할 만큼 했다.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뭐라꼬?”
갑자기 부부싸움으로 비화될 판이었다.
“내가 하는 말은...”
열찬씨가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는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당신이 내가 거름을 옮겨쌓지 않은 것을 이유로 나를 몰아붙이는데 그 사소한 이유, 너무 힘이 들어 당장 할 수도 없었고 그 이후로 그리 다급한 일도 아닌 그 일을 당신이 그러면 좋겠다고 말을 한마디 한 것으로 책임이 없고 나는 그걸 안 해서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발상, 그런 이유를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잘 찾아내는지 나는 그게 신기하단 말이야.”
“....”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 그리 내 잘못을 잘도 찾아내는지, 그래서 일단 나부터 한번 공격해서 기를 죽이는지 말이야.”
“당신 지금 무슨 말 할라 카는데?”
“그래서 매사 당신은 책임이 없고 나만 죽일 놈으로 만드느냔 말이지. 어디서 그런 비상한 재주와 순발력이 나오는지.”
“무슨 소리? 당신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잠을 못 자고 몸서리를 치며 내가 겉으로 말은 안 해도 몇 며칠을 혼자 고민하고 앓아누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것도 아니면 부부가? 그렇지만 속으로만 걱정하고 겉으로는 늘 모르는 척 아니면 첫 마디로 내 잘못을 지적하여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리고 자신은 절대로 책임이 없다는 표정으로 더는 말을 안 하는 당신을...”
“내가 오죽 답답하면 입을 다물겠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남편이 설령 살인죄를 저지르고 들어와도 일단 남편을 위로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믿고 상대방을 같이 공격도 해주고 하는 거지. 우째 악질이든 독질이든 상대방은 다 일리가 있고 결국은 못난 남편이 잘못이란 말인가?”
(...)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공직이든 문학적 성취든 이만큼이라도 이룬 것이 누가 봐도 현모양처인 당신의 뒤받침이 컸겠지. 그러나 그건 너무나 상식적인 행위로 돈이든 명예든 같이 누린 것인데 비해 나는 내 아내가 늘 아쉬웠어. 그게 뭐 돈이든 뭐든 현실적 도움이 아니라 무슨 일만 생기면 늘 남편을 못 믿어 불안해하고 조그만 잘못 만 범하면 죽일 듯이 화를 내면서 치명적 공격을 하고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는 듯 쏙 빠져버리는 일, 그 너무나 까칠한 결백주의, 심지어 부부간에도 같이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자신만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듯이 한 걸음 물러서서 남편만 원망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더란 말이지.”
“...”
“나보다 열심이지도 않고 머리가 좋지도 않고 아이디어가 없는 남편의 출세를 위해 조선천지에 자기 남편만 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여자, 골목의원의사인 남편을 꼭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면서 내 아내가 나에게 한번이라도 동장님이라고 부르고 사무관님, 시인님이라고 불러주면 얼마나 좋겠나는 것이 내 평생의 아쉬움이었지. 내가 동장이 되면 당신은 동장이 되어 기쁘기보다 동장으로서 작은 실수나 할까봐 걱정부터 하다 작은 미스라도 하나 발견하면 바로 죽일 듯이 공격을 하며 자신은 뒤로 쏙 빠지는 거였지.”
“시방 무슨 소리를 또 할라카는데?”
“만약 당신이 나를 보고 매사 잘 한다 잘 한다 캤으면 가진 것 없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힘 하나로 살아가는 내가 얼마나 더 용기를 내고 자신감이 붙었을까, 어쩌면 한두 계급은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다 들기도 했어.”
“택도 없는 소리! 내가 한 번씩 태클을 걸지 않으면 당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다가 단번에 추락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 했을 거야. 무모하지 정교하지 못하고 어설프지, 게다가 남의 눈치나 기분도 살필지도 모르고 오로지 자기 생각, 자기 아이디어만 믿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말을 모두 다 믿고 조그만 사태가 불리하면 모두들 배신을 때리는 그 배신이란 배신은 모두 다 당하고...”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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