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92)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21장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1)

이득수 승인 2024.10.15 16:28 | 최종 수정 2024.11.20 11:47 의견 0

21. 교장선생의 욕심과 의심치매(1)

들깨를 베어낸 자리에 마늘을 심고 양파를 심으니 어느 듯 가을의 막바지 11월이 되어있었다. 교장선생님과 통장님, 윤병균씨와 이호열씨도 열찬씨가 준 마늘을 종자로 제가끔 마늘풍년의 꿈을 심었는데 열찬씨가 석회를 사다 뿌리자 같이 석회를 뿌리고 추석날 언양의 종묘상을 지나가다 본 <마늘양파 한방에>라는 맞춤형비료를 사다 뿌리니 저들도 부리겠다고 해서 원가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말이 11월지 남도의 가을은 아직 따뜻하고 누렇게 물드는 둔덕과 도랑가의 풀 섶엔 여전히 메뚜기와 풀무치, 방아개비와 때때가 튀어 올랐다. 이제 밭에 남은 작물은 한창 뿌리가 들고 속이 차기 시작하는 무, 배추와 제법 푸릇한 쪽파와 마악 싹이 돋아나는 마늘양파뿐이고 밭둑에 얼크러진 호박넝쿨뿐이었다. 열찬씨가 애호박된장찌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먹기보다는 호박잎을 뒤지고 찾아내는 재미와 자신보다는 이웃이나 형제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영순씨가 그렇게 알뜰히 따내었음에도 불구 무서리가 내려 호박잎이 시들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노란 호박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노란 황금빛으로 코스모스나 아이들 꽃핀처럼 8각형 또는 12각형의 원형에 가까운 맵시 좋고 납작한 맷돌호박도 있었지만 표면이 시퍼러둥둥하고 우둘투둘하고 모양마자 위로 붕긋해 커다란 주전자의 몸체처럼 생긴 못난이호박도 더러 불거졌다. 무려 20여개의 호박을 수확해서 먹을 사람도 없고 다른 밭작물을 감아 올라 피해를 입힌다고 아예 호박을 심지 않은 통장님과 이호열, 윤병균씨에게 맵시 좋은 놈 하나씩을 안기고 교장선생님도 크고 작은 것 세 개를 산복도로에 주차한 자동차까지 운반해 실어주었다. 때마침 심심해서 바람도 쐴 겸 혼자 올라온 영신씨가

“우리 형부는 타고난 농사꾼이야. 이렇게 크고 잘 생긴 호박은 진주의 우리 시어머니도 못 길러낼 거야.”

하고 감탄해

“처제도 골라 봐. 형부가 크게 줄 거는 없어도 호박이나 좀 줄 테니 호박전도 굽고 호박죽도 끓여 우리 황서방하고 사이좋게 먹게.”

했더니

“요 노란 것 하나는 호박전을 해먹고 또 큰 것 하나는 문갑위에 장식용으로 놓고 그리고 저 시피렇고 못 생긴 호박은 맛이 어떤지 궁금하고...”

하면서 세 개나 골라놓고는 좀 멋쩍은 표정이라

“그 까짓 것, 형부가 사랑하는 우리 처제 실비아에게 그 정도를 못 주랴?”

하고 지게에 지고 내려가 처제의 차에 실어놓고 오는데

“어이, 이국장!”

이호열씨의 막걸리냄새가 폴폴 풍기는 목소리를 듣고

“그래, 술 잘 먹는 이태백이 술 먹자고 날 불렀소?”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올라가자

“이건 말이야, 우리 김여사님, 최여사님이 꼭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묵고지비 이호열이가 술안주생각이 나서 그런데...”

불콰한 얼굴로 씨익 웃는데 코끝에 몇 개의 붉은 점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직 칠십이 되기 전인데 벌써 딸기코가 생기면

평생을 엔간히 마셨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뭔가 좀 위태롭다는 신호가 아닌가 하고

“우리 사이에 무슨 사설이 그리 기요? 용건이 뭔데요?”

하자

“사실 저 시퍼런 못난이호박 말이야. 겉보기는 저래도 속을 파내면 눈부신 황금빛 속살이 나타나고 그걸 또 전으로 구우면 그 맛이...”

하고는 막걸리 잔을 들이붓는데

“술안주로 제 격이란 말이지요. 알았어요.”

하고 제법 큰 놈 하나를 가져와 최여사가 배를 가르고 씨를 발라내니 그야말로 주황빛의 속살이 눈에 부셨다. 채칼로 긁어 전을 부치지 달콤하고 고소한 맛은 둘째고 무엇보다 그 빛깔이 황홀했다.

“저무는 늦가을에 황금빛 호박전에 넉넉한 막걸리파티라 같이 늙어가는 순한 이웃도 더욱 정답고, 참으로 황홀한 가을의 작은 소연(小宴)이라.”

“얼씨구!”

하며 주고받는데 영순씨가

“아이고 고소해라. 저 밑까지 냄새가 진동하는데 지쪽 길로 지나가는 등산객들을 우리가 고문하는 것 아닐까?”

하면서 5각정 창고 안에 넣어두었던 시원소주 한 병을 들고 올라왔다.

호박전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불콰하고 넉넉한 표정으로 골짜기를 내려오는데 삽과 낫을 챙겨 거름을 쌓아놓은 소나무 밑 고무 통에 넣던 열찬씨가

“어이쿠!”

기겁을 하자

“와요? 뱀이라도 나왔어요?”

영순씨가 다가오는데

“아니. 이 호박 좀 보아. 이게 호박인지 초식공룡이 누고 간 똥무더긴지?”

열찬씨가 가리키는 순간

“아이구야!”

영순씨도 탄성을 질렀다. 평소 눈길이 잘 안가는 나무그늘에 장정의 한 아름도 넘은 엄청난 호박이 하나 널브러져 있었다. 지름이 6,70센티가 넘고 두께도 한 30센티도 되어보였다. 낫으로 꼭지를 베고 굴려보니 묵직하게 구르는데 한참이나 걸리는 것 같아

“좁쌀 백 바퀴를 돌리는 것 보다 호박 한 바퀴를 돌리는 게 낫다는 농담이 헛말이 아니네.”

하고 잡아당겨 등에 매려는데 20킬로 짜리비료포대보다도 훨씬 무거워 아무래도 30킬로는 넘을 것 같았다. 간신히 둘러매고 도랑 옆으로 난 울퉁불퉁한 길을 한참이나 더듬어 내려가자 소나무그늘의 바위 턱에 앉아 쉬던 통장님이

“야, 크다! 호박을 딴 거야, 묏돼지를 잡아 오는 거야?”

하는 순간

“어이, 이국장.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이호열씨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는데

“그 무슨 말씀? 남의 경사에 초를 치시네.”

열찬씨가 호박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는데 톡톡 주먹으로 호박을 두들겨보던 이호열씨가

“들었어. 호박씨보다도 더 많은 구데기가 들었어.”

하며 웃는데

“어이, 이 대위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호박떡 잘 얻어먹고 초치는 소리하면 도로 중위로 강등이야!”

과묵한 윤병균씨도 한마디 거드는데

“가국장, 집에 가자말자 한번 배를 타보소. 전에 충청도 처가에 우리 처남이 저것보다 더 큰 걸 따서 기뻐했는데 흥부네 박처럼 금은보화가 한 아름 나온 것이 아니라 고물고물 구더기가 나왔어. 아주 한 바가지도 넘게.”

하자

“설마!”

하면서 영순씨 얼굴에 그늘이 졌다. 집에 도착하자말자 호박을 쪼개는데 나무 크고 두꺼워 칼날이 잘 안 들어가자 마치 푸줏간처럼 주방용 숫돌로 쓱쓱 칼을 간 영순씨가 식탁위에 얹힌 호박을 두 쪽으로 가르더니

“아!”

탄식을 지르며 칼을 던져버렸다.

“아깝네. 이걸로 호박전을 붙이면 119동 60세대가 다 먹을 것인데.”

열찬씨가 혀를 차는데

“보소!”

“와? 호박에 구더기 인 것도 내 잘못인가?”

“그 기 아이고 어서 갖다 버리소.”

“버리다니? 이걸 음식물쓰레기로 버리면 돈도 엄청나지만 통이 막힐 텐데.”

“그래도 할 수 없지.”

“아니야. 장모님께 연락해 봐. 속만 긁어내면 먹을 수 있는지.”

“싫어요. 먹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먹는다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그런가? 그럼 부엌 삽 좀 들고 따라오소.”

하고 아파트 뒤 언덕 낙엽이 푹신한데다 경비원들이 은행잎과 벚꽃 잎을 쓸어다 묻은 자리를 파고 묻었다.

이튿날 밭에 올라가니

“어때? 벌레 나왔지?”

“예. 말도 마소.”

하는데

“그래 우쨌소?”

“땅 파고 묻었지요.”

“아니, 그게 아닌데.”

이호열씨가 정색을 하더니

“원래 곡식이나 농작물은 짐승이나 곤충이랑 나눠먹는 법, 우리 처가에선 속을 걷어내고 깨끗이 씻어 호박전을 붙여 스물다섯 집 온 마을이 먹었대.”

“...”


11월 말이 되자 아직도 포근한 날씨였지만 물망골에서는 벌써 무, 배추를 수확하느라고 한창이었다. 늘 시간은 남아도는데다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 오늘 날 새면 무얼 할까 일거리를 찾다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밭으로 올라가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또 다른 노인이 뒤질 새라 달려드니 물망골엔 보통사람들의 농사달력을 근 보름이나 한 20일은 앞당겨야 될 판이었다. 남에게 뒤지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영순씨가

“보소! 우리는 무, 배추 언제 뽑을 기요?”

조바심을 내면

“뭐, 아직 날씨 푸근한데. 당신도 날씨 더울 때 김장하면 김치가 빨리 무른다고 걱정하면서 와 그래 깝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하니 그렇지. 저 양반들도 다 당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데 말이야.”

“노인네들이 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내 언양 촌놈으로 언양보다 훨씬 뜨신 부산날씨에 배추 얼리겠나?”

“그래도 마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면 실수도 적고 심관도 편할 텐데.”

“내가 어데 눈먼 송아지가? 아무 생각도 없이 요롱소리만 듣고 따라 다니게.”

“아따, 또 그 놈의 언양농고 수석졸업에 교육감상 삽 한 자루 탄 이야기 나올랑갑다.”

“...”

“좌우지간 고집부리다가 무시라도 얼면 죽는 줄 아소.”

“무배추도 생명체라 영하1,2도쯤은 자체적으로 견뎌내고 적어도 영하 4,5도는 되어야 어는데 부산날씨에 그럴 일이 있나?”

하고 그 사이에 부엽토를 긁어오기로 하고 마대를 여남은 장 찾아 지게에 지고 앞산기슭으로 향했다. 언양에서 자라면서 늘 마구깐의 소똥을 치고 소 먹이던 야산에 소똥망태를 지고 다니며 소똥을 주어와 마당에 널어말려 호미로 잘게 부숴 거름밭에 모으고 소를 내어 먹이지 않는 한 겨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에 온 동네의 개들이 뛰쳐나와 저들끼리 점호라도 하듯 힘세고 덩치 좋은 놈이 작은 놈의 냄새를 킁킁 맞고 작은 놈이나 암캐는 슬며시 엉덩이를 대어주다 무슨 축제라도 하듯이 꽁꽁 언 보리밭과 대밭 아래로 쌓은 돌무더기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다 여기저기 똥을 싸고 가끔은 그 혹한 속에서 흘레를 붙는 전구장집과 이선생집, 수동댁으로 이어지는 대밭뒤의 석찬이네 보리밭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방금 눈 개똥이나 벌써 깡깡 얼어붙은 개똥을 덩이째로 호미로 파서 거름 밭에 쌓는 일을 하면서 자란 열찬씨는 여름철엔 날마다 소가 뜯고 겨울철엔 갈비를 끌고 둥그리라 부르는 나무뿌리를 캐는 바람에 사시사철 장판처럼 맨들맨들한 산만 보다가 군대생활을 하던 휴전선속이나 요 근래 등산로에서 아무도 낙엽을 긁지도 않고 짐승도 먹이지 않아 산비탈이나 골짜기에 낙엽이 켜켜이 쌓이고 구석진 곳이나 언덕 밑에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라 등산화를 빼내면 속이 하얗게 뜬 부엽토에 방금 작은 지렁이가 굼실굼실 기어 다니는 최고급 두엄, 천연의 비료가 되어있는 걸 보며 거름한 줌이 목숨과 같이 길가에서 똥오줌이 마려워도 꼭 자기 집까지 와서 보던 기억과 함께 그 흔지만지 쌓여있는 부엽토가 너무나 아까웠던 것이었다.

소나무나 오리나무등 키가 크고 수세가 좋아 잎이 많이 떨어진 데다 바람에 휩쓸려 더 두껍게 부엽토가 쌓인 오목한 지점을 찾아 낫으로 표면의 작은 실뿌리를 제거하고 호미나 갈키로 긁으면 금방 한길이나 될 만큼 부엽토가 쌓였다. 40kg짜리 거름포대나 한가마니짜리 마대에 그걸 담아 지게위에 크고 작은 걸 4층으로 높다랗게 쌓아 지고 오면 통장님과 이호열, 윤병균씨는

“우리 가국장님은 농사를 도대체 얼마나 지으려고 저렇게 극성일까? 안 그래도 심술쟁이 교장선생과 심청궂은 사모가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는 판에?”

하면서 실없는 짓 그만하고 오시게장에 국밥이랑 소주나 마시러가자고 해도

“땅에 묻는 거름이야 내가 농사 안 짓는다고 어데 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짓더라도 토질개선이 되고 농사 잘 되면 되는 거지요.”

하고 하루에 근 20포대씩을 쌓아 가장 토질이 나쁜 교장선생의 본답 꼬리에 붙은 소나무그늘에 태산같이 쌓았다. 그걸 본 정씨문중의 경작자 정진수란 노인이

“우리 가국장 동생은 평생 농사지은 나보다도 더 하네. 부엽토 그 기 진짜배기거름인줄은 우째 알았노?”

하더니 자기는 열찬씨의 밭 뒤 비스듬한 언덕에 낫으로 넝쿨을 정리한 뒤 갈퀴로 소나무갈비는 물론 밤나무, 참나무등 모든 잎을 긁어내려 산더미처럼 쌓고 그 위에 갑바를 덮었다. 한 삼년을 두면 멋진 거름으로 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오소. 우리 막에 내가 물망골 더덕 캐서 술 담은 것 있다. 동생하고 한잔 합시다.”

부르더니

“내가 이런 말 안 할라캤는데 우리가 이미 호형호제하고 지낸지가 3년째라 모른 채하기도 그렇고.”

하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동생은 산에서 부엽토 긁어오면 그날, 그날 바로 땅에 묻으소.”

“예에?”

“내 입으로 누구라 하기는 뭐 하지만 어떤 영감할마시가 가국장이 부엽토 져다 놓으면 슬금슬금 제 땅에다 묻는단 말이지.”

“아, 예. 저도 부엽토가 조금씩 축이 나서 대충 짐작은 하고 있는데 노인네들이 숨이 가빠 거름을 져 올릴 수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는 모양인데 그걸 야박하게 갋을 수도 없고.”

“꼭 그런 기 아일 낀데. 그 양반들 욕심이 하늘 대앙꼰데.”

하더니

“우리 클 때 구서동, 두실바닥에 대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어. 범어사절아래 청룡국민학교만 나와도 제법 출입께나 했는데 동래중학교, 동래고등학교를 나오면 큰소리를 탕탕 치는 판에 대학교까지 나왔으면 엄청난 거지. 그 양반이 선대부터 하도 아무치고 근(勤)해서 제법 밥술께나 떴는데 그 양반 공부시키면서 농토가 많이 줄었지. 또 단지 공부만 잘 하는 기 아니라 달리기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지. 키가 작아 꼭 난장이똥자루 만한 사람이 찰항, 와 그 베어링 속의 쇠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하도 빨라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지. 우리는 금방 그 양반이 대학교수도 되고 국회의원도 될 줄 알았는데 중학교선생이 되고 나서는 무슨 출세했다는 소식은 없고 자꾸만 땅을 팔아 살림이 줄어들어 마침내 동래시장 뒤쪽으로 이사를 갔다더군.”

“하긴 아들 셋을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까요.”

“그게 아닌 모양이야. 아이들은 모두 머리가 좋아 각자 장학금이나 뭐로 알아서 공부를 하고.”

“그렇다면?”

“화닥대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동생도 아나? 왜 그 다섯 장으로 끗발을 겨루는 노름, 알로 구삥이라도도 하지.”

“예. 잘 하지는 않아도 초상집에서 더러 본 것 같아요.”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하도 야물고 아니 인색해서 다른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사는 일이 없어 내 손에 내 것 떨어지면 당장 굶어 죽을 판이라 머리 좋은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도 힘들어 보여 문중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교장으로 보냈는데 임기 3년 동안 문중사람, 특히 자신을 교장으로 추천해준 사람에게도 국밥 한 그릇 안사고 퇴직을 했다고 소문이 났지.”

“...”

“내가 동생이 이래 사람이 무던하고 근한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 땅을 쪼깨 띠 주고 이 고생을 안 시킬 긴데. 아무튼 조심하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챙긴다고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하지 말고.”

한 이튿날이었다. 열찬씨 혼자 밭에 올라가 부엽토를 지고 오는데 늦게 올라온 교장선생부부가 무 배추를 뽑는 지라 같이 거들어 무청과 배추 겉잎을 떼어내고 자루에 담아 교장선생의 자동차가 있는 산복도로까지 네 번을 왕복하는데 일손은 놓은 교장선생이 오각정의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자리에서 누런 봉투에서 복잡한 서류를 꺼내어 들여다보며 무어라 적고 있어 어깨도 쉴 겸 건네다 보니

“보자. 가국장이 40평 두 바닥 12만 원, 저거 동서 황씨가 한 바닥 6만 원, 윤병균씨 한 바닥 6만 원, 이호열씨, 6만 원, 통장님 6만 원 모두 여섯 바닥에 36만 원이네.”

하고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경작자명단을 뒤적이다

“그것 참 땅세가 일 년에 한 60만 원, 한 달에 한 5만 원씩은 치어야 우리 두 내외가 밥이라도 낫게 먹을 텐데.”

“그거사 당장 내년부터 한 바닥에 10만 원씩으로 올리면 되지.”

“그렇지만 이 국장 덕분에 올해 첨 지세를 받으면서 바로 올리면 되나?”

“아, 싫으면 그만 두라지. 여게 남는 땅 없냐고, 농사가 짓고 싶어 물어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런가?”

주고받던 두 사람이 이번엔 토지대장을 꺼내놓고 보고 있어 열찬씨가 흘낏 살피니 맨 위에 소유주가 박씨문중으로 되어 있다가 밑에 박동찬으로 옮긴 기록이 있어

“이 땅이 원래 문중답인가봐요. 임시조치법때 교장선생님 앞으로 정리를 한 모양이지요?”

하자

“뭐 옛날 사람들이야 다 그랬지.”

교장선생이 무심코 받는데

“남 이사 문중답이든 임시조치법인든 이 국장이 와 그라는데? 구청에 댕깄다 카디마는 뭐 어룸한 땅 있으면 당신이 주어먹을라고 그라나?”

새파라동동한 얼굴로 정색을 하는지라

“그, 그럴 리가?”

더듬거리며 지게를 지고 마지막 짐을 옮겼다. 이제 김장거리가 다 내려간 것을 보고 뒤 따라온 교장선생이

“이 국장님, 고생했어요.”

하고 시동을 거는데 사모는 아직도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날도 종일 짐을 져주고도 괜한 의심만 받고 말았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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