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 고장 부산을 생각한다.

내가 태어난 곳이 부산은 아니지만 어려서 낯선 도시로 이사를 온 후 학교 공부를 모두 부산에서 마치고 생활한 것이 어언 53년이나 된다. 그러기에 영혼과 육체가 성숙하게 된 곳은 부산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그림그리기를 해온 것도 53년째로 기억된다. 5형제 중 유독 나만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는데 형제 중 셋째였던 내가 공부를 제일 못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쯤인가 방학만 되면 엄마를 졸라서 차비를 얻은 후 혼자서 고향에 자주 놀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다 동생도 데리고 갔었다. 고향 외갓집에 가면 젊은 외삼촌들과 물가에서 고기도 잡고 참외, 수박밭 원두막에서도 놀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 어린 나이에 왜 고향에 가고 싶어 했을까를 가끔 생각해본다. 그것은 아마 일곱 살 때 부산으로 이사 오기 전 고향에서 자연과 함께하던 아름다운 추억이 그리워서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형제들도 부모님을 따라가곤 했지만 유독 나만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건 유달리 활동적이고 개구진 성격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별났으면 친지 어른이 ‘베트콩’이란 별명을 지어주셨다. 고향에 가면 어르신들은 얼굴은 몰라봐도 별명을 말하면, “아~~ 그 얼굴 새까맣고 눈 동그란 아 말이제~~”라며 웃으시곤 했다.

한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부산에서의 환경 부적응 탓도 있지 않나 싶다. 그 당시 처음 이사를 온 영도는 무서운 곳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사람들의 거친 말씨와 아이들 세계에서도 다소 폭력이 난무하던 분위기도 있었던 까닭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사시사철 잘 놀았던 기억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늘 아이들과 봉래산 이순신 장군 신발 바위에도 올라가고 메뚜기 잡기, 산 움막 짓기 등 동네 아이들과 매일 즐겁게 지내던 습관은 고향 시골에서 터득한 놀이 방식이었다. 가끔 마을 동산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스케치북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던 기억도 있다.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낯선 동네가 무서워 집안에서만 놀다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림그리기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닮게 그리는 것에 대한 매력에 빠져 더 깊이 매몰되어 갔던 것으로 회상된다. 그러다 보니 실력은 늘어가고 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어 차츰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수많은 상장도 받게 되다 보니 우쭐하게 되어 뒤늦게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렇게 서서히 부산에서의 생활에 빠지게 되어 성장하게 되었고, 당시엔 부산에 대한 근거 없는 자부심도 생기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쩌다 학운이 좋았는지 미술계 쪽으로 좋은 선생님도 만나게 되었고, 그 계통의 훌륭한 선후배들과의 만남도 이어져 이제는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명망도 조금씩 얻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존경하는 은사님과 선배님의 조언으로 부산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또 한 번 운이 좋아 부산시 공립 중등 미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가에는 그림을 그리는 이중생활에 몰입하여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교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시건방진 태도로 대학 생활에 흥미를 느끼진 못했는데. 때마침 이랄까 84년도 입학부터 대학들은 걸핏하면 강제 휴강, 결강, 보강 등 수업의 파행이 난무했다. 제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온 나라가 밤낮없이 연일 시끄럽고 부산의 중요 도심지 도로는 철야 데모로 밤이면 밤마다 불꽃놀이? 난장판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대학 생활을 보내고 부득이하게 졸업한 후 군에 입대하였다. 군대 또한 폭력의 온상이었지만 부산에서 자라서인지 그나마 잘 버텨온 듯하다.

그런데 입대 7개월 뒤 일병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오게 되어 너무나 벅찬 감동으로 설렜던 기차 안에서 특이한 부산의 특징을 체험하게 되었다. 아마 삼랑진쯤인 걸로 기억된다. 구궁화호 열차 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서 둘러보니 생선 장수는 없는 듯했다. 미역꾸러미도 안보였다, 주변 승객들 또한 특별나지 않은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그 냄새는 짙어져 갔다. 구포역을 지나서는 더 많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산역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자 재빨리 열차 문에서 뛰듯이 내렸는데, 순간 엄청난 쓰나미가 나를 덮쳐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바다 내음이었다. 난생처음 맡은 낯선 바다 내음이 이토록 강렬하게 부산을 덮고 있었단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익숙해지면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그 냄새가 낯설지 않고 어떤 에너지를 얻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지방에서 오랜만에 오는 사람들도 그러한 인상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냄새는 기억의 깊은 곳에 자리하여 특정 상황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어떤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했다. 나도 어느새 부산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비록 우리나라의 지역에 오래 머문 곳은 군대 외에는 별로 없지만, 지금은 부산이 편하다. 부산은 놀기에도 좋고 이제는 공기도 맑다. 나는 크게는 못 느끼지만, 부산에 산다고 하면 내륙지방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그렇게 나는 부산사람이고 부산을 사랑하는 완전한 토박이가 된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화가로 화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0년 정도 된다. 대학 시절과 아마추어 시절에도 하루 24시간 늘 그림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공부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예술계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부산의 미술 문화에도 많은 참여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느껴지는 것은 왜 지역은 이렇게 열악한가, 지역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가 하는 물음은 언제나 해결하지 못하는 화두였다. 그렇게 어렵게 작품활동을 겸한 교직 생활을 소신껏 해오다가 2년 전에 성대결절 위험진단을 받게 되었다. 교직 생활 33년 마지막 해에는 목이 아파 수업을 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너무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려고 목을 많이 썼나? 하는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기에는 약간의 양심이 걸렸다. 많은 음주와 흡연도 한몫한 건 아닌지라는….

교사는 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현장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이토록 아이들과 잘 놀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라웠다.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동료 교사들에게도 인정을 받도록 노력하여 교장이나 장학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리자도 많았다. 하지만 화가라는 부업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런 유혹도 뿌리쳤다. 하나를 가지려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진리를 그때 터득했다.

어쨌든 하늘의 뜻이다. 나는 다른 교사들보다 1.5배 더 열심히 했다는 남도 알아주지 않은 자부심을 품고 명예롭지 않은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어느 선배의 말이 실감이 나는 퇴직 2년 차 생활이다. 그토록 꿈꾸던 화가로서의 완성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는 기대감에 들뜨기도 전에 ‘퐁피두 사태’라는 국면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찾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명가수의 노래는 단지 노래일 뿐 나는 현재도 너무 힘들다. 부산 싸나이? 가는 길을 막는 그 누군가 때문이다. 내가 사는 부산을 어지럽히고 많은 예술인과 시민을 괴롭히는 그들과 싸워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 벅차다. 한때 체력이 빵빵하던 40대 교사 시절, 학교 내 민주화를 위해 노조에 가입하여 연일 학교와 교육청, 교육부와 싸우던 쓰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 운명은 늘 싸움터에 나가야만 하는가? 라는 자괴감도 느낄 새도 없이 지금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우리의 싸움에 마음 쉴 새가 없다.

내 세대는 대한민국이 민주화되어 가던 과도기였다고 생각한다. 2002 월드컵 붉은악마라는 양심적 응원단을 만든 그 당시의 386세대에서부터 486으로, 그러다 586, 이제는 686세대로 진입한다.

우리 세대는 연신 이런 투쟁의 시대를 거쳐야 했고 또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집단과 힘을 가진 자들의 사적 욕망 때문에 민중이 유린당하는 역사는, 토네이도 회오리처럼 민중들을 빨아들여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하도 많이 속고 살다 보니 이제는 정치인들의 관상만 봐도 견적을 낼 수 있을 정도다.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 사안은, 부산시가 프랑스 퐁피두 예술문화센터와 비밀 협약을 맺은 사건이다. 이 사안에 본의 아니게 맞닥뜨리게 되어 내용을 알고 보니 너무나 어이가 없고, 분노하게 되어 뜻을 함께하는 문화예술인과 시민단체가 모여 힘겹게 싸우고 있다.

부산시는 수억만 년을 지켜오던 천혜의 이기대 국가지질공원에서 사유지를 매입한 후 수변공원에서 근린공원 또 예술공원으로 단기간에 용도 변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엿보이는 합리적 의혹을 권한이 없는 우리로서는 밝혀낼 길이 없다. 부산 시민의 자랑거리이자 수많은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위로와 휴식을 얻어오던 이곳에 외국의 미술관에 돈벌이해주기 위해 공원 땅을 파헤친다고 한다. 시민들이 모르게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 측과 비밀 협약을 맺고, 천문학적인 혈세를 쏟아붓는 이 사업에 시민사회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있다. 부산시 담당 공무원들과 관계기관들만 모여 얼렁뚱땅 형식적인 협의회 수준의 과정만 거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연구용역 또한 부산을 모르는 기관에 의뢰하다 보니 보고서의 수준도 낮을뿐더러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에 항의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와 문화예술인 연대에 뒤늦게 협의하자는 제스처를 보여 두 번이나 만났더니, 우리가 요구하는 공론화 절차에 대한 해답을 내보이지 못하고, 계속 관제 동원 식의 설명회니, 라운드테이블이니 하는 식의 대시민 기만행위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좋은 정책이면 왜 떳떳하게 밝히지 않는가? 담당 공무원들도 이 사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니면 함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1년 가까이 싸워오면서 보고 겪었던 에피소드나 난센스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 마당에 어디선가 읽었던 부처님의 말씀이 자주 떠오른다.

“한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온 우주가 시끄러워진다.”

부처님은 어찌 이리도 인간 세상의 일을 꿰뚫고 계셨을까….

나는 지금 읽어버린 내 소중한 시간을 되돌려받고 싶다. 시간은 되돌아올 수 없기에 다른 것으로라도 보상받고 싶다. 심지어 부산시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기도 하다. 잘못된 행정 독주로 인해 피해당한 나의 삶의 일부를 배상하라고, 안되면 지금 당장 그 사업을 포기하라고 말이다.

어서 빨리 이 일을 끝장내고 싶다. 나 혼자만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부득이 많은 시민의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여 평생 꿈꾸어 오던 화가의 길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사회에도 환원하고 싶다. 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에 비하면 현재의 내 삶이 약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상대적 미안함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인사대천명.

만약 하늘이 돕는다면 우리의 이 고난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없지는 않다. 우리는 그냥 그 끝을 모르는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당장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제 다시 내 고장 부산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문화 발전의 꽃향기가 솟아나는 아름다운 내 고장 부산이 되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찬란한 부산 문화예술계의 역사 한 귀퉁이에서라도 우리들의 이 운동이 있었다는 글귀 한 줄만 쓰여 있다면 충분히 만족하리라 생각해본다.

제2의 고향 부산이 이제는 제1의 내 고장이 되어가고 있다….

허석 작가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