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晏子) 초상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는 말은 2,000여 년 전에 나온 말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신분질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더하여 이 말이 나온 전체 맥락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우선 시대상황부터 살펴보자.

공자(551-479 BC)는 춘추시대(770-403 BC)의 정치·사상가였고, 맹자(372-289 BC)는 전국시대(403-221 BC)의 정치·사상가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주(周) 왕조의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 하극상과 약육강식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태였다. 춘추 말기에는 100여 제후국 중에서 비교적 세력이 강한 14개 제후국만 남아있을 정도로 겸병전쟁이 심하였다.

전국시대는 이전의 춘추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의 규모나 기간이 확대되었다.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되어 하루도 전쟁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혼란이 극심한 시대였다. 오죽했으면 ‘나라끼리 전쟁하는 시대’란 뜻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했겠는가.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실상을 보자.

춘추(春秋) 242년 동안 망한 나라가 52개이고 시해된 군주가 36명이다.
봉록이 나오는 땅만 좋아하고, 밭을 가는 호미는 싫어하여
이로써 왕도(王道)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회남자/주술훈-

제나라의 대부 안자가 말했다.

“지금은 말세입니다. 민(民)은 소출의 셋 가운데 둘을 공실(公室,권력자)에 빼앗기고, 나머지 하나로 연명합니다. 공실의 곳간에는 재물이 좀먹고 썩어나가는데, 늙은이는 얼어 죽고 굶어죽는 실정입니다.”

진(晉)나라 대부 숙향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공실도 역시 말세입니다.
길가에 시체들이 서로 바라보는데, 그들의 부는 넘쳐납니다.
서민들은 피폐하고 공실은 더욱 사치를 더해 갑니다.
민들이 공실의 명령이라면, 마치 도둑과 원수를 보듯 달아납니다.” -좌전/소공3년(539 BC)

국운은 망조가 들고, 하늘도 우리를 돕지 않는구나!
있고 싶어도 머물 곳이 없고, 간다고 한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군자는 실로 벼리이니 마음을 합해 싸우지 말아야 하거늘
누가 이 재앙의 씨를 뿌렸는데, 어찌 민(民)을 탓하는가? -시경/대아/상유-

큰 쥐야 큰 쥐야 우리 곡식 먹지 마라
삼 년 너를 섬겼거늘 날 아니 위해 주나
이제란 너를 떠나 저 즐거운 들로 가련다
즐거운 들 즐거운 들, 거기엔 긴 한숨 없으리라. -시경/위풍/석서(碩鼠)-

*큰 쥐(석서)-위정자(爲政者)

도둑의 대장 도척(盜跖)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명성이 해와 달처럼 요순(堯舜)과 나란히 전해지고 있다. -순자/불구-

이처럼 당시의 민(民)은 전쟁으로 삶이 무너지거나, 부지한 목숨도 착취에 시달렸다. 그래서 삶터를 떠나 유랑하거나 도적의 무리에 끼어들기도 했다. 위정자들의 부와 권력의 원천은 민이다. 착취할 민이 떠나지 못하게 자신의 세력권 내에 묶어 두어야 한다.

공자는 덕치를 통한 교화로 민을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항산 곧 생활의 근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왕을 설득한다. 그러나 실제 춘추시대의 제후들은 가혹한 형벌로써 민을 눌러 앉히려 했다.

당시에 오형(五刑)이 시행되었다. 얼굴에 먹물을 뜨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거세하는 궁형(宮刑), 목숨을 끊는 사형(死刑)이다. 오형의 죄목은 각각 500가지로 도합 2,500가지 죄목이 있었다.

안자가 말했다.

“지금은 말세입니다. 나라마다 장터에는 온전한 신발은 싸고, 발꿈치를 잘린 죄인의 신발이 비쌉니다.” -좌전/소공 3년(539 BC)

‘구천용귀’(屨賤踊貴)란 사자성어의 출전이다. 상품의 가격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른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상품의 가격은 올라간다. ‘구’(屨)는 일반 사람들이 신는 신발이다. ‘용’(踊)은 월형으로 발꿈치가 잘린 사람이 신는, 뒤축이 없는 신발이다. ‘천’(賤)은 ‘값이 싸다’의 뜻이고, ‘귀’(貴)는 ‘값이 비싸다’의 뜻이다.

공자와 동시대인인 제나라 안자(晏子, ?-500 BC)는 당시의 엄형주의(嚴刑主義)의 실정을 ‘구천용귀’로 표현했다. 당시에 죄를 짓는 민이 많았으며, 그 죄인이 받는 형벌은 가혹했다. 하여 형벌을 받아 불구자가 된 사람이 성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구천용귀’란 말로 풍자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황은 이렇게 참혹했다. 다음은 그 당시의 신분질서를 살펴보자.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