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조의 《행복이란 동선》이 실린 시집 '첫나들이' 표지와 시인의 인물사진이 실린 날개.
부산지역 문학 작품집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책장에서 뽑아든 2017년에 발간된 시집- 증정본 2권을 책상 가장자리에 밀쳐놓았다.
뭔가 풀리지 않아 원고 쓰기를 갑자기 멈추거나, 잠시 커피를 마시거나 전화를 받다가 우연히 눈길이 닿는 시집을 이리저리 들추다가 다시 하던 일로 되돌아가곤 한다.
며칠 동안 그러다가 비 내리는 창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마시는 커피와 함께 몇 구절들이 떠올랐다. ‘저 빈 들을 보아라/ 얼마나 희망이 넓고 깊은가, ‘상처,/ 너는 모든 길을 만들지’, ‘한 사람이 꽃길 걸어온다면/ 그도 꽃이 아니겠느냐’ 등.
그 글귀들은 우연히 눈길에 닿았지만 스쳐지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가 비 오는 날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창에 비친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윤홍조의 시집 『첫나들이』는 몇 잔의 커피를 마시게 했고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 살아가면서 겪은 상처와 꽃길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 삶은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계속 질문하게 했다. 그 질문의 시작과 끝은 《행복이란 동선》 안에 있다.
‘행복이란 동선’이 시작한 때는 ‘그해 봄’이다.
암울했던 기억의 파편 같은 겨울 가고
노란 개나리 종종종 손짓하던 그해 봄,
‘그해 봄’은 ‘그해’를 뒤돌아보니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자연히 찾아온 ‘노란 개나리 종종종 손짓하던 봄’일 뿐이다. ‘그해 봄’은 그해 ‘겨울’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해 봄’은 전혀 희망도 없고 근심, 걱정으로 막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그해’ 겨울의 기억 속에 같이 있다.
겨울로부터 이어진 ‘봄’은,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적인 상황이면서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그해 봄’ ‘노란 개나리’의 ‘손짓’은 ‘나’를 그 상황을 벗어나도록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들어준다.
내가 누렸던 사치 중의 사치, 호사는
팽팽한 삶의 반경 벗어나지 않으면서
괴나리봇짐 지듯 즐겁게 길나서는 시간 외출,
‘나’는 ‘노란 개나리’의 ‘손짓’으로 ‘팽팽한 삶의 반경’ 속에서 벗어나고자 ‘시간 외출’을 한다. 그 ‘외출’은 단지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일지라도 ‘사치 중의 사치, 호사’임에 분명하다. ‘노란 개나리’가 ‘손짓’하는 봄으로의 변화, 자연은 ‘나’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게끔 재촉한다. 아니 ‘나’는 봄의 ‘손짓’을 보고서는 겨울의 ‘삭막함’으로 언제든 터져서 산산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삶의 긴장으로부터 잠시나마 ‘외출’을 하게 한다.
장꾼의 바지런한 손길 쉼 없이 밀고 당기고
장바닥 덮을 멍석만한 밀반죽 썰어 만든
오일장 그 손칼국수집 찾아가는 일이였으니,
‘외출’은 ‘나’의 홀로 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장바닥’으로, 여럿 사람들이 나드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장바닥’의 ‘장꾼’들 속에 들어감으로써, ‘홀로’ 있는 ‘나’를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게끔 시도한다. 그 시도는 ‘손칼국수집’을 ‘찾아가는 일’이다.
일용할 한 끼의 가벼운 식사를 위하여
오일 밤낮 꼬박 손꼽아 기다려, 마침내
그렁거리는 눈물 같은 한 그릇 칼국수 먹는 일이
그 봄 내가 누리는 최고의 사치였으니,
‘손칼국수’는 ‘장꾼’들에게는 ‘일용할 한 끼의 가벼운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을 지탱하는 팽팽한 긴장이 곧 터져서 삶의 반경이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나’에게는 ‘최고의 사치’일 것이다. 그 ‘사치’는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헤쳐 나오지 못하는 ‘나’에게는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한 그릇 칼국수 먹는 일’은 ‘나’에게 있을 수 없는 희망이지만,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희망이기도 하다.
세상 향한 내 뿌리 깊은 그리움에게
손쉬운 칼국수 한 그릇 안기는 일이
무엇보다도 부러운 나의 사치였으니
그리하여 칼국수 한 그릇이 내게 베푸는
세상과 호흡하는 따스하고 눈물 나는 행복
‘칼국수 한 그릇 안기는 일’은 ‘노란 개나리’의 ‘손짓’으로 찾아간 ‘손칼국수집’에서 자연의 변화에 따라서 ‘외출’한 ‘나’ 스스로가 이제는 스스로에게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 희망은, 홀로 있는 ‘나’를 ‘장바닥’ ‘장꾼’과 함께 있도록, ‘세상과 호흡하는 따스하고 눈물 나는 행복’으로 스스로 변화시킨다. 스스로를 변화시킨 ‘나’는 ‘시간 외출’에서 벗어나서 ‘행복’을 찾아간다.
누구에게는 싱겁기 그지없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가슴 뛰는 즐거운 일이었으니,
겨우내 꼼짝없이 방바닥 등져 누웠던 몸
다시금 땅에 한발 한발 걸음마 시작해
스스로 다리에 힘 올려 찾아가 얻는 행복
그 나들이 길을 따끈히 데워놓던 칼국수 한 그릇,
깊어가는 봄과 함께 나를 살게 했던
그해 봄이 베푼 최고의 선물이라 자축했던
‘손칼국수집’으로의 ‘나들이길’은 ‘누구에게는 싱겁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봄이 베푼 최고의 선물’이다. ‘노란 개나리’가 ‘손짓’한 봄의 선물은 ‘나’로 하여금 행복으로 가는 스스로의 의지로 ‘나들이 길’에 ‘살게 했던’ 것이다.
‘행복이란 동선’은 ‘한 그릇의 칼국수’가 ‘일용할 한 끼의 가벼운 식사’에 지나지 않는 일지라도, ‘누구에게는 싱겁기 그지없는 일’일지라도 ‘나’에게는 ‘가슴 뛰는 즐거운 일’의 ‘나들이 길’이다. 행복이란 남에게는 아주 사소하거나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스스로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는 늘 행복이란 말을 감추고 살았지 결코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 질문은 스스로 곤경과 고통에 처해있거나 불운하다고 느낄 때 어쩌다가 자기 도피나 탈출, 위안으로 던지는 것일지 모른다.
시험공부에 지칠 대로 지친 이후 처음으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진 대학 신입생일 때, 나 스스로 잠에 곯아떨어지도록 인생론, 연애론, 우정론, 행복론 등이 꽂혀 있는 도서관 서가에 가서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그 때 만난 러셀(B.Russell)의 《행복론》은 스스로를 배반하게 만들었고 아직도 그 배신자의 멍에를 아름답게 짊어지고 있다. 그러고는 언제나 ‘돼지국밥 한 그릇의 이 행복을’, ‘맥주 한잔의 이 행복을’이라고 입에 달고 있다.
‘행복이란 동선’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지는 것이다.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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