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지식공감과 신고리5·6호기백지화부산시민운동본부의 공동주최로 지난 23일 부산YWCA강당에서 열린 '신고리5·6호기 부울경 긴급토론회' 중 부산가톨릭대 김좌관 교수가 '신고리5·6호기공론화 결정에 따른 대응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신고리5·6호기백지화부산시민운동본부
공론화는 피를 말렸다. 지난 20일 발표된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의 핵심은 ‘신고리5·6호기 건설은 재개하되 안전기준을 강화하고 원전은 축소해야한다’는 것이다.
시민참여단의 59.5%가 ‘신고리5·6호기 건설재개’와 더불어 53.2%가 ‘원전 축소’를 선택했다. 또한 시민참여단은 신고리5·6호기 건설을 재개할 경우 보완조치로 안전기준 강화(33.1%),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27.6%), 사용후핵연료 해결방안 마련(25.4%), 탈원전정책 유지(13.3%)를 꼽았다.
당초 공론화 자체를 불신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불복프레임을 내걸었던 원전업계·학계는 환호를, 부울경지역 신고리5·6호기백지화운동본부를 비롯한 전국 탈핵진영은 당혹감과 좌절의 쓴맛을 보았다.
탈핵진영은 공론화과정에서 소위 '원전마피아'가 만들어 놓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겹게 싸웠다고 말한다. 한편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정부·여당이 공론화과정에 불공정한 영향력을 행사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용어는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당시 야당이 2007년, 2012년 양대선에서 패배한 후 나왔다. 기득권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선거법, 정치를 냉소로 몰고 가는 편향된 언론의 행태 등으로 인해 정권교체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된 정치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기울어진 운동장’론이 신고리5·6호기공론화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이번 공론화는 시민참여단의 숙의과정을 통해 정부와 국회를 넘어 직접민주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었으나 공론화위원회의 구성이나 추진 과정에서 문제점을 많이 노출시켜 ‘공론화=공정한 결과’ 도출에는 실패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실 신고리5·6호기는 공론화에 맞길 일이 아니었다. 탈원전정책과 함께 신고리5·6호기 백지화를 실현해야 할 주체는 공약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였다. 그런데 ‘백지화 결정’이 아닌 사회적 합의 도출을 구실로 공론화위원회로 공을 넘겨버린 ‘비겁함’이 있었고, 한편 새 정부의 ‘탈원전 의지’를 믿고,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고 공론화를 못내 받아들인 탈핵진영의 ‘순진함’ 탓도 있다고 하겠다.
시민참여단의 최종 합숙에서 건설 중단 입장을 발제한 동국대 박종운 교수는 지난 23일 부산YWCA강당에서 열린 ‘신고리5·6호기 부울경 긴급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시민참여단에게 만일 신고리5·6호기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에 짓는데 동의하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며 “다수호기가 문제가 되는 부울경에 신고리5·6호기 건설에 동의한다면 수도권은 물론 타지역에 원전을 더 지어도 된다는 말인데 신고리5·6호기는 그대로 짓고 앞으로 원전은 줄여가자는 결정은 자기모순이다.”
이번 공론화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는 공론화위원회의 치밀한 설계 부족에서 비롯됐다. 중립적 인사 구성 원칙을 강조하다보니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기계적 중립화에만 익숙한 공론화위원들은 신고리5·6호기로 인해 피해를 입는 부울경지역 관계자의 의견청취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반면에 시민참여단에 넓은 의미에서 신고리5·6호기 원전의 사실상 수혜자인 수도권 주민이 인구비례보다 더 많이 반영됐고, 남녀성별이나 연령대분포 또한 왜곡됐으며 미래세대의 의견은 전면 배제됐다.
공론화위원회는 시종일관 무기력했다. 일부 수구보수언론과 경제지가 탈원전정책 및 신고리5·6호기 공론화 추진을 ‘초법적 행위’ ‘포퓰리즘 정책’ 이라는 등의 부정적인 기사를 일방적으로 쏟아냈고, 일부 야당은 정당행사를 내세우며 ‘엉터리 발표’를 남발했고, 수구보수언론과 경제지는 전기요금 폭등과 같은 ‘가짜뉴스’를 사실인양 왜곡보도를 일삼았다.
친원전 전문가인 모 대학 교수의 경우 공론화 지역 토론회에서 ‘선수’인 친원전 발제자로도 나서면서도 양측의 공론화자료를 검증하는 ‘심판’ 역할의 공론화 전문위원으로 활동을 하다 적발돼 뒤늦게 사임하기도 했다.
한때 탈핵진영은 공론화위원회가 정당, 언론, 국책기관, 한수원 등의 물량 공세와 비양심적인 행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법적 권한이 없다면서 최소한의 노력조차 포기하고 있다며 공론화 보이콧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탈핵진영은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 탓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실망과 좌절을 새로운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란 책에서 밝힌 것처럼 오히려 선진국이 아닌 개도국과 같은 ‘약자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우리도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한다.
먼저 새 정부로 하여금 지난 7월 국민이 제기한 공익감사를 통해 신고리5·6호기의 건설허가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 부실, 졸속’ 사례를 제대로 파헤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전적폐’를 청산해 나가고, 안전성과 관련해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민간참여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해야 한다.
특히 시민참여단이 보완대책을 주문한 점을 상기해 이중격납건물, 노심용융물 냉각설비인 코어캐쳐 추가 등으로 안전성이 강화된 수출용 EUR-APR에 준한 설계기준으로 신고리5·6호기의 안전성을 강화해 건설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부울경 주민 입장에선 신고리5·6호기 공사가 재개된다 해도 신고리5·6호기 백지화의 깃발을 내려선 안 된다. 앞으로 7, 8년 뒤의 ‘준공허가’가 나기 전까지 신고리5·6호기 건설과정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지난 13일 우리나라 녹색당을 방문한 일본 탈핵운동가인 원자력자료정보실(CNIC)의 반 히데유키 대표는 “설령 신고리5·6호기 건설재개 결정이 되더라도 핵발전소에 핵연료를 장전하여 가동하기 전이라면 얼마든지 대안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원전안전과 관련된 규제기관의 개혁과 원전 안전을 담보할 인사 원칙을 바로 세우도록 요구해야 한다. ‘원자력진흥·홍보위원회’로 전락한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원자력규제위원회로 거듭나게 하고, 산업부를 더 이상 원전마피아가 지배하는 조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원자력문화재단도 이제는 원자력안전에 대한 홍보·교육을 중시하는 ‘원자력안전문화재단’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탈원전에너지전환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부가 ‘에너지전환위원회’를 조속히 발족하게 하되 시민참여를 통해 목표를 설정해나가도록 하고, 재생에너지재단과 지자체의 에너지공사 출범을 적극 요구해야 한다.
부울경주민 입장에선 ‘안전한 도시’를 위한 원전입지 지자체의 실질적 방재대책 및 지역에너지분권정책을 제대로 수립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산지역의 경우 방사선 비상계획구역을 현재 원전 반경 20~21km에서 적어도 30km까지 확대해 실질적인 예방계획 수립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줄 아는 단체장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2082년까지가 아니라 2040~50년에 ‘탈원전 부울경’ ‘핵단지 없애기’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는 단체장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강자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약자를 위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힘은 시민들에게 있고, 그 힘은 바로 투표에서 나온다. ‘강자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정당화시켜온 ‘기레기언론’을 바로 잡는 힘도 시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제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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