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14일 서울대 교내 시위 사회를 맡았다가
산청 촌놈 재택은 삼수 끝에 서울대생이 됐다. 그러나 4년간의 대학생활은 재택에게는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대학 4년 중 3년을 한 집에서 입주과외로 그 집 쌍둥이 형제를 가르쳐 대학에 보냈다. 그 덕에 객지생활이지만 생활은 안정된 면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고달프고 아쉬운 대학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촌놈이 어렵사리 서울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 외에는 본 책이 거의 없었어요. 시골에서 문화적 혜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으니까요. 근데 남은 건 자존심 하나뿐이었던 같아요. 고교 동창으로 당시 서울 신촌 부촌에 살면서 연세대 상대 다니던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대학 2학년 때인가 여대생과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그 친구는 팝송을 곧잘 불렀는데 내가 아는 팝송이 없다고 하니 여학생들 앞에 창피를 줘서 그 뒤엔 아예 그 친구는 안 만나게 됐어요. 그땐 정말 쪽팔렸거든요.”
시대적으로도 재택이 대학생활을 하던 시기는 1970년 대 초로 대학가에는 민주화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잇달아 긴급조치가 내려져 박정희 군사독재가 깊어졌고 이에 반독재민주화운동이 불을 지피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이다 보니 학비·생활비 마련을 위해 학생과외 아르바이트에 지쳐있던 재택에게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재택은 대학 3학년 때인 1972년 3월 교육학과 과대표를 맡아 사범대학 대의원회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장기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초헌법적 비상계엄조치를 단행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대학가의 데모가 1969년 입학 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민주화 투쟁이 다양하게 대학가에 확산 심화되었다. 1971년 후반부터 서울사대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열기가 약하고 소극적이라며 서울시내 여자대학 학생들의 비난이 쇄도하고 있었다. 10월 유신이 현실화되는 1972년 3월 신학기부터는 전국 대학생들의 데모가 점점 가열되었다.
드디어 1972년 4월 14일 서울사대에서도 일이 터졌다. 소위 4.14사태이다. 서울사대 학생들의 박정희 대통령 탑승차 투석사건을 말한다. 당일 박정희 대통령이 홍릉 카이스트(KAIST) 기공식 참석 차 고려대 앞 도로를 경유할 예정이었는데 고려대 앞 학생시위가 너무 치열해서 서울사대 앞 용두동을 경유해 청량리를 거쳐 홍릉으로 이동경로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서울사대 대의원회 주도로 사건 전날 학교에서 철야농성을 한 학생들은 당일에 교육실습 나간 4학년 학생들까지 합류하는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일 오전 아침 식사를 하러 교문 밖을 나간 일부 학생들을 경찰이 연행하는 와중에 교내 담벼락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학생들이 투석을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경호차를 선두로 지나가던 대통령 탑승차에 수개의 돌이 날아가 맞게 됐던 것이다. 이에 대통령 경호차량을 포함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사대 도로변 담장의 목문을 부수고 교내로 들어가 사범대학장을 만나고 나갔다. 동시에 대규모 경찰병력이 서울사대 정문으로 들어와 교수연구실과 도서관을 포함한 교내외를 최루탄과 곤봉으로 제압하며 학생 백 명 가량을 붙잡아간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시위 전날 밤과 당일 시위 사회를 사대 대의원회 부의장 자격으로 저가 보게 되었어요. 당시 학생회는 시위를 외면하고 대의원회 의장도 시위에 소극적이라 제외하고, 또 한 명의 부의장으로 지리교육과 대표이던 유상덕이, 나중에 전교조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친구죠. 그 친구가 며칠 전 연행되는 바람에 저가 사회를 맡게 된 거예요. 당시 사범대학 학장은 저희 교육학과 서명원 교수였고, 학생과장은 독어교육과 이동승 교수였는데 교육부와 대학본부의 휴교령 자제를 요청하면서 학생 설득을 장담했던 서 학장이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터라 저희들로서는 이날 사건으로 교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어요.”
4.14사태는 경찰 병력이 대거 대학에 진입하여 캠퍼스를 유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뒤 1975년 4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7호로 강제 휴교되면서 군병력이 대학에 진입하는 최초의 사건이 고려대에서 발생하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인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대학생 시위대의 투석사건인 4.14사태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파장을 초래했다. 우선 이 사건은 당일 당시 가장 진보적 언론사이던 동아일보에 기사화되었으나 배포 즉시 회수당했다.
“저는 당시 사건 현장에서 학생과장이 사무실 대형 캐비넷에 숨겨주는 바람에 화를 모면했어요. 다행히 교육학과 학과장이시던 김종서 교수님께서 조언을 해주셔셔 4, 5개월간 울산 근처 암자에 피신해 있었어요. 당시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정부와 대학의 사과와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나서 학교에 복귀하기는 했는데 그 뒤 생활은 내 인생 최대의 악몽이었죠.”
#원하지 않은 ROTC 후보생 시절, 별명은 ‘꽁총’
재택은 학교 복귀 후 4학년 때 ROTC 후보생에 지원한다. 사실상 4.14사태 주동자로 지목되어 암자 피신생활을 했건만 학교에 돌아와 보니 강제징집 등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ROTC 후보생에 지원하기로 한다. 원래 ROTC는 2년간이지만 당시 교련 반대데모 등으로 ROTC제도가 없어졌다가 부활하면서 그해는 4학년만 ROTC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시골 부모님을 협박하고 서울교육청 공무원이던 셋째 삼촌과 학과 지도교수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서울사대 학훈단 장교의 끈질긴 회유가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서울사대 안과 바깥의 다른 친구들은 계속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서 감옥도 가고 군대도 끌려가고 하는 상황에 ROTC 후보생을 지원했으니 주변 학생들이 저를 정보부 프락치라고 수근대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심신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진짜 나는 프락치가 아니라 용기 없고 여건을 피할 수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그 반발심의 표시로 ROTC 후보생으로 있으면서 1년 내내 꽁총을 메고 고문관 노릇을 했지요.”
그래서인가 ROTC 후보생 시절 재택의 별명이 ‘꽁총’이었다고 한다. 장교 후보생이 M1소총을 똑바로 메고 절도 있게 다녀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사냥꾼처럼 총을 어깨에 척 걸치고 건들건들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관이나 동료 후보생들 누구 하나 입대는 사람이 없었단다.
위기는 또 있었다. ‘꽁총 재택’은 ROTC 후보생 가운데 늘 ‘꽁등(꼴찌)’을 맡아놓았다. 마지막 ROTC 임관시험에 불합격하면 일반 사병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교관들의 도움으로 겨우 턱걸이로 합격해 임관하게 되었단다. 재택의 군번은 2973번. 전국 ROTC 임관자 약 3,000명 가운데 끝에서 몇 십 번째였으니 말이다.
“그때 저의 내심 변명과 각오는 내가 죽을 때까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어느 누구보다 정의롭고 진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새겼고 그걸 지금껏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저는 군대생활, 교직생활, 연구소생활, 대학교수생활을 하면서 사익을 위하는 사무원이 아닌 공익을 위한 공무원으로 살아야 하며, 보다 널리 보다 오래 공익이 되는 ‘홍익인간 이화재세’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지껏 살아왔지요.”
우여곡절 끝에 재택은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과에 입학했고, 동시에 1973년 2월부터 1975년 6월까지 육군 장교로 28개월간 군복무를 하게 된다.
“장교생활 2년 중 첫해는 동해안경비사령부에 발령을 받았는데 그곳이 1968년 10월 말, 11월초 3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던 이른바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지역 소대장을 했어요. 무장공비가 침투한 지역인 고포 마을은 실개천을 경계로 강원도 삼척군 고포와 경북 울진군 고포로 나뉘는데 3번에 걸쳐 양쪽으로 침투한 거죠. 철저한 경계와 끊임없는 별들의 헬리콥터 방문, 병사와 마을주민과의 화해와 마찰, 가자미 낚시와 고포 돌미역 채취 등 추억이 많이 남아 있어요. 제대하기 몇 달 전에는 별이 한꺼번에 6개나 떴어요. 연대장 중대장이 군대 부품을 빼돌린다는 소문이 나서 감찰도 많이 왔어요. 근데 그날 한 시간 전에 점검할 땐 이상이 없던 서치라이트가 막상 장군들 앞에서 시연을 하는데 가동이 안 되는 거예요. 장군 지휘봉이 보고하는 제 배를 찔렀어요. 보고도 안 받고 떠나려는 걸 어찌어찌하다보니 가동이 돼 겨우 보고는 마쳤어요. 부품을 제대로 교환하지 않은 게 문제였죠. 그때 부품을 빼돌렸던 지역 지휘관은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재택은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 이전에 그 당시 누구보다 반공소년이었다고 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리산 빨치산 정순덕(1933-2004)을 알았어요. 정순덕이 산청군 생초 내원마을 출신이고 저보다 열댓살 위일 걸요 아마. 저가 초등학교 4, 5학년 때에 저희들은 당시 10여 명의 빨치산 부대원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달달 외어야 했어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매일 검사를 받았는데 잘 못 외면 그날 화장실 청소 당번을 해야 했지요. 심지어 변장술도 외어야 했어요. 63년에 정순덕이 잡히고 나서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신고체제가 악몽으로 떠오르는데 참 민족사의 비극이었죠.”
어쨌든 ‘꽁총 재택’은 그 뒤 논산훈련소 교관을 거쳐 군생활을 잘 마쳤다. 1975년 6월 제대 후 서울에 신설 중량중학교 도덕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교사 발령과정에서 대학 때 시위경력 문제로 상당한 난관에 봉착했다. 다행히 당시 서울시교육청 서무과에 근무하던 삼촌이 백방노력을 하고, 지도교수였던 서울대 김종서 교수가 ‘신원보증’을 하겠다고 적극 나서줘서 신원조회를 잘 넘길 수 있었단다.
#중학교 교사-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부산대 전임강사로
중량중학교에서 임재택 선생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이던 김옥자(1952년생) 선생을 만나 1976년 2월에 백년 화촉을 밝히게 된다. “그때는 남자는 보통 26, 27세, 여자는 22, 23세가 결혼 적령기였죠. 저와 집사람은 교도부에 같이 속해 있었고 서울대 교육학과 선배이기도 한 교도부장님이 중매쟁이 노릇을 해주셨어요. 아내는 아이들과 하는 작품전을 멋지게 만들어내 교내에서 인기가 높았어요. 저는 그때 몸도 빼빼하고 별로 볼품도 없었는데 이쁜 짝을 만나게 돼 참 좋았죠. 결혼하고 나서 저는 청량중학교로 전근을 하게 됐죠. 부부교사는 같은 학교에 근무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죠.”
그 뒤 임 선생은 결혼한 다음 해 2월 중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는 서울대 정범모 교수가 설립한 연구소로 미국식 교육프로젝트들을 우리나라에 적용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서울대 출신의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이성진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었는데 임 선생에게 연구원을 권유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다녔고, 당시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이 교사를 하면서도 교수를 꿈꾸고 있었던 차에 제안이 와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었단다. 임 연구원은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서 당시 유니세프(국제연합아동기금)로부터 3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보육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한다. 당시에 유아교육과 관련해서는 사립유치원과 탁아소뿐이던 시절이었다. 그 연구 프로젝트는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와 공단지역의 노동자로 대거 유입된 맞벌이가정의 보육수요 증가에 대비한 최초의 보육프로그램 개발 적용연구였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린이집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현장에 적용되었다고 한다.
“연구소에 들어간 지 한해가 지나면서 기존 연구원들 상당수가 유학이나 대학으로 가는 바람에 저가 어느새 연구소의 프로젝트 리더가 돼 있는 거예요. 당시 연구소의 담당 연구원이 7, 8명 됐는데 실습생이 오니 프로그램 개발에다 수업도 해야 하고 정말 바빴어요. 79년 봄에는 부산대에서 가정대 가정관리학과 안신호 교수가 신설 심리학과로 전출되면서 아동심리 분야 교수로 오라는 가정대학장의 제안이 있었는데, 저는 연구원 마치고 유학 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맡아놓은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하는 부담도 컸지요. 석사 마친 지도 얼마 안 됐고, 유학갈 계획이라 실력을 키워서 가겠다며 처음엔 거절을 했어요. 근데 당시 이현기 학장님이 한 번 더 찾아오셨고, 연구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소문이 나고 해서 결국 부산대로 오게 됐죠.”
이러한 과정에서 임 연구원은 가족들 애를 태우기도 했다. 교수를 그냥 준다는데 무슨 유학을 가느냐며 고향집으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했고, 연구소 소장으로부터도 욕을 먹기도 했단다. 어쨋든 부산대에 가기로 결심을 하고 1979년 2학기부터는 부산대를 오가며 강의도 했단다. 그런데 정작 아무리 기다려도 정식 발령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보안심사위원회에 통과가 되지 않고 계속 심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보안심사위원회 위원장은 교육부 관료인 부산대 사무국장이 맡았는데, 여기서 교수채용 때 사실상 사상검증을 했다고 한다. 대학시위 전력으로 중학교 교사 발령받을 때도 힘들었는데 이번은 더 어려운 고비였다.
“좀 난감하고 절박했지요. 그때도 교육청에 계시던 삼촌이 또 힘을 써주셨어요.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다하고 교육공무원으로도 근무한 사람한테 사상검증이란 게 말이 되느냐고 설득을 했고, 당시 진주고 4년 선배이던 부산대 체육교육과 서국웅 교수가 사무국장 집까지 찾아가 항의하고 해서 1979년 11월 1일자로 전임강사 발령이 났어요. 당시 박기채 총장님이 결심을 했다고 해요. 전임강사는 총장 직권 발령이 가능하다며. 1979년 10.26 박대통령 시해사건 일주일 뒤예요.”
우여곡절 끝에 임재택은 1979년 11월 부산대 가정대학 가정관리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아 대학교수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 뒤 1982년 부산대 유아교육과로 전출돼 35년간 교수 임재택으로 살아간다. 유학 갈 기회를 놓친 임재택은 교수로 있으면서 1988년 2월 경북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계속)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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