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삶, 사람의 향기】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유아교육의 코페르니쿠스 2

김 해창 승인 2023.02.20 10:01 | 최종 수정 2023.02.27 10:24 의견 0
임재택 교수가 태어나 자란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현동 한디미마을 전경 

2. 어린 시절 고향 산청의 자연이 ‘친구이자 교사’

 

#첩첩산골 ‘한디미’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삶의 힘’

임재택(林再澤)은 1949년 2월 25일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리 현동 1499번지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 임수석과 어머니 하순연 슬하 4남 2년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이 재택이다. 음력으로는 1948년 무자(戊子)년 섣달 스무사흘(12월 23일)에 태어났으니 일주일 만에 두 살이 된 쥐띠 늦둥이다. 6남매 중 맏이가 누나여서 실제로는 6남매 중 셋째다.

재택이 태어난 생비량면(生比良面)은 이름이 특이하다. 진주시에 이반성면(二班城面)이란 곳도 있지만 행정단위로 면 이름이 3글자인 경우는 전국에서도 드물다. 생비량이란 지명의 유래는 신라로 추정되는 시대에 덕망 높은 비량이라는 도승이 집현산 일대에 사찰을 건립하고 신도와 인근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는데 후에 스님이 입적하게 되자 안타까운 뜻에서 생(生)자를 붙여 영원히 생존해 있다는 뜻으로 지명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 5월 면민들이 이런 내용을 담은 ‘생비량 유래비’를 세웠다.

재택이 태어난 현동(賢洞)은 풀어보자면 ‘어진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보통 ‘한디미’ 또는 ‘한디미 골짜기’라 불렀다고 한다. 이 '한디미'는 지리산 천왕봉 자락의 산청군 내에서도 전기가 뒤에서 두 번째로 늦게 들어온 집현산(해발 578미터) 중턱에 15가구 정도가 살던 산골 오지 마을이다. 재택의 기억에 김씨 2가구를 빼고는 모두 임씨 일가였다고 기억한다. 이 한디미 마을은 주로 땔감나무, 산나물을 캐서 아래 마을에 제공했고, 가끔 아랫동네사람들이 꽃구경이나 등산하러 올라오는 정도였다. 어린 재택은 버스보다 산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먼저 보고 자랐단다.

산골 오지 한디미마을 

재택의 부모는 첩첩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6남매를 건사해왔다. “그래도 우리 집은 한디미 골짜기에서는 제일 부자였던 것 같아요. 동네 집 앞 다락논 5마지기가 우리 논이었고, 저가 어릴 때 우리 집에 ‘온 머슴’ 한 명, ‘반 머슴’ 한 두명이 있었어요.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소를 키워 송아지 팔아 목돈을 마련하셨죠. 정말 소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신 거죠.”

이 당시 시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등하교길은 멀었다. 한디미 마을에서 골짜기 개울을 따라 도로까지 내려가는 데만 10리길, 생비량면 소재지 생비량초등학교까지 등하교길 편도거리가 6킬로 15리길이었다. 중고등학교가 있는 진주 시내는 이보다 몇 배나 멀었다. 진주 시내는 생비량 쪽으로 가면 60리길, 집현산을 넘어 응석사 절을 지나 도로를 만나 집현면 방면 대암리 버스정류장에서부터는 30리길이었다. 재택의 기억에 당시 진주까지 버스비는 생비량 쪽과 집현면 쪽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30원과 15원으로 두 배 차이가 났다. 그래서 재택은 진주중·진주고 6년 동안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거의 대부분 집현산을 넘어 15원짜리 버스를 타고 다녔다한다.

“어릴 적 산을 넘어 버스를 타고 다닌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봐요. 초등학교 5,6년 때부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동네서 장작이나 섣가래 같은 나무장사하는 산판이 벌어지면 돈벌이로 장작이나 섣가래를 짊어지고 산을 넘어 응석사 절 앞까지 옮겨주고 용돈벌이를 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그때 장작 1개피에 몇 전을 쳐주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산판일을 10여 차례는 한 것 같아요. 닭이나 토끼도 용돈벌이로 키운 기억도 나고요.”

누구나 시골 아이들이 그랬듯이 초중학 시절 재택은 동네 아이들과 엄청 신명나게 놀았던 기억이 가장 남는단다. 특히 여름방학에 점심 먹고 집집마다 소를 몰고 뒷산 자락에 올라가 풀어놓고, 감자굴 만들어 굽어먹기, 술래잡기놀이를 하다 해질 무렵 산속에 풀어놓은 소들을 다시 모아 몰고 내려왔단다. 이와 관련해서는 부산대 교수 시절 ‘그해 여름방학-소 먹이기와 감자굴’이라는 칼럼을 1988년 8월 부산일보에 기고한 게 있다. 그 중 감자굴 만들어 굽어먹기 이야기가 재미있다.

‘(전략) 소먹이기 장소의 개울가에는 감자 굽는 아궁이 장치가 오래 전부터 마련되어 있다. ㄷ자 모양으로 파진 아궁이의 가장자리에 조그만 돌멩이들을 아치모양으로 쌓아놓고 나뭇가지로 아궁이에 불을 땐다. 한참 불을 때다가 돌멩이가 불에 벌겋게 달구어 지면 불을 끄고 아궁이에서 재를 모두 끄집어낸다. 달구어진 돌멩이의 일부분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고, 그 위에 +, -, Y 등의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 각자 표시를 한 감자를 넣은 다음 나머지 돌멩이들로 덮는다. 그리고는 둘레를 찰흙으로 온통 발라 공기가 새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멋진 감자굴이 완성된다. 반시간쯤 지난 후 찰흙으로 발라둔 감자굴 위에 꼬챙이로 구멍을 뚫고 널따란 칡잎으로 깔때기를 만들어 고무신으로 떠온 물을 그 구멍 속에 붓는다. 이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뜨거운 김이 하늘로 치솟는다. 물은 준 다음에는 다시 구멍을 막는다. 이런 식의 물주기를 대여섯 군데 한다. 물주기가 끝나면 감자굴 바닥 쪽에 조그만 구멍을 내서 물을 빼낸다. 한참 후 흙을 걷어내면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감자가 된다. 집에서 삶은 감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이렇게 감자를 구워 먹고 나면 놀이판이 벌어진다. (하략)’

재택은 한디미 마을에서 생비량초등학교까지 산골짜기 개울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 나룻배가 있는 양천강을 건너 한길을 만나 시오리길을 걸어서 초등학교 6년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재택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은 모두 나룻배 타고 양천강을 건너 생비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재택보다 두 살 많은 장남인 형 만택은 강을 피해 아예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한다. 완고한 할아버지가 집안의 장손인 형은 강을 건너 다녀야 하는 위험한 생비량초등학교를 피해서 집현산 너머 진양군 미천면의 안간초등학교를 다니게 한 것이다. 그래서 형은 작은 삼촌집에 기거하면서 안간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어린 재택은 장손의 목숨과 다른 손자들의 목숨의 가치가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고 한다.

고교생 재택

“어려서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사실상 유학길에 있던 형은 엄마가 보고 싶어 거의 매주 산을 넘어 삼십리길을 혼자 왔다갔다 했는데 어린 나이에 그 길이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지금도 상상이 안 돼요. 맨 위 누나는 할아버지 반대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생비량 면장과 교장선생님을 만나 막걸리 한잔하고 5학년에 입학시켜 2년 다니고 졸업장을 받았대요. 그 뒤 만택 형은 장손이라 한약방을 하시던 작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주남중에 합격하여 중학교를 다녔어요. 나하고 아래 동생들은 생비량초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진주중·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여동생은 진주 삼현여고를 졸업했어요.”

 

#감나무 위 ‘트리하우스’는 나만의 상상공간

어린 재택은 초등 3학년까지 노는데 정신이 팔려 글자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가 4학년 가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재택의 기억에 가장 생생히 남는 것 중 하나가 집 앞마당에 있는 큰 감나무 위에 1, 2평 남짓의 ‘트리하우스’란다. 삼촌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비가림막 평상은 초중등학생 시절 재택의 ‘놀이 공간이자 사유의 공간’이었단다.

“감나무 위 평상에서 필요한 것들, 감자, 옥수수 간식은 물론 책과 연필 칼 등을 두레박통에 담아 줄로 끌어올려 생활하다보니 대변보러 내려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름방학 중에는 거의 하루 종일 그곳에서 보냈어요. 오줌은 나무 위에서 담 넘어 논을 향해 누면 됐지요. 도시 살던 친척 애들이 오면 환장을 했어요. 당시 나는 우리 동네에서 나무타기 선수 1등이었어요. 물론 그래서 어른들께 무척 걱정을 끼치기도 했지요. 지금도 내 머리와 얼굴에 흉터가 3, 4개 남아 있는데 다 그때 상처예요. 마을 골짜기 개울에는 가재, 피라미, 메기, 다슬기 등이 많아 직접 잡아 어른들의 안주감이나 반찬 마련에도 한 몫을 했지요. 여름밤 모캐불 피워놓고 가족들 둘러 앉아 탱자가시로 ‘고디(다슬기)’를 까먹던 행복한 기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려요.”

이러한 재택의 트리하우스는 나중에 교수 때 자신이 개발한 유아숲체험 프로그램에 그대로 활용된다. 2010년부터 산림청과 광역지자체와 연계해 전국에 수백 개의 유아숲체험원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 나무와 나무사이에 ‘트리하우스’를 만들어 넣었더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시설이 됐다고 한다. 재택의 어릴 적 고향의 자연은 생태유아교육의 원풍경이기도 했다.

1961년 생비량국민학교 졸업 기념 앨범 사진. 다섯 번째 줄 왼쪽 맨끝의 작은 꼬마가 재택. 첫 번째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앉은 사람이 재택의 6학년 담임이었던 박해출 선생님. 

#초등 6학년 담임선생님 덕분에 명문 진주중에 진학

재택은 지금도 잊지 못할 고마운 은사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박해출 선생님이란다. 박 선생님은 청주사범 졸업 후 생비량초등학교에 초임발령을 오셨는데 아이들에게 열정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박 선생은 학생들 가운데 공부를 좀 하는 아이들 부모님을 설득해 학교 사택에서 4, 5명 아이들에게 합숙무료과외를 해주었던 것이다. “박해출 선생님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당시 부산지역 동창들이 부부끼리 나서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기도 했지요. 참으로 고마우신 스승님이시죠.”

그래서 재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생비량초등학교 근처의 아버지 친구분 댁에 거의 6개월간 하숙을 하게 됐다. 박 선생의 열정적인 지도에 힘입어 그때 합숙무료괴외를 받은 졸업생들이 그해 모두 진주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생비량초등학교에서는 3년만에 생긴 경사였다.

“중학교는 진주에 사시는 셋째 할아버지 댁에서 형님과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매주말이면 엄마가 보고 싶어 삼십리를 버스 타고 진양군 집현면 대암리에서 내려 삼십리길을 걸어 집현산을 넘어 고향집 가서 하루 밤 자고 일요일 오후에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는 생활을 중고등학교 6년간을 반복했으니 다리 근육과 폐와 심장이 얼마나 강건해졌을지 아시겠죠? 지금 나의 건강은 당시의 고행 덕분이라 생각해요. 하루에 3, 4번 다니는 정기버스, 그마저도 시간이 일정치가 않아 놓치거나 많이 기다리게 되면 노니 염불한다고 버스비 15원도 아낄 겸 삼십리를 걸어가는 경우도 꽤나 많았지요.”

 

# “남에게 욕먹을 일 하지 마라, 항상 몸조심하고 건강해라” 부모님 말씀 명심

재택의 오늘이 있기까지 명심해온 말이 있단다. 재택 부모님의 자식 훈육지침은 딱 2가지인데, 남에게 욕먹을 일 하지 말라 하는 것과 항상 몸조심하고 건강해라 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인지 재택 남매는 동네에서 인사성이 누구보다 밝았다. 고향 마을에서 산을 넘어 대암리 버스 정류장까지 오가는 삼십리길 주변 마을 중에는 아버지의 5남 1녀 남매 중 맨 위 고모집과 둘째 삼촌집이 있었다. 물론 성씨는 다르지만 당시 오십리 내외로 혼사가 이루어지던 시절이라 누구 댁 자제라고 하면 서로 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길가다 만나게 되는 어른들에게는 인사를 잘해야 했다. 조부모와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다.

1966년 고3때 진주성에서 촉석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제일 작은 학생이 재택.

“진주중학교 입학 후 천재로 소문난 터라 교복 입고 모자 쓰고 가방 들고 삼십리길을 오가면서 주변에서 논밭 일 하시는 어른들을 보면 모자 벗고 깍듯이 인사를 하게 되지요. 저가 인사를 하면 눈이 침침하신 어르신이 ‘야야, 니가 누고?’하고 물으시면 ‘집현산 너머 한디미 단동띠 둘째 아들 재택입니더’라고 대답하죠. 그러면 그 어르신이 ‘아~ 그렇나, 잘 가래이!’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누구냐고 자세히 물어보면 자기들끼리 ‘자가 진주중핵교 합격했다는 천재라 카는 가아 아이가! 임수석씨, 단동띠 둘째아들, 아이가!’ 하면서 수군대는 얘기가 저 귀 뒷전에서 들려오는 기라. 그러면 가던 발걸음도 가벼워졌죠.”

이처럼 동네 어르신들의 칭찬은 소년 재택을 천재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생비량 동네 어르신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라서도 천재 노릇을 해야 하는 중고 6년의 학교생활이 재택을 서울대로 가게 만든 것 아닐까? 재택이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가게 된 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재택 아래 남동생 윤택과 막내 동생 종택이 이어서 서울대 문리대 중문학과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임수석씨 단동띠 재택네는 산청군 생비량면 한디미 산골에서 서울대생 3형제를 둔 수재집안으로 소문이 퍼져 산청군수가 주변을 지나가다가 일부러 찾아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3형제가 서울대를 갈 수 있게 된 바탕에는 부모님의 헌신 못지않게 바로 장손인 형이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아버지 농사일을 도와 우리 동생들의 중고등학교 학비 마련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동생을 비롯해서 우리 삼형제는 큰 형님의 희생과 양보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집안어른들도 형님에 대한 칭찬이 자자해요.”

필자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는 임 교수는 연신 함박웃음이다. [사진 = 조송현] 

이런 형에 비해 둘째인 재택은 한 때 제 욕심만 차리는 나쁜 놈으로 한동안 집안에서 욕을 먹는 신세가 되기도 했단다. 1967년 3월 진주고를 졸업할 무렵 집안 식구들은 물론 주변 친척어른들도 진주교대에 가서 2년 마치면 군대도 면제가 되니 바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아 동생들 학비와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는 것이 도리라는 분위기였다. 형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욱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택은 서울대 진학을 꿈꾼다. 엄청난 고민 끝에 재택은 고3 친구들 분위기와 담임교사의 조언에 따라 가족과 친척들의 바람을 뒤로 한 채 서울대 입시에 도전해 삼수만에 1969년 서울사대 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택은 서울에 셋째 삼촌댁이 있다는 게 서울대 진학 결심을 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이 시기 재택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합심하여 장독간에 정화수를 놓고 서울대 낙방하고 진주로 다시 내려오라고 빌고 또 빌었단다. 이 시기 재택은 서울 셋째 삼촌댁에 있으면서 종로학원을 다녔는데 중학교 입시 초등학생 과외를 하며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면서 대입준비를 하는 고달픈 재수생 생활을 2년간이나 했다. 이때 재택은 담배를 배웠고, 인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신세타령도 많이 했다고 한다.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하고 보니 나 같은 처지가 20명 정원 중에 4, 5명이나 있어 약간은 위로가 됐어요. 부모님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지원하게 된 것은 첫째 사범대학이라 수업료 면제로 등록금이 반값이고, 둘째, 과외지도 인기학과라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싶고, 셋째 졸업 후 중등교사를 넘어 대학교수 직을 얻게 될 가능성이 많이 열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저의 예견이 맞아 교육학과 69학번 동기생 20명 중에서 14명이 대학교수를 하였으니 졸업정원제 시행 등 대학교수 수요가 폭등하는 시대를 잘 만난 덕도 한 몫 본 것 같아요.”(계속)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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