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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은 사업 2년차에 접어들자 화물운수회사로서의 토대를 차근차근 구축했다. 제 1차에 이어 정부의 제 2차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건설 관련 물량이 대폭 증가했고 수출입 화물의 규모 또한 계속 팽창하는 추세였다. 이정식은 덕희의 양장점을 연락처로 삼다가 교통 요지인 충무동에 사무실을 따로 얻었고, 자신의 트럭을 맡을 기사를 채용했다. 화물운송 알선사업 분야로 손을 뻗기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때를 만난 것이었다. 항만 관련 종사자와 해운업계 인맥을 통해 얻어진 정보는 그의 큰 경쟁력이 되었다. 그는 기존 계약물량의 증가세에 만족하지 않고 신규 발생 화물의 선점에 주력했다. 일이 있는 곳엔 사람이 몰리는 법, 지입 차량도 한 대 두 대 늘어나기 시작했고 알선수수료 매출이 덩달아 올라갔다. 회사 차량 또한 추가로 구입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를 간과하지 않은 트럭 판매사원이 수시로 그를 찾아왔고 일자리를 찾는 운전기사의 방문도 이어졌다. 이정식의 회사는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 앞을 향해 힘차게 내달릴 추진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5학년 여름방학을 맞은 인호는 혼자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대구역까지 경숙이 바래다주었다. 경숙은 역내 입장권을 사서 인호가 탈 기차를 기다렸다가 기차표에 적힌 번호의 좌석으로 그를 안내했다. 열차 출발 직전에 내린 그녀는 차창에서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인호를 눈에 담으며 움직이는 열차를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점점 멀어지는 열차를 보내고 돌아서면서 그녀는 언젠가 인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올 것이란 생각과 맞닥뜨렸다. 과연 그 날이 온다면 지금처럼 웃으며 보낼 수 있을지 하는 생각에 그만 앞이 허허로웠다.
경숙은 오래 전 잠가두었던 기억의 다락방 문을 열었다. 거기서 돌쟁이 인호를 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았다. 순이가 홍역을 앓기 시작하면서 인호를 대구로 데려와 경숙이 한 달 가까이 돌보던 때가 있었다. 이모 품이 엄마와 마찬가지였던지 아기는 크게 보채는 일 없이 잘 지냈다. 아기를 포대기에 싸 업고 바깥바람 쐬러 나가면 조카가 아닌 자식이 생긴 것 같은 행복감이 그녀를 포근히 감싸는 것 같았다. 열병에 시달리는 어린 딸을 잃을까봐 동생이 노심초사하는 동안 행복에 잠긴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순이를 가슴에 묻고 슬픔에 지쳐 있는 덕희에게 인호를 돌려보내야 했다. 제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인호의 손짓을 느끼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경숙은 바로 그날의 그 떨리는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가까스로 진정시키곤 집으로 돌아왔다.
부산역에는 덕희가 준호를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인호가 출구를 앞두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거의 동시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인호가 손을 들어 보이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이 준호가 재빠르게 다가갔다.
“형아, 기차 타고 오이까 재밌더나? 진짜 빠르제?”
“그래. 전차는 저리 가라데이.”
준호가 기차여행 소감을 예사롭게 내뱉는 형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사이 인호는 덕희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엄마아”
“보자. 우리 인호, 그새 또 컸네.”
준호를 옆에 두고 덕희 앞에 선 인호는 엄마가 내미는 팔에 윗몸을 맡겼다. 한창 자라날 때라 륙색을 매고 있는 인호의 등이 전에 비해 더욱 듬직해보였다. 덕희는 왼손으론 인호의 어깨를 감싸고 오른손으론 준호의 등을 비스듬히 감고 걸었다. 그녀는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자꾸 인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달랬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갔다. 짚신 장사도 한자리에서 삼년이라 하듯 오년 째 접어든 양장점은 차츰 손님이 늘어나 덕희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봉제를 거드는 아주머니가 들어왔고 볼일이 생길 때면 가게를 비우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큰방 출입구 옆 벽면에 걸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용두산 공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꽃시계 앞에 선 네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호는 차려 자세를 했고 그 옆의 준호는 팔을 뒤로 보내 덕희의 손을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정식은 인호의 뒤편에서 한발 옆으로 나와 오른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감싼 모습이었다. 사진은 인호에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자신이 돌아와 있어야 할 자리가 이곳임을 일깨워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의 복귀를 바라고 있음을 인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아버지의 일방적인 뜻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 못지않게 이모의 동의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인호 또한 국민학교를 마치면 돌아간다는 의지를 애써 가지려 하지 않았다. 처음엔 어른들의 뜻에 따른 자신의 대구행이 불만스러웠으나 그런 감정은 개운하게 씻겨나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이 모든 게 하느님 뜻이란 생각을 갖게 되면서 자신이 한결 성장했음을 느꼈다. 자신의 미래를 하느님 뜻에 따라 열어가고 싶었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인호를 흔든 건 준호의 목소리였다.
“형아, 우리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자. 정글짐이라 카는 기 새로 생깄는데 한 칸씩 올라가는 기 재밌데이.”
“응, 그래. 함 가보까. 우리 학교에는 그기 아직 없거등.”
인호는 ‘우리 학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는 이전에 다녔던 학교로 준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앞장서서 가는 준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말이데이, 대구에서 쭉 학교 다닐 생각도 있는데 니는 우째 생각하노?”
준호가 뒤돌아서며 휘둥그런 눈을 인호 앞에 내던졌다.
“와? 대구가 더 좋나? 그래도 우리 가족끼리 같이 살아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래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데이.”
예상보다 거세게 반대하는 준호였다. 인호는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어 준호를 앞질러 학교 운동장을 밟았다. 정글짐을 타고 놀다가 깡통 차기를 하는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 중에는 준호의 친구도 있었고, 예전에 인호와 같은 반을 했던 아이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형제는 땀으로 러닝셔츠가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열심히 뛰어놀았다.
밤이 깊었다. 이정식은 통행금지 예비사이렌이 울리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귀가했다. 선박회사 사람들과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아직 취흥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덮어놓고 인호부터 찾았다.
“인호, 자는가? ”
“자요. 오늘 지 혼자서 기차 타고 왔제, 준호 하고 놀다가 둘이 목욕탕 갔다 왔제, 피곤할 거라예.”
“아버지가 왔으이, 아니 지가 오랜만에 집에 왔으이 인사는 해야지.”
“놔두이소. 지금 몇 신데 자는 애를 깨워예.”
덕희가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려는 이정식을 만류했다.
“그래도 우리 장남 얼굴은 함 봐야지”
“자는 애를......내일 아침에 보믄 되지.”
“그냥 얼굴만 본다니까.”
기어이 아이들 방으로 들어온 이정식은 인호의 잠든 얼굴을 문 밖에서 흘러들어온 빛과 함께 들여다보았다. 모로 누워 자는 준호를 반듯하게 눕혀주고 옆에 누운 인호의 볼을 만지려다 혹 깨기라도 할까 봐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러나 인호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고 아버지가 방에 들어온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잠에서 깬 눈으로 이정식이 방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지만 인호는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 일어나기 싫어서라기보다 아버지가 조심스러웠다. 얼마 전 큰아들이 언제라도 제 자리로 돌아오길 원한다는 이정식의 뜻이 덕희를 통해 경숙에게 전해진 사실을 인호도 듣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후 경숙이 인호를 불러 부산에 돌아가고 싶은지 소상하게 물었던 것이었다. 인호는 대구와 부산에 대한 마음이 반반이라고 말하기엔 대구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모의 그윽한 눈빛에 인호는 그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갈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 날의 일이 되살아나면서 자신이 그러한 의사표시를 했다는 걸 아버지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려버렸다. 밖에서 아버지와 엄마가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새끼지만 저 놈의 속을 알 수가 없네. 딴 애들 같으믄 집에 보내달라고 졸라도 여러 번 졸랐을 낀데 말이야.”
“제 이모가 워낙 잘해주니까 그라는 거지예. 암만 생각해도 육학년 오르기 전에 데려온다는 거 나도 안 내킵니더. 우리 입장도 입장이지만 언니가 인호한테 기울이는 정이 엔간해야지예. 국민학교 졸업은 거기서 시킵시더.”
엄마가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 같아 인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산으로 돌아오려니 이모의 얼굴이 맴돌고 대구에서 계속 지내려니 가족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부산의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6학년에 미리 전학 오는 게 좋을 거라는 아버지의 뜻엔 따르고 싶진 않았다. 다시 또 정든 학교를 옮기는 게 내키지 않았고, 이모도 이모지만 세실리아와 헤어지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잠이 쉬 올 것 같지 않았다. 잠이 잘 안 올 때는 푸른 목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을 상상하며 한 마리 한 마리씩 백 마리만 세면 된다하던 누군가의 말이 기억나 인호는 눈을 감고 양떼를 헤아렸다. 손을 꼽으며 세어가던 중 푸른 목장으로 세실리아를 불러들였다. 세실리아는 새끼 양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인호더러 오라고 손짓했다. 세실리아가 새끼 양을 안아 그의 품에 건네주었다. 인호가 새끼 양을 끌어안았을 때 세실리아는 푸른 풀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인호는 양을 껴안은 채 그녀를 쫓았다. 새끼 양은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힘껏 달렸지만 숨이 차지도 않았다. 세실리아와 좀 더 뛰어 놀고 싶었는데 서서히 잠 속으로 몰고 가는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걸 떨치지 못했다.
가을이 깊었다. 마당의 감나무에 주홍빛으로 물든 감이 익어가던 어느 날 오후였다. 인호가 잠시 정신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당에서 인호가 팽이치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세실리아는 제 방 창문을 열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팽이가 돌다가 힘이 빠지는 기미를 보이면 인호는 팽이채로 두어 번 쳐주었다. 그러면 팽이가 다시 힘을 받아 회전 속도를 올렸다. 세실리아가 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날따라 팽이가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았다. 인호는 세실리아에게 팽이채를 건네는 시늉을 하며 마당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세실아, 니도 한 번 해봐라. 재밌데이.”
“아니, 그냥 보는 것도 재미있는걸.”
“그래도 이거 그냥 보는 거하고 해보는 거하고 마니 다르데이, 나온나.”
“오빠, 나는 팽이보다는 저게 더 갖고 싶어.”
세실리아는 바깥채 처마 쪽으로 뻗어 있는 감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그 중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탐스러운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창에서 몸을 내밀고 손을 뻗으면 가지 끝이 닿을까 말까한 거리였다.
“저거 꺾어서 벽에 걸어두면 참 좋겠다.”
인호는 감이 탐스럽게 달린 나뭇가지를 벽에 걸어둔 것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세실리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사이 한참 잘 돌아가던 팽이는 느슨해진 동작으로 뱅그르르 몇 바퀴 더 돌더니 그만 땅에 떨어진 감처럼 주저앉아버렸다. 인호는 세실리아가 가리킨 감나무 가지에 주던 시선을 그 아래 바깥채 창문 있는 곳으로 옮겼다. 인호가 이곳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해도 창턱이 인호가 발돋움한 눈높이였으나 이젠 그의 눈 아래 놓여 있었다. 인호는 다시 한 번 처마와 창틀 사이를 살펴본 다음 결심을 굳혔다.
“세실아, 저거 내가 꺾어주께. 창턱에 올라가서 손만 쭉 뻗으믄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인호의 고조된 목소리에 불안을 느낀 세실리아가 말릴 생각을 했다.
“안 돼, 오빠! 언니한테도 말해봤는데 안 된다 했어. 가지 자르는 가위도 없잖아.”
“괜찮아.”
인호는 두 손으로 가지를 붙잡고 꺾는 시늉을 하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러면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보고 하자.”
세실리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인호는 지금 당장 가지를 꺾어 그녀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일념에 가득 찼다.
“자신 있으니까 오빠 하는 거 잘 보고 있거래이.”
“정말 할 수 있겠어? ”
“하모, 내 퍼뜩 끝내께.”
인호가 뜻을 굽히지 않자 세실리아도 용기를 가져보았다.
“그럼 오빠, 밖에서 올라가지 말고 우리 방에서 올라가.”
세실리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호는 바깥채 툇마루를 올랐다. 세실리아가 방에 들어서는 인호를 긴장된 눈빛으로 맞았다. 인호가 창 앞으로 다가가자 세실리아가 비켜섰다. 창턱에 올라선 인호는 세실리아가 가리켰던 감나무 가지로 손을 뻗어보았다. 한 손은 창틀을 꼭 잡았다. 몸이 비스듬히 기운 상태가 되어서야 가지의 목표 지점이 손에 닿았다. 혹시 꺾어질까 손에 쥐고 힘을 줘 비틀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인호는 한 단계 높은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는 댓돌 위에 벗어둔 운동화를 가지고 왔다. 창턱에서 몸을 기울여 감나무 가지를 두 손으로 붙잡는 동시에 마당으로 뛰어내릴 참이었다.
“오빠, 다칠지 몰라. 하지 말자.”
또 다시 불안해하는 세실리아를 보니 인호 또한 긴장이 되면서도 태연스레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일단 기도하제이.”
인호는 성호를 그으며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주님이 살펴주시길 빌었다. 세실리아도 결국은 두 손을 모았다. 기도 의식을 끝내고 인호는 한결 대범해진 자세로 창턱에 올라 운동화를 신고 일어섰다. 뛰어내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감이 예닐곱 개 이상 달려 있는 적당한 지점에서 가지를 잡고 꺾어야 하는 게 중요했다. 인호는 원하는 지점의 가지 아래를 왼손으로 쥐고, 창틀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바로 옆으로 끌어들여 두 손으로 동시에 힘을 가하면 가지가 뚝 꺾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그와 동시에 꺾어진 가지를 쥔 채 마당으로 착지하는 다음 장면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인호는 목표로 정한 가지 쪽으로 왼손을 갖다 댔다. 창턱에서 바깥쪽으로 몸의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창틀을 붙잡은 오른손을 왼손이 뻗어 있는 곳으로 보내기 위해선 발을 떼면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인호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헤아렸다. 셋을 셀 때 발을 떼기로 했다. 발이 창턱을 벗어나 허공을 내딛는 순간 오른손이 가지를 채 잡기도 전에 인호의 체중이 실린 가지가 휘청하면서 아래로 축 처졌다. 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인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자빠졌는데 뒤통수엔 큰 돌멩이로 세게 맞은 듯 충격이 따랐다.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세실리아는 인호가 쓰러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마당으로 쫓아 나왔다. 경숙과 안나는 함께 장보러 나갔고, 루시아는 학교에서 올 시간이 되지 않았다. 놀란 가운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세실리아는 그만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한 쪽으로 기우듬한 인호의 머리 바로 밑엔 팽이가 있었다. 머리를 들어 팽이를 치우고 나니 손에 피가 묻어났다. 팽이에 부딪힌 머리에서 피가 맺혀 있었던 것이었다. 세실리아는 아까 인호가 팽이채를 주며 쳐보라 했을 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손가락으로 감나무 가지를 가리키지만 않았어도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요한 오빠. 눈 떠 봐, 으응. 흑흑.”
세실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인호의 목과 어깨를 끌어안고 일으켜 세우려 온힘을 모았다. 상체는 겨우 들어 올렸으나 더 이상은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정신을 잃은 인호의 귓바퀴에 잠잠한 공백을 깨뜨리는 세실리아의 울음소리가 와 닿았다. 꽉 막혀 있다 뚫린 것처럼 세실리아의 울음이 귓속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빛이 느껴졌다. 인호가 눈을 뜬 것이었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그의 상체를 양팔로 붙잡고 있는 세실리아의 눈물범벅된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인호가 눈뜬 것을 보자 세실리아는 눈물 맺힌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오빠, 정신 들어? 병원 가야 되지? 흑흑.”
“괜찮아. 울지 마.”
인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을 떠안고 있는 세실리아가 힘들 것 같아 그녀의 팔을 풀게 하고 몸을 다시 눕히려 했다.
“오빠. 머리에 피 났어! 머리 땅에 대지 마.”
“피?”
인호는 누운 자세로 머리를 살짝 들어 손을 대어보았다. 뒤통수에 혹이 생겨 불룩한 게 만져졌고 피가 묻어나왔다.
“피는 별로 안 난 거 같은데....... 아프지도 않으이 일어나께.”
일어서려는 인호의 손을 세실리아가 먼저 일어서서 잡아주었다.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병원 갈 정도는 아이다. 코피 터져도 병원 안 가더라 아이가.”
감나무는 인호가 한 손으로 잡았던 부위는 부러지지 않았고, 아래쪽 굵은 가지가 쭉 찢어진 모습으로 꺾여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모한테 꾸중을 들을 것 같았다. 세실리아도 이제 그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혼나겠다, 그지?”
“나만 혼나면 되지 뭐. 세실이 니는 가마이 있으라, 알았제!”
인호는 이모가 놀랠지는 몰라도 크게 나무라지는 않을 거라 미루어 짐작했다.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우리 엄마 방에 빨간약 있는데 내가 발라줄게.”
“니가 마니 놀랬겠다. 오빠가 미안. 근데...... 세실아.”
“응?”
“아까 내 기절한 거 맞제? 내가 아직 기절해본 적이 없거든. 근데 말이데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기절이 니를 위해 한 거라 생각하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질라 카네.”
인호는 큰 공을 세운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세실리아는 비로소 볼우물이 지는 예쁜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인호는 꺾인 채 축 처져 있는 감나무 가지가 보기 흉해 어찌할까 궁리 끝에 원줄기와 부러진 가지 사이를 톱질하기로 했다. 그 사이 세실리아는 인호에게 발라줄 약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놓고 올라서면 톱날은 충분히 닿을 것 같았다. 부러진 부분을 잘라내고 세실리아가 가리키던 가지 부위를 원하는 만큼 잘라주면 어쨌든 목적은 이루는 셈이었다. 세실리아가 빨간 소독약을 가져와 솜에 찍어서 인호의 상처 부위에 발랐다. 약을 바른 부위가 따끔했다. 세실리아가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덧발라주고는 그래도 미심쩍은지 한 번 더 바르려 하는 걸 인호가 웃으며 제지시켰다.
인호가 톱을 찾아서 안채에서 막 나오는데 경숙과 안나가 장보따리를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감나무 가지가 꺾어져 있는 게 바로 눈에 띄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호가 그들 앞으로 다가서기 전에 세실리아가 먼저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즉, 자기 부탁으로 오빠가 가지를 꺾어주려다 벌어진 일이란 것이었다. 인호가 뒤에서 말하지 말라는 손짓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잠시 기절한 상황까지 고했다. 경숙이 장보따리를 내려놓고 인호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걱정스런 안색을 감추지 않고 있는 동안 안나도 상처를 확인하며 물었다.
“요한아,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고 그러지는 않니?”
“아무렇지도 않아예.”
인호는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켜주려고 목을 좌우로 돌리고 뒤로 젖히기도 했다. 안나가 미소를 보였다.
“언니, 조금 붓긴 했는데 상처가 깊은 건 아니네요. 요한이도 별 이상 없다 하니 염려 안 해도 되겠어요.”
경숙은 안나의 말대로 별일 없기를 빌며 걱정을 밀어냈다. 그리고 무안해하는 인호를 향해 따뜻한 애정이 담긴 눈빛을 던졌다.
“큰일 날 뻔했데이. 그라니까 우리 요한이가 세실리아한테 오빠노릇 한다꼬 씩씩하게 나선 기구만.”
한 마디 꾸지람도 없이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말을 듣게 되자 인호는 양 입술을 오므려 쑥 내밀었다. 민망하거나 어색한 입장에 처하면 인호가 곧잘 보이는 버릇이었다. 감나무 가지 처리는 안나가 맡았다. 그녀가 벽에 걸어두기 적당한 크기로 감이 달린 가지를 잘랐고, 그걸 세실리아가 들고 방으로 가지고 가는 모습을 인호는 흐뭇하게 눈에 담고 있었다.
그날 밤 인호가 잠들기 전 경숙은 그의 방으로 와 머리의 상처를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부기도 웬만큼 가라앉았고 잘 아물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 여름방학 전에 덕희가 잠시 들러 남기고 간 말을 상기해보았다. 인호가 5학년을 마치면 부산으로 돌아와 6학년 과정을 밟고 중학교 진학하는 게 인호에게 좋을 것 같다는 이정식의 생각을 전한 것이었다. 덕희는 그 말에 덧붙여 자신은 이정식과는 달리 경숙의 뜻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니, 언니가 원한담 더 데리고 계시이소. 국민학교는 마치고 데려오는 걸로 이서방한테 내가 못을 단단히 박아 놓을께예.”
덕희는 인호가 경숙에게도 아들과 다름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결국은 인호를 위해서라도 그를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낼 거라 믿었다. 경숙 또한 이왕 보낼 거라면 이정식의 말대로 미리 보내는 게 인호가 중학교에 적응하기 더 좋을 거란 판단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인호와 그 문제를 두고 한 번 더 확실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요한아, 이모가 가만 생각해본께 중학교 드가기 전에 부산으로 전학하는 기 맞겠다 싶은데, 니도 자알 생각해봐라.”
‘이모. 내가 말했다 아이가. 전학 안 갈 끼라꼬. 그라고 중학교도 여서 다닐 끼다. 부산은 나중에 커서 가믄 안 되나.”
“아이다. 중학교는 부산 가서 다녀야지.”
“부산 안 갈 끼다. 이모가 같이 가믄 몰라도.”
“이모는 대구 사람 됐으이 여서 살아야지.”
“그라믄 나도 대구 사람 할 끼다. 내가 이담에 커서 엄마랑 이모랑 다 같이 살믄 된다 아이가. 그라고 세실이도 같이 살자 할 끼다.”
인호는 훗날 세실리아에게 고백할 말을 이번 기회에 이모에게 먼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세실이랑 같이 살라믄 내가 신랑 하고 세실이가 각시 하믄 되제?”
경숙은 난데없는 인호의 제안이 엉뚱하면서도 솔깃하게 들렸다. 그녀는 미소를 건네며 인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떠보았다.
“세실이한테도 이야기한 기가?”
“아직, 이모. 아직까진 비밀이데이. 세실이랑 결혼식은 우리 성당 혼배미사로 할 낀께 이모가 알아서 챙기줄 꺼제? 어쨌든 학교는 쭈욱 대구에서 댕길 끼다! 그라고 나는 세실이 신랑 할 끼다!”
인호는 이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선언했다. 경숙은 평소와 달리 패기에 가득 찬 인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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