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8) - 제3장 성장 그리고 변화

3. 성장 그리고 변화 

이광 승인 2023.04.30 20:58 | 최종 수정 2023.06.26 15:23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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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제 방에서 루시아, 세실리아와 함께 매일 하는 공부는 쭉 이어졌다. 루시아가 주도하는 면학 분위기는 인호의 성적 향상에 기여하여 반에서 손꼽는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세실리아 또한 인호한테 물려받은 책과 참고서로 공부하면서 인호가 6학년 때 거둔 성적 이상으로 시험 점수를 잘 받았다. 인호는 학교 중간고사에서 평균 90점이 넘는 좋은 점수가 나왔는데 국어 과목만큼은 만점이었다. 인호의 국어 실력은 루시아도 인정했다. 이는 인호가 또래들에 비해 많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 사실은 부산에도 알려져 이정식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주었다. 인호의 원위치 복귀를 관철시키지 못한 이정식은 고등학교는 반드시 부산에서 진학한다는 조건을 달고 인호의 대구 생활 연장을 허락했다. 형편이 어려울 때 자식을 보내놓고 이제 살 만하니까 도로 보내달라고 거듭 요구하는 것도 낯간지럽긴 했다. 게다가 중학교를 대구에서 다니겠다고 한사코 버티는 아들 녀석의 고집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정식은 평소 고분고분하면서도 황소고집도 부릴 줄 아는 아들이 밉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저놈 고집이 딱 날 빼박았어.”

이정식의 사업은 그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전국적인 화물운수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기대 이상의 수익이 발생하면서 대신동에서도 부자들이 사는 아랫동네로 이사했다. 충무동에 얻은 사무실은 회사의 규모에 비해 협소해 부두와 가까우면서 시내 한복판인 중앙동에 위치한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부자가 될 거라고 장담하던 동생 준호의 말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었다. 인호가 대구에서 중학교를 마치는 것으로 결정하고 난 후 덕희는 다달이 경숙에게 돈을 부치기로 했다. 두 식구 생활비가 될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 덕에 여유가 생긴 경숙은 전화 가입 신청을 했고 한 달여 기다린 끝에 전화가 개통되었다. 인호의 중간고사 전교 석차가 상위권이란 소식을 전한 것도 그 전화를 통해서였다. 근황을 동시에 나눌 수 있는 전화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이정식은 사업과 연관된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당시엔 귀한 손님은 집으로 모시는 것이 정중한 대접이었다. 대신동에서도 부자들이 사는 아랫동네로 이사한 이정식은 곧잘 집으로 손님들을 초대했다. 주로 부두 관계자와 항만 하역업체 간부들, 선박회사 임직원들이었다. 시청이나 경찰청 등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 회사 직원들과 기사들을 불러 저녁을 함께 하면서 사기진작에도 신경을 썼다. 그 바람에 집안일이 부쩍 늘어난 덕희는 양장점을 물색하던 사람에게 가게를 넘겨주고 규모가 커져버린 안살림을 맡아야 했다. 인호를 놀라게 한 건 아버지가 자가용 승용차로 출퇴근한다는 소식이었다. 승용차를 전담하는 운전기사를 채용했는데 황 기사라고 했다. 자가용 승용차는 한 마디로 줄여 자가용으로 통했고, 자가용은 그야말로 부자를 입증하는 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인호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토요일 이른 오후였다. 경숙의 집 앞에 ‘코로나’라는 이름을 가진 자동차가 한 대 멈추어 섰다. 바로 이정식이 구입했다는 차였다. 주말에 인호를 데려올 차를 보내겠다는 전화가 있어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정식의 생일을 맞아 모처럼 다 모여서 저녁을 함께하자는 것이었는데 경숙은 급한 한복 일감 때문에 인호 혼자 보내기로 했다. 황 기사란 사람이 차에서 내려 경숙을 사모님이라 칭하며 깍듯이 인사했다. 체구는 작은 편이지만 떡 벌어진 어깨가 강인해 보이는데다 네모난 얼굴로 첫인상은 다소 무뚝뚝했다. 경숙은 그를 안채의 대청마루로 안내하여 차를 대접했다. 

“혹 점심 안했으믄 얼른 차리드릴 테이 좀 드시고 가이소.”
“괜찮슴니더. 댁에 오기 전에 한 그릇 후딱 했심더. 아까 밖에 나가던 아가 인호 아인가예? 딱 보이 알겠던데, 전교 일등이라면서요. 우짜믄 그리 공부도 잘 하는고.”
“아, 네에. 국어는 일등이지예.”

경숙은 겉보기완 전혀 다르게 말투가 싹싹한 황 기사에게 웃음을 보이며 대문 앞에 있는 인호를 불렀다. 인호는 황 기사가 세워둔 차를 구경하면서 세실리아가 오고 있나 살피고 있었다. 경숙은 아저씨께 인사하고 어서 부산 갈 준비하라고 일렀다. 인호는 황 기사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이고. 우리 인호 도련님이네. 반갑다야.”

도련님이란 호칭이 듣기 어색했지만 친근감 있게 접근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인호는 당장 부산으로 출발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병원에 간 세실리아가 아직 오지 않아서였다. 루시아와 달리 세실리아는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맞추기 위해 안나가 안과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경숙은 기다리고 있을 덕희를 생각해 자꾸 꾸물거리는 인호를 차에 태우고 이정식의 생일선물로 준비한 풍기인삼을 실었다.

“세실이 아파 병원 간 기 아이니 걱정 말고 퍼뜩 부산 갔다 오이라. 내일 되믄 볼 낀데 뭘.”

경숙의 재촉에 황 기사는 빙긋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승용차 좌석이 주는 편안한 느낌은 아버지가 몰던 트럭의 조수석과는 확연히 달랐다. 인호는 마치 자신이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황 기사는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인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주었다. 그는 삼십대 초반으로 그 역시 군대에서 운전을 배웠는데 집은 구덕산 저수지 아래쪽이라고 했다. 그 곳은 인호네가 이정식이 두부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에 살던 동네였다. 인호가 생각하기에도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는 잠시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돌이켜보았다. 차가 부산시내로 진입해 대신동과 가까워질수록 낯익은 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변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넓고 푸른 잎들이 변함없는 풍경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공설운동장이 보였다. 차는 공설운동장 앞에서 좌회전하여 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가다가 멈춰 섰다. 황 기사는 크락숀을 길게 두 번 울렸다.

“자, 다 왔다. 아저씬 회사 가서 사장님 모시올 테니까 어서 집에 들어가보래이.”

새로 옮긴 집은 인호가 공설운동장 쪽으로 동전을 주우러 다닐 때 지나가던 큰길가에 있었다. 마당에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는 집이었다. 또래들과 그 동네를 지날 때면 초인종 누르기 놀이를 하곤 했다. 대문에 초인종이 붙어 있는 집을 골라 벨을 누른 다음 집안에서 누군가가 “누구요?” 하고 나올 때쯤 달아나는 놀이였다. 인호는 그 집 초인종도 눌러본 것 같은 기억을 되살리며 손을 갖다 대었다. 이제는 초인종을 눌러도 달아날 이유가 없는 집이었다.

덕희는 저녁상에 잡채를 올리려고 당면을 삶고 시금치를 다듬느라 바삐 손을 움직이던 중이었다. 인호의 도착을 알리는 크락숀 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집안 사정이 지금같이 여유로워진 이면에는 아들을 언니에게 맡겨야 했던 지난날의 아픔이 깔려 있었다. 그동안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마웠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덕희는 혹 눈물이 흘렀나 싶어 손바닥을 대고 훔쳐본 다음 큰소리로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부엌을 나왔다.

“우리 인호 왔구나아. 준호야, 형 왔데이!”

인호 또한 전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엄마를 보자 반가움과 더불어 기쁨으로 뿌듯했다. 그는 먼저 이모가 준 아버지 생일선물을 엄마에게 건넸다. 모자가 서로 껴안는 사이 준호가 현관문을 열고 형을 반겼다. 태권도 도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복장이었다. 허리춤엔 청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준호가 올 초부터 태권도 도장을 다니는데 아주 열심히 한다는 이야긴 듣고 있었다.

“형 오믄 보여준다 카더만 아예 옷을 입어버렸네.” 

덕희는 태권소년의 등장을 반기는 인호의 표정을 확인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인호는 삼년 전의 자신보다 훨씬 활동적으로 생활하는 동생이 늠름해보였다. 두 형제는 사나이답게 악수를 나누었다.

“형. 내 지금은 청띠지만 좀 있음 홍띠 맬 끼다.”
“그래. 시범 한번 보이주봐라.”
“그라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호는 마당 한가운데로 가더니 태권도의 기본 품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손동작도 절도 있었지만 제 머리 위로 올라가는 발차기는 위력도 제법 있어 보였다. 인호가 박수를 치며 잘한다는 감탄을 아끼지 않자 준호는 형에게서 인정받았다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반짝였다. 형에게 그 동안 익힌 품새의 이름을 일일이 알려준 다음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최선을 다하느라 준호의 이마와 콧잔등엔 땀이 맺혀 있었다. 예전 판잣집 코흘리개 때완 전혀 다른 활발한 모습이었다. 

준호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인호는 이 방 저 방을 빙 둘러보았다. 준호 바로 옆방이 제 방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부산으로 와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대비해 비워둔 방이었다. 아직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새 책상과 의자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호는 주인이 들렀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대고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언젠가 돌아와 여기 앉아야 할 날을 생각했다. 돌아온다는 것, 그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이지만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는 아니었다. 목표를 위해선 다시 돌아가야만 했고 그 당연한 사실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미 명확한 목표가 하나 있음을 떠올렸다. 세실리아와 결혼하겠다는 뜻은 이모에게 밝힌 적 있지만 그 뒤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인호가 가슴 깊이 간직한 소중한 목표였다.

큰방에는 시내의 전파상에서 본 적 있던 텔레비전이 떡하니 한쪽 벽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인호가 어떻게 해야 텔레비전이 켜지는지 살피던 중 준호가 들어왔다. 준호는 능숙하게 전원 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형,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이 시간에도 테레비 한데이. 자, 요기 케이비에스고, 요거는 엠비씨, 그라고 요기 티비씨고.”

준호가 채널을 돌릴 때마다 다른 방송국의 화면이 나왔다. 준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집은 안테나가 최고 좋은 기라서 미군 방송도 볼 수 있고 일본 거도 잘 나온데이.”

준호가 계속 채널을 돌리자 AFKN의 영어 방송과 NHK 등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모 옆에서 엎드려 누워 듣던 라디오와 달리 사람 얼굴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비교가 안 되는 성능이었다. 인호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다준 흥미로운 발명품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편 동생 집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경숙도 가격을 알아보는 등 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인호는 준호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거 몇 인친지 아나? 우리도 좀 있으믄 십구 인치 테레비 살 끼다.”

그러자 준호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거는 이십사 인치라 카더라.”

밖에서 크락숀 소리가 울리더니 부엌에서 덕희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야들아, 아부지 오싰다아.”

이정식은 오는 길에 깡통시장을 들러 양과자보다 비싼 바나나를 한 송이 사가지고 왔다. 그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맛보는 귀한 바나나를 두 아들에게 맘껏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왔던 것이었다. 인호는 그가 원하는 대로 대구에서의 중학교 진학을 허락해준 아버지에게 평소보다 더 정성을 담아 인사했다. 감청색 양복에 자줏빛이 돋보이는 넥타이를 한 아버지의 모습은 인호가 보기에도 근사한 사장님이었다. 

“아부지, 생신 축하합니더.”
“허허, 오늘이 이 아부지 생일이 맞긴 맞구나. 우리 장남이 와서 축하를 해주니 기분 최고다, 최고!”

이정식은 아낌없는 미소와 함께 인호의 양 어깨에 나누어 얹은 두 손을 한참동안 거두지 않았다. 그는 자식의 성장이라는 자연현상 앞에서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정식이 평상복을 갈아입고 세면을 하는 동안 덕희가 정성을 다해 장만한 생일상이 차려졌다. 팥밥과 미역국이 오르고 불고기와 함께 그릇에 수북이 담긴 잡채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오랜만에 한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였다. 모두 밥상 앞에 앉았을 때 인호는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나지막한 소리로 바쳤다.

“주여,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인호는 준호가 전처럼 기도를 따라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는 그를 떠보았다.

“기도 잘 하더마는 와 안 하노?”

준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 그거 인자 다 까묵었다. 그라고 오늘은 생일 축하 노랠 불러야지.”
"그래, 기도는 인호가 대표로 했으니 됐고, 생일 축하 노래는 준호가 해 봐라.” 

이정식의 말에 준호가 노래를 시작하자 인호도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이정식은 출출했던지 그새 숟가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자, 이제 축하 노래도 들었으니 밥 묵자꾸나. 엄마가 진수성찬을 차렸네.”

이정식이 먼저 미역국을 떠먹자 다들 숟가락을 들었다. 덕희는 인호와 준호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두 아들이 커가면서 드러나는 성격이 다 자기 속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인호에게 배려심이 두드러진다면 준호는 맺고 끊는 태도가 확실했다. 준호는 요즘 부쩍 밥이 당기는지 밥그릇 위에 불고기를 올려놓고 입 안이 가득하도록 숟가락에 담았다. 그 사이 덕희와 인호의 눈이 마주쳤다. 인호는 덕희를 향해 가지런한 윗니를 드러내며 미소를 보냈다. 순간 덕희는 인호에게서 자신이 아닌 언니 경숙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부엌으로 옮기는 일을 인호가 돕자 준호도 거들었다. 덕희는 상을 행주로 한번 훔친 다음 이정식이 사온 바나나를 올렸다. 두 아들이 바나나를 한 입씩 베어 먹는 모습을 푸근하게 지켜보던 이정식이 인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놈의 자슥. 부산이 싫어서 안 온 건 아일 끼고, 대구가 뭐가 그리 좋더노?”

아버지의 어조가 나무라는 투가 아니었기에 인호는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부산도 오고 싶었지만 대구 떠날라이 너무 섭섭해서예. 그라고 대구에서 공부하는 기 더 나을 거 같아서예. 루시아라고 바깥채 사는 누나 도움 마니 받는다 아입니꺼.”
“그래, 그 얘긴 나도 들었다. 니가 자알 하고 있다 해서 안심은 된다마는 니는 아버지 뒤를 이을 우리 집 장남이다, 집을 너무 오래 비우는 건 아이다. 고등학교는 부산서 다니는 거 명심하거래이.”
“예에.”

인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이정식은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작정으로 목소리에 한껏 힘을 실었다.

“니가 그동안 이모한테 정이 들어서 그라는 거 다 안다. 이모도 그때 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니를 보내겠다 해서 아부지가 양보한 기다. 아부지 맘 알겠제?”
“예에.”

인호가 좀 전보다 큰소리로 답하자 이정식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작은 상자 하나를 인호 앞에 내놓았다.

“그래. 그라고 이건 니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는 기다. 시곈데 아부지 보는 데서 차 봐라. 준호는 중학교 들어갈 때 사주꾸마. 대신 자전거는 이번에 엄마하고 가서 니한테 맞는 거 찾아보고.”     

“아싸! 자전거. 드디어 내 자가용 생긴다아!”

자전거란 말에 준호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인호에게도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의 반에서 시계를 가진 친구는 몇 되지 않았다. 인호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시 삼십팔분이네예.”

“그렇제? 시간은 다 맞차 논 기다. 시계밥 주는 거는 아나? 그래 고걸 돌리주믄 시계는 지가 알아서 가게 돼있다. 앞으로 시간을 제대로 쓰라고 시계 주는 기다. 시간이 돈이란 말 들어봤제? 사람이 성공할라믄 시간은 잘 써야 하는 기야.”

인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귀에 갖다 대어보았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가 시계를 얻은 기쁨에 박자를 맞추어주었다. 

“내일 황기사가 이모집까지 데리다줄 거다. 그라고 옆집 애들 시계도 두 개 사놨으이 갈 때 가 가라.” 

인호는 아버지의 마음씀씀이에 감격하여 벌떡 일어나 그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렀다. 지난날 이정식이 두부공장에서 일할 때 콩가마를 나르거나 콩을 세척하느라 몸이 뻐근해지면 인호는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곤 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시계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그리 표현해본 것이었다. 코끝을 건드리는 포마드기름 냄새와 더불어 아버지라는 든든한 존재의 체취가 찡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제 시계를 받은 것보다 선물할 시계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꽉 채워주었다. 특히 세실리아가 좋아할 모습을 떠올리니 한시라도 빨리 대구로 가고 싶었다. 그날 밤 인호는 시계를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인호는 저녁이 되기 전에 대구에 도착했다. 경숙은 황 기사에게 가는 길에 국밥이라도 드시라고, 한사코 마다하는 그의 손에 지폐를 한 장 접어 쥐어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저녁식사는 안채의 안방에서 안나네와 함께했다. 전부터 저녁을 자주 같이하곤 하던 게 어느새 일상화되어 있었다. 안방은 다섯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경숙은 밑반찬도 안나와 같이 넉넉하게 만들어 나누었다. 음식은 안채 부엌이 좀 더 널찍하여 주로 그곳에서 했는데, 바깥채 부엌과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필요하면 건너편 부엌의 불을 쓰기도 했고 참기름 같은 게 떨어지면 바로 건너가 가져오기도 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일은 대개 경숙이 맡았고 생선을 굽거나 나물을 데치는 일은 안나가 주로 했다. 그리고 서로 음식의 간을 보아가며 맛을 맞추었다. 식사 후 설거지는 루시아가 도왔다. 상을 폈다 접는 일은 인호 몫이었다. 인호가 콩나물국이나 콩나물 무침을 좋아해 콩나물 다듬는 일이 잦았는데 그건 세실리아도 잘했다. 이러한 모습을 눈에 담아오던 안나가 하루는 자신의 생각을 경숙에게 털어놓았다. 

“언니, 우리처럼 이래 사는 집도 드물 겁니다. 저는 이래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네요.”
“암. 그기야 내가 더 바라는 바제. 이리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다가 나중에 하나가 떨어져나가믄 마이 적적할 끼라......”

잠시 바닥 한곳에 시선을 내려놓는 경숙 앞에서 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호는 저녁식사 전 두 자매에게 시계를 주려고 그들이 같이 공부하러 안채로 건너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시계보다 인호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세실리아가 안경을 쓰고 나타난 모습이었다. 테가 가늘고 동그란 안경이었다. 게다가 댕기머리를 풀고 단발로 바뀐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세실리아는 변화된 자신을 보여주기가 쑥스러운지 인호 앞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와아, 손 치아라. 함 보자. 세실이 안경 멋있데이. 안경 끼니까 니가 언니보다 훨씬 똑똑해 보이네. 그라고 머리도 잘 잘랐네. 니 더 예뻐 보인다 안 카더나.”

뒤따라 들어온 루시아가 인호의 반응을 보고는 세실리아를 향해 짐짓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던졌다. 

“봐! 내가 요한이는 좋게 말할 거라 했잖아. 괜히 안 해도 될 걱정을 해가지구.”

그러자 세실리아는 루시아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때를 기다리던 인호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자, 이거 우리 아부지가 선물로 주신 긴데 뭔지 알겠나?”

인호가 말을 끝내자마자 루시아가 바로 알아채고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시계잖아! 이게 우리 주는 거라고? 어쩜! 내가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

인호가 시계를 나누어주자 루시아는 상자를 열어 시계를 꺼내 차기 시작했고 그 사이 세실리아는 부엌에 있는 안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시계 덕분에 저녁식사 시간이 유난히 즐거웠다. 셋이 다 시계를 봐가면서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인호 방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루시아는 여상에 들어가 아버지처럼 은행원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주판 연습을 했다.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가 경쾌한 재잘거림처럼 들렸다. 인호는 영어 단어를 외웠고 세실리아는 산수 문제를 풀었다.

안나네가 바깥채로 돌아가고 난 뒤 얼마쯤 지나 세실리아가 밖에 있는 평상에 올라 인호의 창문를 두드렸다. 평상은 경숙이 이전 바깥채에 살던 노총각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는데 인호의 방 창문 아래 놓여 있었다. 평상은 여려 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빨래를 널 동안 빨래 바구니를 놓아두기 편했고, 김장 김치를 담그기 위해 수십 포기 배추를 소금에 절여 쌓아둘 때도 좋았다. 그리고 화단에 핀 꽃을 보면서 앉아 쉬는 장소로도 그저 그만이었다. 인호는 세실리아가 웬일인가 싶어 곧장 평상 앞으로 나갔다. 세실리아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어두웠지만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거 엄마가 오빠 주래. 우리 아빠가 쓰던 거야.”

세실리아가 손에 쥔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인호는 만년필을 쥐고 불빛에 비쳐보았다. 파카 만년필이었다.

“이거 되게 고급 같은데 내 받아도 되는 기가?”
“오빤 시계도 줬는데 뭘. 근데, 오빠. 내 안경 진짜 좋아 보여?”
“하모. 니 안경 보니까 나도 끼고 싶구마는.” 
“에이, 거짓말.”
“아이다. 참말이라카이.”
“그럼 됐어. 누가 뭐라 해도 오빠만 괜찮으면 돼.”

세실리아가 평상에서 일어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인호도 덩달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별들이 서로 정답게 도란거리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평상 위에 누웠다.

“세실아. 여기 누워봐. 별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데이.”
“나는 서서 볼게. 별이 정말 많다. 저기 무슨 별이지? 초승달 근처에 있는 거. 혹시 샛별 아냐?”
“그래, 맞아. 샛별인데 학교에서 금성이라 배웠다 아이가.”
“안경을 끼기 전엔 안 보이던데 참 밝다.” 
“정말? 전에는 저기 안 보이더나?”
“응, 별들이 다 희미한 점 같았어. 진작 안경 낄 것 그랬네.”

그 말을 듣고 난 후 인호는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인호가 먼발치에서 세실리아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을 때 바로 반갑게 맞아주지 않던 게 서운할 때도 있었는데 그게 다 시력 때문이었다. 세실리아는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 이제 보니까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구,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다 자기들끼리는 반짝거리고 있다는 걸 알겠어.”

어느새 인호는 일어나서 세실리아 앞에 서 있었다.

“진작 안경 낐으믄 좋았을 낀데, 그쟈.”

인호는 바짝 다가가 세실리아를 살짝 안아주었다. 세실리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듯하다가 멈춰 섰다. 반짝거리는 별빛처럼 서로 빨라진 호흡을 느끼며 그렇게 서 있었다. 잠시 후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두 그림자는 조용히 헤어졌다.

 

마침내 인호 집에도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금성 텔레비전이었다. 세실리아가 안경을 끼고 새롭게 만나던 별 이름과 같았다. 국산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수요는 아직 한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안테나가 세워진 집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시기였다. 다들 안채의 큰방에 모여 수상기가 설치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른들도 전파가 빚어내는 세상의 모습에 기대를 잔뜩 걸었다. 연속극을 통해서 유명배우들을 볼 수 있었고, 쇼 프로에선 이미자, 남진, 나훈아 같은 인기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경숙과 안나는 이미자의 팬이었고, 특히 ‘동백 아가씨’란 노래를 좋아했다. 바느질을 하는 중에도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바늘귀에 실이 꿰이듯 일찍 남편을 잃은 두 사람의 귀에 애절한 가락이 꿰어져 가슴을 누볐다. 

인호는 ‘황금박쥐’나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영화에 빠져들었다. 특히 황금박쥐에 사로잡혔다. 우렁찬 소리로 호쾌하게 웃으며 등장하는 황금박쥐, 붉은 망토를 걸치고 하늘을 나는 모습은 비록 해골이지만 멋이 있었다. 지팡이를 들고 우주의 괴물과 악당들을 무찌를 땐 신이 나서 주제가를 따라 불렀다. ‘어디, 어디, 어디에서 오느냐 황금박쥐! 빛나는 해골은 정의의 용사다!’ 라는 노래를 길을 가면서도 흥얼거렸고 문방구에서 파는 황금박쥐 가면을 사서 쓰고 달리며 부르기도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박쥐는 흡혈귀처럼 다른 짐승의 피를 빨아먹는 나쁜 존재로 오해하고 있었는데 황금박쥐를 통해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인호는 해가 진 주택가에서 간혹 눈에 띄던 박쥐의 날갯짓을 전과 달리 두려움 없이 볼 수 있었다.

만화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심취하게 한 것은 ‘타잔’이라는 드라마였다. 아프리카는 인호에게 꿈의 무대였다. 인호가 대구로 옮겨온 다음날 이모가 사준 많은 책 중에는 ‘소년소녀 세계위인전집’이 있었다. 그 속에서 그가 눈여겨보았던 인물이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였고, 영국 출신의 위대한 탐험가 리빙스턴이었다. 인호는 그들의 전기를 읽으며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해주는 의사의 꿈을 가졌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탐험가의 꿈을 키웠다. 그 두 가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아프리카로 가야만 했다. 인호는 ‘타잔’이 방영되는 시간엔 세실리아와 함께 시청하곤 했는데 어른들도 관심을 가지더니 모두가 함께 즐기는 프로가 되었다. 세실리아도 재미를 붙이면서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아프리카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타잔’과 함께 등장하는 ‘제인’과 침팬지 ‘치타’에게도 호감을 가졌다. 드라마를 보고나면 ‘타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호가 세실리아를 곧잘 ‘제인’이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세실리아도 어쩔 수 없이 인호를 “타잔!”하고 부르며 맞장구쳐주어야 했다. 아프리카를 향한 꿈이 가슴에 불붙기 시작한 인호는 세실리아가 동반자가 되어주길 원했다.

“우리 나중에 아프리카 가서 안 살래?”
“왜? 그 먼 데까지.”

세실리아는 인호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 니도 아프리카 좋아하잖아. 코끼리 코 만져보고 싶다면서.”
“그래도 너무 멀잖아. 오빤 사자 안 무서워?”
“자기편이란 거 알믄 사자도 안 문다니까. 나는 거기 가서 아픈 사람 치료도 해주고, 탐험도 하고 정말 할 끼 많을 거 같은데.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 확실하게 보이잖아.”
“오빠가 간다면 나도 갈 건데 가서 계속 살 건 아니지? 그럼 나는 거기서 뭘 해야 해?”

세실리아가 함께할 뜻을 보이자 인호는 신이 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내가 의사할 때 간호사 하고, 내가 탐험하러 갈 땐 위험할지 모르니 환자들 돌보면서 기다리믄 돼.”
“근데 이모가 허락 안 하실 거 같은데. 거긴 성당도 없을걸.”

인호가 생각해도 이모가 쉽게 허락할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도 아버지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만 자신을 속박하는 가족이라는 굴레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인호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아프리카로 인도해주시길 빌면서 가족을 두고 떠날 수 있는 용기도 청했다.

 

칠월 초하룻날 경숙은 제사 음식을 장만한다고 분주했다. 사흘 전 덕희가 황 기사 편으로 제수용 생선을 보내왔을 때 인호는 외가 제삿날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 어려운 살림 형편으로 제찬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게 가슴에 맺혔던 덕희는 제사 때마다 미리 자갈치에서 민어와 도미를 사서 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날 저녁에 치를 손님이 있어 제사 모시러 못 온다는 사실도 알렸다. 인호는 엄마 목소리를 전화상으로 듣는 걸로 만족하고 대면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경숙은 조금 못마땅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너거 아부지는 해필 장인 장모 제삿날에 손님 불러 가지고 요한이 지 엄마도 못 보게 하노.”

인호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까지 함께 모시는 제사였다. 인호는 그 분들이 전란 중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엄마한테서 들은 바 있지만 이모를 통해 그 비극적 사건을 보다 뚜렷이 뇌리에 새기게 되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도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형상이 심어져 있는 반면 악마의 마음도 깃들어 있는 것인가. 그렇더라도 그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하느님은 왜 가만 보고만 계셨을까? 그로선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모 역시 사람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고 했다. 

인호는 세실리아와 함께 제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학교를 마치고 와서 같이 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숙제, 다했어?’였다. 숙제를 다해놓고 텔레비전을 보려 하는데 경숙이 그를 불렀다. 제사상에 올릴 떡을 떡집에서 찾아오라는 용건이었다.

“이모가 지금 바쁜께 요한이가 좀 다녀오이라.”

옆에서 제찬 장만을 돕던 안나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세실이가 떡집 어딘지 잘 아니까 같이 갔다 와.”

세실리아와 같이하는 것이라면 인호는 어떠한 심부름도 다 좋았다. 떡집을 들러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세실리아가 길을 걷는 내내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인호는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지 않았다. 서로 약속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잠잠한 수면 위에 먼저 돌을 던진 쪽은 세실리아였다.

“요한 오빠. 오빤 신부님 될 생각 안 해봤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세실리아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신부님? 갑자기 와 그라는데? 접때 말했잖아. 아프리카 갈 끼라고. 니도 같이 간다고 약속했다 아이가.”
“그건 이모하고 엄마가 허락해줘야 되는 거구, 나는 우리 수녀님처럼 맘씨 고운 수녀님 될 생각 해봤어.”
“정말?”
“건데 그냥 생각만 한 거야. 엄마가 우리 집에서 수녀님 한 명 나오면 좋겠다 했거든. 언니는 말이야, 자기는 시집가야 한다며 내 보고 수녀 하래.”
“니도 시집 갈 꺼라 카지.”
“오빠두 참. 건데 나중에 우리가 커서 어째 될지 쪼금 궁금해지네.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

세실리아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맺었다. 수녀가 될 생각을 해봤다는 세실리아의 말은 인호가 집 앞에 당도할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인호는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주님. 세실리아가 수녀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렇지만 제 뜻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아멘”

경숙은 인호가 대구에 온 이후론 제주가 아직 어린 학생이라 밤늦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 그녀는 애초엔 인호에게 제사를 물려주고 싶었다. 사실 그런 명분으로 덕희에게 인호를 보내줄 것을 청했으나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갔다.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합당한 일이지만 위령미사를 바치고 영혼의 안식을 비는 기도가 신자로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호가 독실한 신자로 성장한다면 제사는 굳이 모시지 않더라도 기일에 미사를 바치고 기도 중에 망자를 기억해주면 될 것이라고 마음을 정리했다. 인호에게 제사를 맡긴다는 부담도 사라지고 훗날의 제사에 대한 걱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미사야말로 진정한 제사라는 본당 신부의 강론을 듣고 난 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제사상을 물리고 조금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안나네도 제사를 모실 동안 곁을 지켰다. 세실리아의 아버지 제사 때에도 경숙 역시 바깥채에 제기를 빌려주며 음식 장만을 도왔고 제사가 끝나면 함께 식사를 했다. 기다렸다 먹는 제사 음식은 여느 식사와 달랐다. 시장하기도 했지만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 뭐든 다 맛있었다. 게다가 젓가락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일 정도로 상이 푸짐했다. 두 집안 식구들이 한 지붕아래 한 식구처럼 다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의 두 집안에서도 보고 흐뭇해할 것 같았다. 인호는 오늘 엄마도 와서 한자리에 있었다면 친척이 아예 없는 집안이라 이런 모습을 부러워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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