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9) - 제3장 성장 그리고 변화

3. 성장 그리고 변화

이광 승인 2023.05.09 17:22 | 최종 수정 2023.06.26 15:24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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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세실리아도 여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루시아가 졸업한 학교였다. 루시아는 자신의 뜻대로 여상에 진학했다. 여상과 여중 입학식 날이 같아 세실리아의 여중엔 경숙이 갔고, 루시아의 여상엔 안나가 가서 축하를 해주었다. 여상은 버스로 통학해야 했으나 여중은 걸어서 통학이 가능한 거리였다. 성당이 있는 큰길을 건너 신천 부근에 위치한 학교였다. 큰길을 건너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인호의 중학교보다는 집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인호는 학교를 마치고 오는 길에 큰길 건너편에서 세실리아가 나타나는지 눈여겨보곤 했다. 집에 와 보면 세실리아가 항상 먼저 와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1학년 때보다 수업 시간이 더 긴 건 아닌데 인호의 학교에선 아침 자습을 시켰다. 세실리아가 여중에 입학하고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인호는 길을 건너려고 건널목에 서 있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실리아도 안경을 착용한 덕분으로 그를 바로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둘은 모처럼 만나는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오빠. 나 이번 주는 청소당번이야. 이 시간이면 오빠랑 딱 만날 것 같았어.”

세실리아가 시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길에서의 조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인호는 잘하면 이번 주는 계속 같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특별한 일이 생긴 것처럼 들뜬 기분이 되었다. 화요일도 둘은 만날 수 있었고, 수요일엔 이미 길을 건넌 세실리아가 한 손에 책가방을 끼고 한 손엔 모자를 들고 흔들며 달려오는 인호를 기다려주었다. 목요일엔 비가 내렸다. 인호는 우산을 쓰고 오는 세실리아에게 우산을 접게 하고 자신의 우산을 좀 더 그녀 쪽으로 기울여 함께 쓰고 걸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집에 이르렀을 땐 인호의 교복 상의 왼쪽이 촉촉해져 있었다. 금요일도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세실리아를 만나는 건널목까지 왔는데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몇몇 지나가는 게 보이다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인호는 큰길을 건너 성당으로 향했다. 혹시 성당에 있을까 싶어 빙 둘러보았다. 아직 학교에서 안 왔나, 그럼 학교까지 가볼까 생각하며 성당을 나왔다. 그런데 길 건너를 보니 둘이 만나던 지점에 세실리아가 서 있지 않은가. 인호는 큰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막 입을 벌리려는 순간 둘이 눈이 마주쳤다. 세실리아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먼저 집에 와 있던 그녀는 인호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혹시나 하고 그 자리로 나온 것이었다.

“오빠, 토요일 대청소 한다고 오늘은 선생님이 종례 마치고 바로 보내주셨어. 내일은 좀 늦을지 몰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지?”
“알았어. 내일 학생 미사네. 니도 인자 다 컸다. 어린이 미사에서 학생미사에 나오니.” 
“치.”

세실리아가 어른 행세하는 인호에게 웃음을 보이며 옆으로 다가섰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지난주 신자들의 기도, 오빠가 이학년 여학생 언니하고 같이 했잖아? 그때 마이크로 들리던 오빠 목소리 참 좋더라.”

인호는 세실리아가 건네주는 칭찬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에게 들려줄 참이었던 말을 꺼냈다.

“중등부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이 누군지 아나?”

세실리아가 인호의 눈빛을 살피며 여짓여짓하자 그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이름에 시옷 자가 두 개나 들어간데이. 그래도 모르겠나?” 

세실리아가 계속 함구하자 인호는 자신이 정해놓은 답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바로 니다! 세실이.”

 

인호가 수학여행 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생처음 가보는 서울이라 인호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우리나라 국보 1호인 남대문도 보고 싶었고, 창경원에 가서 많은 동물들을 만나고 싶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동물은 키다리 기린 등 여럿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관심은 초원의 왕 사자와의 만남이었다. 사자와 대면할 수 있다면 눈싸움 한번 해보고 싶었다. 우람한 체격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졌지만 눈매는 그리 사납게 보이지 않았다. 밀림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달아 쏜살같이 이동하던 타잔의 꿈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아프리카를 향한 동경은 가슴 한 곳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창경원의 동물들이 그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것 같아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아가 학교에서 단체관람 영화를 보고 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였다.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루시아는 영화가 준 감동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감미로운 음악이 가득한 영화를 모두가 함께 보러 가기를 권했다. 여주인공이 수녀원에서 큰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서 가족이 함께 볼 만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경숙은 루시아의 말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수녀원이 나온다꼬? 외국 수녀원은 우째 생긴는지 보고 싶네. 안나, 이번 주일에 같이 영화 보로 가까?”
“대찬성이에요, 언니. 얘들도 좋아하겠지만 나도 영화관 가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안나가 맞장구치자 정작 신이 난 건 인호와 세실리아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일요일 오후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에 고무된 인호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휘파람을 불었다. 늘 입는 교복이 아닌 자켓을 걸쳤다. 덕희가 봄철에 입으라고 부산에서 사가져 온 것이었다. 경숙과 안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나왔고, 세실리아는 루시아가 그 만할 때 입던 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물려받은 옷이지만 깔끔했는데 신발은 등교할 때 신는 까만 천으로 된 운동화였다. 남학생들이야 운동화가 어울리고 편했지만 여학생들 사이에선 외출할 때면 굽이 있는 케미슈즈가 유행하던 때였다. 인호는 세실리아의 신발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옷을 사가지고 온 날 그의 손에 쥐어주던 용돈이 생각났다. 수학여행 때 쓰라고 준 돈이었는데 마땅한 용처를 찾아낸 것이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이미 맛본 영화의 감동을 뒤따라 누리려고 출발하는 일행들을 격려하듯 바라보았다. 대문을 나서던 안나가 갑자기 루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집 잘 보고 있어!”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루시아의 대답을 듣고도 안나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 번 더 다짐을 두었다.

“누가 찾아오더라도 문 열어주지 말고, 엄마 영화 보고 바로 올 거다.”
“엄마! 올 사람도 없지만 문 꼭 잠그고 꼼짝 않고 있을 테니, 마음 푹 놓고 영화 감상 잘하고 오셔요.”

루시아는 괜한 걱정을 하는 안나를 밀어낼 기세로 대문 밖까지 따라 나갔다. 그리고 일행이 집에서 몇 걸음 더 벗어나는 모습을 본 후에 문을 닫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고등학생이 되자 키가 쑥 커지면서 몸매도 성숙한 처녀티가 났다. 며칠 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그녀를 쫓아온 남학생이 있었다. 루시아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며 인호를 보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밖에 웬 머스마가 쭐쭐 따라왔는데 나가서 혼 좀 내줘!”

인호는 루시아로 하여금 그를 향해 오빠 소리가 나오게 한 장본인을 대문 틈새로 살펴보았다. 한 남학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달아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인호는 그 남학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모의 심부름으로 취사용 곤로에 들어갈 석유를 한 말들이 통에 담아오던 길이었다.

“그거 안 무거워? 내가 좀 들어줄까.”
“괜찮은데.”

인호가 의아해하며 상대방을 쳐다보았을 때 교복을 입은 모습이나 체구가 그때 달음박질치던 남학생이 틀림없지 싶었다. 상대의 볼에 붉게 핀 여드름 때문인지 굳이 경계해야 할 인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인호에게서 기름통을 넘겨받으며 환심을 사기 위해 과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기 보이는 게 네 집 맞지? 저어, 내가 니 누나랑 가까워지고 싶거든. 니한테 잘 보여야 되는데 말이야. 어때, 나랑 친해질 생각 없나? 나하고 친해지면 니 학자금은 못 대줘도 용돈은 좀 보태줄 수 있지.”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인호는 그가 정말 잘 보이려고 노력할 거라 판단했다. 호락호락 넘어갈 뜻은 없었지만 굳이 배척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용돈은 필요 없고, 형은 종교 가지고 있어?”
“종교? 우리 집은 불굔데 나는 현재 무교야. 너네 집도 종교가 있나보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천주교? 고맙다, 참고로 할게.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내가 집 주변에서 쭉 지켜봐도 안 보이던데 형님은 대학생이가?”

그날 루시아가 오빠를 불렀다는 걸 상기하고 캐묻는 말이었다.

“형! 호구 조사 나왔어! 이제 통 줘. 집에 다 왔으니.”

인호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그는 기름통을 건네주며 다시 과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거 하나만 부탁할게. 이 쪽지 누나한테 꼭 좀 전해줘.”

그는 네 번쯤 접어 네모지게 만든 쪽지를 내밀었다. 인호가 쪽지를 받아 쥐자 그는 오십 원짜리 지폐를 꺼내 그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약소하지만 이건 내 성의. 같은 남자로서 너를 믿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돌아서가려는 그를 인호는 잠시 불러 세웠다.

“형. 내가 좋은 정보를 주께. 오늘 저녁에 길 건너 우리 성당에 와 봐. 성당만 나오믄 누나는 자연히 만날 수 있어.”
“그래,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는 인호를 만난 게 큰 수확이라도 된 듯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세운 주먹을 내보이곤 그 자리를 떴다. 인호는 그 정도 선심을 썼으면 쪽지는 자신이 사전 검열해도 된다는 판단으로 제 방에 들어가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 내 가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활활 타올랐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은 인호가 보기에도 신파조로 흐르고 있었다. 글 중간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대 얼굴이 떠올라 이 밤도 잠을 설치고 맙니다.’라는 대목에선 애틋한 진정성이 엿보이기도 했다. 어디서 만나자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내용도 없이 순수한 사랑의 고백만 경어체로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2탄, 3탄이 예상되는 연서였다. 루시아에게 바로 전해주려니 왜 이런 걸 받았느냐는 핀잔이 돌아올 것 같았다. 인호는 궁리 끝에 쪽지를 대문 틈에 끼워놓기로 했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루시아가 발견하기 쉬운 위치를 잡아 바람이 거두어가지 않도록 끼워두었다. 학생미사를 보러 셋이 집을 나설 땐 쪽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볼일 보러 간 안나 아주머니와 루시아가 비슷한 시각에 들어왔는데 누가 먼저 쪽지를 발견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 남학생이 성당에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인호는 루시아의 표정을 살폈지만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남학생은 성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면 낯선 장소에 들어서기가 거북해 부근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루시아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화가 명작이라고 소문이 나서인지 극장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볼 수 있는 좌석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씩 떨어져 앉았는데 안나 아주머니는 이모와 인호에게 먼저 자리를 권하고 세실리아를 자기 옆에 앉혔다. 어른들끼리 앉으면 될 걸 하면서 인호는 아쉬움을 가졌지만 차츰 영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영화 초반에 펼쳐진 알프스의 정경에 매료된 관객들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중간 중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사로잡던 음악이 있어 그야말로 아름다운 향연이었다. 

모두들 영화가 주는 감동의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 인호가 앞좌석에 앉아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 때 뒷좌석 가운데에 앉은 세실리아가 안나에게 나지막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외국 수녀님들은 결혼해도 되나 봐.”
“아, 그건 영화 속에서 마리아 수녀가 종신서원 전이라 그렇지, 수녀님들은 결혼하는 게 아냐. 만약 우리 세실리아도 수녀님이 된다면 엄마가 기도 많이 해줄게.”
“아이구, 그라믄 우리 요한이는 우짜노. 세실이 신랑 할 끼라 캤는데.”

안나의 말을 바로 받아 웃음을 머금으며 꺼낸 경숙의 대꾸였다. 인호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이모에게만 알리고 세실리아에겐 아직 꺼내지도 않은 말이 불시에 공개되는 순간 이를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다. 그는 뒤를 잇는 안나의 웃음기 어린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 언니. 요한이가 그런 말 했어요? 세상에, 코앞에 사윗감을 두고도 몰랐네. 호호호.”

안나는 계속 웃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인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예비 사위. 자네는 우리 세실리아가 어디가 그리 좋은가?”

침묵으로 버티려 했던 인호는 안나 아주머니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그러던데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따로 없대요. 그냥 좋아요.”

인호가 평소답지 않게 사투리도 쓰지 않고 워낙 점잖은 어조로 말하는 바람에 택시 안은 일순 조용해졌다. 안나가 세실리아에게도 한마디 하라고 부추겼다. 세실리아가 뜸을 좀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인호가 슈바이처처럼 의사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나는 간호사가 될 생각을 해봤어요. 아픈 사람들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 우리 세실리아는 착하니까 수녀님이 되지 않아도 어려운 사람들 돕고 살 거야. 근데 요한 오빠 각시 할 마음은 없어?”

안나의 노골적인 질문에 택시 안은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난처할 성싶은 세실리아의 입장을 생각해서 인호가 상황을 서둘러 정리했다.

“세실아. 그거 지금 말 안 해도 된데이. 나중에 내가 커 가지고 정식으로 얘기할 때 그때 말해주믄 되는 기라.”

인호의 어른스러운 말에 경숙과 안나는 마주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언니, 잘하면 우리 사돈 되겠네요. 호호.“

안나의 말에 경숙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야 나도 바라는 바제.”

 

기다리던 이박삼일간의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서울역은 사진에서 보았던 그 모습으로 인호를 맞아주었다. 일행은 역광장에서 대기하던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날은 남대문 등지를 버스를 타고 다니며 관광했고 숙소에 와서 방을 배정받았다. 다음날은 창경원 구경이 주된 일정이었다. 인호는 사자와의 대면은 이루었으나 기대했던 눈싸움을 성사시키진 못했다. 힐끔 인호를 쳐다보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사자를 탓할 순 없었다. 저녁식사 후 숙소로 돌아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인솔교사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인호는 신발가게를 찾았다. 서울은 눈 감으면 코도 베어가는 곳이라 들었지만 행인들이 부산이나 대구에서 보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숙소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신발가게가 있었기에 되돌아갈 방향을 재차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게에는 갖가지 종류의 신발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인호는 세실리아의 발에 맞는 케미슈즈를 골랐다. 나비넥타이 모양의 장식이 달린 까만 구두였다. 구두를 사고 나니 이모의 얼굴이 떠올라 이모에게 꼭 필요한 골무를 사기로 했다. 안나 아주머니 몫의 골무까지 사고 나니 루시아가 눈에 밟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문방구가 있어 루시아 몫으로 연필심을 갈아 끼우며 사용하는 필기구를 샀다. 생각보다 많은 지출이 있었지만 마음은 더 넉넉해지면서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서울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인호는 구두가 든 선물 상자를 들키지 않게 평상 밑에 놓아두고 세실리아를 기다렸다. 세실리아는 학교 음악시간에 배우는 피리를 들고 나왔다. 매일 보던 얼굴을 사흘 못 보다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잘 있었제? 내 안 보고 싶더나?”
“보고 싶었지. 건데 잘 다녀오라고 기도할 동안 오빠 얼굴이 그대로 떠올라 안 봐도 본 것 같더라. 자, 내 피리 부는 거 한번 들어 볼래. 오빠 오면 들려주려고 연습 많이 했어.”

학교 숙제이기도 했지만 인호에게 들려주기 위해 세실리아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그녀가 연주한 곡은 인호도 익히 아는 ‘오빠 생각’이었다. 나름 생각한 끝에 선곡한 것이었다. 인호는 그 노래의 가사에 있는 비단구두와 그의 선물이 절묘하게 들어맞아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연주를 듣다 보니 그도 모처럼 피리를 불고 싶었다. 세실리아에게 노래를 청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그 노래의 음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인호의 박수 소리가 뒤따랐다.

“세실이 피리 잘 부네. 나도 함 불어보께.”

인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피리의 입에 묻었을 침을 소맷자락에 닦아내고 건네주었다. 인호는 피리를 손에 쥐며 말했다.

‘내가 피리 불믄 세실이 니는 노래 부르는 기데이. 노래 부르믄 내가 니 소원 하나 들어주께.”
“정말? 으음, 그럼 내 소원은 말이야 오빠랑 우리 모든 식구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거.”
“그런 거 말고. 아니, 내가 알아서 니 소원 하나 들어주께. 자, 시작한데이.”
“알았어.”

인호는 평상에 앉아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고, 세실리아는 평상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붙이고 서서 노래를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역시 세실이 노래 잘한데이.”
“피리는 확실히 오빠가 더 잘 불어.”

인호는 피리를 돌려주며 평상 밑에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짠, 이거 받아.”
“어머. 수학여행 선물?”
“그래.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고마워, 오빠. 지금 풀어 봐도 돼?”
“하모. 니 껀데.”

 눈을 반짝이며 상자 뚜껑을 여는 세실리아에게서 이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아! 예쁘다.”

세실리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신어 보았다.

“신발이 딱 맞아! 아, 좋아라. 오빠가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왔네!”

인호는 행복해 보이는 세실리아가 제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지금 함께 느끼는 행복한 이 시간은 멀리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았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그 다음 주 주일이었다. 경숙과 안나가 오전 열시 반 교중미사를 보러 집을 나선 후 인호는 싸리비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아 인호는 비질을 멈추고 문틈으로 살짝 내다보았다. 누군가 밖에서 서성거리는 낌새에 짐작 가는 얼굴이 떠올랐다. 인호가 대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전에 쪽지를 맡기고 간 그 남학생이었다. 그가 너무나 반가워했기에 인호는 싸리비를 잠시 기대놓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호는 먼저 그날 그가 성당에 왔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은 그 다음날이 이사 가는 날이어서 떠나기 전에 쪽지만이라도 전하고 싶어 왔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가 쪽지는 잘 전했냐고 물었다. 인호는 명확한 대답 대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강원도로 발령이 났는데 가족과 떨어져 사는 걸 원치 않아 얼마 전 집이 팔려서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라믄 형, 춘천에서 온 거네?” 
“그래. 마침 엄마가 볼일이 있어 어제 따라왔어. 친구 만나고 온다고 나왔는데 곧 가야 해.”

인호는 자신은 부산에서 왔고, 루시아와는 친남매는 아니지만 가족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렸다.

“형. 쪽지 있음 줘. 내가 전해주께.”
“혹시 한 번 볼 수는 있을까?”
“안 돼. 그날 그 쪽지 아줌마도 봤는가봐. 누나보고 절대 만나지 마랬어.”
“얼굴만 한번 살짝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뭐. 실은 내가 여기 온 건 집주소 때문이야. 전에 보고 다 외웠다 싶었는데 긴가민가해서...... 문패 보고 좀 전에 적어뒀어. 건데 누나 이름은 뭐야?

까 말한 루시아는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이지?”

“그래. 윤수경이라고 해.”
“윤수경이 맞구나, 윤수경. 버스 안에서 명찰을 봤는데 윤수경인지 윤수정인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 정태수, 너는?”
“이인호.”

이름을 서로 알려주고 나니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저어, 태수 형. 내가 누나한테 일단 말은 해볼 텐께 기대는 하지 마. 좀 있음 어른들 올 시간이야. 누나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봐야지.”
“그럼 놔둬. 나도 곧 가야 하구, 쪽지 대신 이 말만 전해줘. 내 이름이 정태수라는 거 하고 내가 편지 보낼 거라는 거 하고.”

그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인호는 대문을 닫아걸고 비질을 마저 했다. 문득 부산으로 돌아간 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정태수의 편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인호는 루시아에게 정태수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루시아는 집까지 쫓아온 정태수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남의 얘길 듣는 것처럼 시큰둥해 보였고, 편지 보낼 거란 말엔 냉랭하기까지 했다.

"춘천 갔으면 춘천 애를 사귈 일이지 뭐 한다구 차비 들여 이 먼 데까지 와? 편지? 우표는 뭐, 공돈인 줄 아나봐.”

그날 이후, 한 달에 두 번꼴로 춘천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우편함에서 편지를 확인하고 인호가 루시아에게 건네준 적도 있었다. 루시아는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의 눈빛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추측을 가지게끔 했다. 세실리아의 말에 의하면 언니가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서랍 속에 모아둔다고 했다. 답장 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다가 일곱 번째 편지를 받고 나서야 답장을 썼다는데, 그 답장을 받고 보낸 정태수의 편지 내용은 세실리아도 알고 있었다. 궁금해 못 견디는 동생을 위해 툭 던져주더라는 것이었다. 편지에는 그가 대학은 대구로 진학하는 것으로 부모님께 허락받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인호는 자신도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가더러도 대학은 대구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세실리아에게 분명하게 전했다. 부산으로 돌아가 고등학생이 되어야 하는 과정은 이미 정해졌지만 대학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진로는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세실리아가 인호의 뜻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학은 나도 오빠 다니는 데로 가야지. 우리 빨리 컸으면 좋겠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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