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10) - 제3장 성장 그리고 변화

3. 성장 그리고 변화

이광 승인 2023.05.16 13:29 | 최종 수정 2023.06.26 15:24 의견 0

2-2

예정되어 있는 이별로 어수선한 마음은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3학년이 되어 인호는 학교에서 접한 시와 소설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시집을 찾아 펼쳤고 우연히 집어든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도 빠져들었다. 아프리카로 가는 꿈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고 그 자리엔 작가가 되려는 꿈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특히 소월과 목월의 시를 읽으며 한 구절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어루만져주기도 한다는 사실에 묘한 이끌림을 받았다. 소월의 시처럼 예전엔 미처 와 닿지 않던 감정들이 그를 사로잡으면 거의 다 외울 때까지 몇 번을 거듭해서 읊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인호는 밤이면 홀로 마당을 나와 평상에서 대문 부근을 오가며 거닐었다. 감나무 앞에 서니 예전에 세실리아가 가리킨 가지를 꺾으려다 기절했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찢어진 가지 끝부분 톱질이 된 자리의 옹이를 어루만지며 잠시 감나무와 교감을 나누었다. 세실리아는 아직 안 자는지 창문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인호는 달을 바라보았다. 순간 엄마가 그리워졌다. 그러자 아버지 얼굴도 떠올랐고, 준호가 태권도를 열심히 연마하는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머잖아 부산으로 돌아가면 저 방의 세실리아와 루시아가 무척이나 보고 싶을 것이고 이모는 또 얼마나 보고 싶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인호는 등을 젖혀 감나무에 기대어 섰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그는 속으로 쫑을 부르며 강아지 때의 모습을 되살려보았다. 방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쉬 오지 않았다.

외가의 제삿날이 돌아와 인호는 오랜만에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덕희는 이번에도 황기사 편으로 제수용 생선을 미리 보냈다. 며칠 만에 황기사는 덕희를 태우고 또다시 대구로 와야 했다. 인호는 엄마가 그 사이 귀부인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아 다소 놀라웠지만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인호는 전에 없던 엄마의 목걸이에 눈길이 갔다.

“엄마 그거 진주 목걸이가?”
“응, 좋아 보이니?”
“진주는 돈 마니 줘야 되잖아.”
“아버지가 일본 출장 가서 선물로 사오신 거야.”
“준호는 학생회장 됐다며?”
“그래. 덕분에 엄마는 학부모회 회장 맡았고.”

인호는 엄마도 회장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그날 처음 들었다. 회장이 되어서 그런지 엄마의 말씨는 사투리 억양이 빠지고 서울말처럼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모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숙이 입을 열었다.

“희야.” 

경숙은 덕희를 부를 때 ‘덕’자를 빼고 불렀다.

“별일 없으믄 황기사는 먼저 보내고, 오늘은 인호랑 자고 내일 가래이.”
“언니, 내일 볼일이 있어요. 늦더라도 오늘밤에 가야 돼요.”
“기사 양반이 늦게까지 애쓰겠구마.” 
“언니두, 이서방은 한창 일할 때 차에서 밤도 새고 그랬어요.”
“그리 열심히 살았은께 큰 사업가가 된 기제.”
“고속도로가 뚫려서 부산 대구는 이제 두 시간 만에 가잖아요. 참, 이 이야길 해야지. 언니, 제가 양장점 처분하고 돈을 보태 대연동에 땅을 사둔 게 있거든요. 택지개발 된다 해서 사둔 건데 그새 땅값이 올라 돈 좀 벌었어요. 물론 양장점은 언니가 준 돈이니 제가 나중에 몇 배로 갚을게요. 대연동에 이번 달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을 크게 지을 거예요. 인호가 오기 전에 집은 다 지어져 있을 겁니다.”

덕희는 인호와 경숙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방이 여섯 개 나오게 이층으로 지을 거니까 언니도 내 방이 거기 있다 생각하시면 돼요. 언제라도 부산 오신다면 내가 언니 모실게요. 인호야 당연히 이모랑 같이 살길 바랄 거고 이서방도 그랬으면 좋겠다하고 있어요. 언니, 우리는 시가도 그렇고 친정도 그렇고 핏줄이 정말 귀한 집이잖아요.”

덕희의 눈에 눈물이 살짝 어리는 듯했다. 그녀는 이제 곧 대궐 같은 집을 갖게 될 부잣집 마님이지만 한동안 수월찮게 겪어온 고생을 생각하며 일순 감정이 북받친 표정이었다. 잠시 경숙을 바라보던 덕희는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여덟 살 터울로 어릴 땐 어머니를 대신해 업고 키워주었고, 자신을 거두어 당시 시골아이들은 꿈도 못 꾸던 여고를 보내주었던 언니, 부모와 오빠를 잃고 오직 하나뿐인 혈육인 언니, 그리고 결혼한 이후에도 든든한 조력자였고 결국 남편의 사업 밑천까지 대어준 언니, 덕희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그런 언니가 부산에서 함께 살 뜻이 없다는 게 애석했다. 그녀는 자기 방식으로 언니를 위해 해줄 만한 일을 찾으려 했다. 최근 부동산에 대한 식견이 풍부해진 그녀는 오래전 형부가 사두었다는 과수원 땅을 알고 있었다.

“언니, 사람 팔잔 타고 난다지만 그것도 다 제 하기 나름인 거여요. 암만 봐도 믿을 건 역시 땅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과수원 땅 있잖아요.”

경숙은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거 처분을 하고, 이 부근 적당한 땅으로 바꾸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이 근방은 앞으로 많이 발전하겠어요. 제 눈에 보이거든요.”
“글타 해도 그 땅을 놀리는 기 아이고 세를 받고 있으이 그냥 놔두고 볼란다. 땅값이 오르믄 거기도 오를 거 아이가.” 
“그 문젠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죠. 제 말이 백번 맞을 겁니다.”

경숙은 덕희가 과수원 땅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서둘러 일어섰다.

"희야, 니는 여 있거라. 부엌에 좀 나가봐야겠데이.”
“저도 나가 거들게요.”
“아이다, 좋은 옷에 기름내 묻을라. 고마 여 있거래이.”

부엌에선 안나가 전을 부치고 있었다. 경숙이 부엌으로 나가자 덕희는 옆에 앉아 있던 인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아들. 부산 올 생각하니 좋제? 엄마는 요새 그날 기다리는 재미로 살맛이 난다.”
“내 방은 이층이겠네?”
“그래. 준호하고 니 방은 이층이지. 이층 방이 세 개야. 하나는 이모 오시면 쓰실 방.”

인호는 부잣집 아들로 살아갈 자신의 입장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면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은 이젠 누가 뭐라 해도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경숙은 덕희를 일찍 보내기 위해 제사를 보다 이른 시간에 지내기로 했다. 안나가 제사상 차리는 일을 도와주곤 바깥채로 돌아갔다. 제사를 마치고 인호는 오랜만에 엄마랑 저녁상 앞에 앉았다. 차에서 대기하던 황기사도 들어와 함께 식사를 했다. 경숙은 떡과 전을 보자기에 싸서 떠나는 덕희에게 건넸고 황기사 앞으로도 따로 싸주었다. 차가 떠나간 후 안나가 경숙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동생분 전보다 훨씬 세련돼서 왔네요. 누가 봐도 부잣집 마님이네요.”

경숙은 그 말이 들을 만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요한이 엄마가 본래 귀티가 붙어 있는 상이라......”

며칠이 지나서였다. 인호는 하교 길에 세실리아의 학교 부근을 흐르는 신천을 찾았다. 세실리아를 만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만해도 그 쪽으로 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흐르는 물을 보며 신천 둔치를 걷고 싶었다. 시를 읽고 감상하길 좋아했지만 시를 쓰려는 시심을 자주 겪어보지 않았던 인호는 떠오르는 영감을 글로 옮긴 적이 별로 없었다. 간혹 낙서를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의 흔적일 뿐 시작 행위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밤부터 뭔가 한 편의 시로 표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충동이 일어났고 이는 다음날이 되어서도 가시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서 시를 한 구절씩 새기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쓰고 지우며 다듬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신천을 산책하면서 제 모습을 갖춘 시가 완성되었다. 인호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세실리아가 행여나 나타날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자신의 시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가 처음으로 쓴 영혼의 독백이었다.

       어느덧 두 갈래로 나누어진 내 마음
       이제 더는 함께 못해 하나를 밀어낸다
       물러난 마음 한 쪽 남겨놓은 빈자리
       혹시나 돌아올까 봐 자꾸만 눈이 간다

       한 마음이 한 마음을 보내고 적적한 날
       떠나간 마음 보러 물가 찾아 거닌다
       흐르는 물결 위를 거스르지 못하고
       한 마리 오리처럼 떠다니는 마음이여

 

맨 마지막 구절은 수면 위의 오리를 보다가 떠올랐는데 자신의 최근 심경과 맞물린 것이었다.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은 대구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자주 부딪혔다.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으면 또 하나의 마음이 빈자리로 남아 허전해졌다. 인호는 집에 돌아와 공책에 시를 옮겨 적었다. 귀가가 늦은 인호를 기다리던 세실리아가 문을 두드린 다음 그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언제 왔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세실리아는 평소에 비해 자못 진지해 보이는 인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지. 내가 지금 심혈을 기울여 시를 완성했거든. 세실아, 내 생애 첫 번째 작품을 니가 맨 처음 듣게 된데이. 쪼매만 기다리라. 내가 곧 읊어볼 텐께.”

인호가 변성기를 맞은 저음으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던 세실리아는 낭송이 끝나자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우와. 오빠, 멋지다! 오리처럼 떠다니는 마음! 어쩜 그런 생각을 다했지?”
 한 치의 과장도 없어 보이는 세실리아의 격찬에 인호는 마치 큰 성공을 거둔 예술가처럼 팔짱을 끼고 득의에 찬 미소를 날렸다. 

붉은 감이 탐스럽던 감나무는 까치밥 몇 개만 남기고 마른 잎을 떨어뜨렸다. 인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그 전날 철도편으로 부산을 찾았다. 차를 보내준다는 덕희의 뜻을 사양한 것은 오랜만의 기차 여행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을 떠나 이모를 따라 대구로 오던 날의 객차 안이 생각났다. 삶은 계란 한 입 베어 먹기를 바라던 이모의 손길을 끝내 외면하고 애태우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시작은 다소 불편한 감정이었지만 대구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음을 되돌아보았다. 이모의 따뜻한 보살핌, 세실리아와의 즐거운 시간들 그리고 세례로 시작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한 일은 부산에 있었더라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부산으로 돌아가는 것도 하느님 뜻에 따르는 일이라 생각했다. 대학은 대구로 돌아와 다닐 거라고 세실리아에게 한 약속은 하느님께서 기꺼이 허락하시리라 믿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이별의 슬픔은 훗날의 더 큰 기쁨을 위해선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인호는 다가올 이별이 어떤 것인지 반짝거리는 포장지 속의 선물처럼 빨리 풀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선물도 있듯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짐처럼 놓여 있었다.

덕희는 혼자서도 태연하게 집을 찾아오는 인호가 듬직했다. 그녀는 인호에게 시험에 척 붙길 바라며 준비한 부적이 속에 꿰매진 러닝셔츠를 건네주었다. 인호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과는 맞지 않는 것임을 알면서도 엄마의 성의를 생각해 받아두었다. 그러나 그 셔츠로 갈아입을 것인지는 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준호는 태권도를 꾸준히 하여 유단자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대연동에 짓고 있는 집은 외관과 정원 공사도 끝났고 내부 마감작업만 일부 남아 있다는 현황도 알려주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이정식이 술을 한잔 걸친 얼굴로 귀가했다.

‘그래. 이제 우리 인호, 고등학생 될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아버진 오늘 우리 집 짓는 업자와 술 한잔했다.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니 세상 다 가진 것 같구나. 인호는 내일 시험 보려면 일찍 자야지. 하느님한테 백점 맞게 해달라고 기도는 하고 자거라.”

인호는 정장 차림에 말씨마저 엄마 못지않게 표준말에 근접한 아버지한테서 신사의 풍모를 보았다. 하지만 사투리에 담긴 훈훈한 말맛이 가신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잘 밤엔 덕희가 와서 부적이 꿰매진 셔츠로 갈아입을 것을 권했다. 인호는 마지못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셔츠를 갈아입었다. 신앙에 맞지 않는 부적이지만 엄마의 뜻을 뿌리칠 수 없었다. 웬만큼 사소한 문제는 주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이정식은 택시로 출근하기로 했고, 황기사에게 오늘 하루는 집에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인호가 입시를 볼 학교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티고개를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 시험을 무사히 치른 인호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황기사는 새로 지은 집을 보고 온 소감을 인호에게 꽤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영화 보믄 나오는 대저택 같은 그런 집 안 있나? 딱 그런 식으로 지어 놨데이. 정원도 멋지게 꾸미놨으니 누가 봐도 입이 벌어지게 돼 있어. 차고 바로 옆에 별채가 있는데 우리 식구 살아라꼬 내주시는 건기라. 별채라꼬 대충 짓는 기 아이고 자재도 다 같은 걸로 쓴다 아이가. 방 두 개! 욕실에 화장실 붙었고, 부엌도 딸리 있긴 한데 사장님이 밥은 마 본채에서 같이 묵자고 그라시더라. 요새는 나도 이사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카이.”

“아저씨 식구는 몇 명인데요?”
“우리 집사람하고 인자 두 살짜리 머스마 하나. 그라고 집사람 배가 또 조금씩 불러오고 있지. 흐흐.”

한 달이 지났다. 고등학교 입학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인호는 합격 사실을 전화로 통해 들었다. 덕희가 그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것이 곧 있을 이별의 신호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뻐해주었다. 경숙은 안나와 더불어 인호가 좋아하는 만두를 빚었다. 저녁식사 전 모두 인호의 합격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인호는 밥은 거의 먹지 않고 만두와 만둣국으로 배를 채웠다. 한창 먹을 때라 뱃속으로 들어가는 양이 루시아와 세실리아 둘이 먹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세실리아가 인호의 식성에 경의를 표했다.

“우와! 요한 오빠, 정말 위대하다. 오늘 기록 세우겠는데....... 오빠가 만두 몇 개나 먹을까 봤는데 스물다섯 개에다가 국에 든 거까지 합치면 서른 개는 넘을걸!”
“요한이 부산 가서 만두 먹고 싶거든 전화하고 오너라. 아줌마가 많이 만들어놓을 테니.”

안나가 웃으며 말을 맺자 경숙이 삼년 후를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요한아. 공부 잘하는 사람은 대학을 서울로 간다카던데 우리나라서 최고 좋은 대학 갈라믄 공부 되게 열심히 해야 될 끼다. 니가 서울로 가믄 이모도 덕분에 서울 구경 하겠구마.”
“이모, 대학, 서울로 안 갈 낀데. 대구에서 다닐 낀데.”
“너거 아부지가 서울로 보낼라 할 꺼로.”
“절대 안 가. 대구로 올 낀께 두고 봐.”

인호는 말을 마치고 세실리아를 비롯해서 모두를 한 번씩 번갈아보았다. 누구도 인호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잠시 후 루시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호의 편에 서는 발언을 했다.

“삼학년 들어서 인호가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는다며 공부를 좀 소홀히 해요. 소질이 있는지 몰라도 작가가 될 생각을 가지는 것 같은데 그럼 굳이 서울로 보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인호 실력이면 대구에 있는 대학은 무난할 거예요.” 
 

2월 15일이 설날이었다. 인호는 설 쇠러 늘 부산으로 가곤 했는데 이번 설은 대구에서 맞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덕희도 준호를 데리고 와 대구에서 설을 쇨 작정을 했다. 이정식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설 전날 오후에 황기사가 덕희와 준호를 내려주고 그도 명절을 쇠러 곧바로 부산으로 돌아갔다. 경숙의 집은 모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 명절다운 설을 보내게 되었다. 큰상 하나로 함께 식사를 하기는 비좁아서 바깥채에서 안나가 상을 하나 더 가져왔다. 준호는 두 개의 상에서 여러 사람과 더불어 하는 식사가 즐거운 듯했다. 그는 추첨을 통해 중학교를 배정받았는데 지금 사는 집과 새로 지은 집의 중간쯤에 있는 학교였다. 그날 밤 인호는 오랜만에 준호와 잠자리를 같이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출장 갔다 돌아오시면 며칠 내로 이사를 간다고 했고, 이사를 가면 개를 키울 거라고 했다. 아버지 말씀이 큰 집에는 큰 개 한 마리쯤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인호는 쭁이 생각날까봐 대구에선 개를 키울 뜻이 없었는데 준호가 이야기를 꺼내자 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설날 세배를 하기 전에 추석 때처럼 합동 차례를 모시기로 했다. 경숙은 인호에게 입힐 한복을 꺼냈고, 준호에게 주려고 지어둔 한복도 같이 내놓았다. 준호는 새로 생긴 한복이 좋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루시아와 세실리아도 한복을 입고 나왔다. 둘 다 한복 입은 모습이 예뻐 보였다. 인호가 준호의 도움을 받으며 병풍을 펼쳐 세우고 병풍 앞에 제사상을 펴는 일을 했다. 위패 놓을 자리에 제사 모실 분들의 이름이 여러 줄로 적힌 마분지가 잘 접혀 세워졌다. 아버지를 닮아 글씨를 잘 쓴다는 루시아의 솜씨였다. 경숙이 제기를 꺼내 부엌에서 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호는 준호가 잘 모를 것 같아 마분지에 적힌 이름들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모의 시부모 되시는 분들과 이모부 최우진, 그 옆에 윤성환이라 적힌 세실리아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준호는 처음 경험하는 제사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인호가 향을 피우면서 제사가 시작되었다. 인호는 준호와 함께 절하려고 그를 옆에 세웠다. 재배를 시작하자 준호는 눈치껏 잘 따라 움직였다. 어른들이 절을 올린 다음 루시아와 세실리아의 절이 이어졌다. 

차례가 끝나고 세배할 시간이었다. 경숙을 가운데 두고 덕희는 오른편에 안나는 왼편에 앉았다. 세배는 아이들 네 명이 나란히 서서 일제히 올리기로 했다. 세배를 마친 아이들이 어른들 앞에 앉았다. 먼저 경숙이 은행에서 찾아둔 신권 백 원을 한 장씩 건네주면서 고등학생인 루시아에겐 한 장을 더 얹어주었다. 안나도 그리하면서 모두 건강하고 공부 잘하라는 덕담을 남겼다. 덕희는 오백 원을 넉 장 꺼내 나눠주었다. 세뱃돈치곤 큰돈이었다. 세실리아는 손에 쥔 지폐를 내보이며 인호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빠, 한꺼번에 이래 많은 돈 받은 거 처음이야.”  
“나는 이 돈으로 소월 시집 한 권 살 끼다. 참, 방패연도 사야지.”

책방에서 본 ‘못 잊어’라는 제목을 가진 소월의 양장본 시집이 육백 원이었다. 세실리아 또한 세뱃돈을 어떻게 쓸 건지 곰곰이 요량하는 표정이더니 잠시 인호를 바라보며 보조개를 보였다. 남매처럼 다정한 둘의 모습을 덕희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차례를 지낸 음식과 떡국으로 아침상이 차려졌다. 덕희는 인호와 준호를 데리고 달성공원을 찾기로 했다. 그곳을 둘러보고 부산으로 돌아갈 기차를 탈 생각이었다. 달성공원에는 경숙도 동행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면 세실리아도 같이 갈 수 있는데 덕희가 택시를 원해 인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더 지났다. 인호가 세실리아와 함께 방패연을 날리면서 놀다 들어오니 아버지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예정대로 사흘 후엔 새 집으로 이사한다고 했다. 인호가 떠나야 할 날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호의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이 고등학교 입학생 예비소집일이어서 졸업식을 마치는 대로 부산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 4학년 초에 대구로 전학 와서 어언 6년 만에 부산의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졸업식날 아침 덕희가 승용차를 타고 왔다. 전날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친 준호도 따라왔다. 부산에서 일찍 출발하느라 잠이 부족했던지 준호는 졸음에 겨운 눈을 부비며 차에서 내렸다. 인호가 졸업을 축하한다고 하자 준호는 자신이 교육감 상을 받고 졸업생 대표로 인사말을 했다고 자랑하는 사이 졸음은 이미 달아난 듯 보였다. 안나네도 함께 인호의 졸업식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인호와 달리 루시아와 세실리아의 학교는 어제 졸업생을 보내고 춘계방학에 들어갔다. 덕희는 경숙에게 졸업식을 마치면 시내에서 점심을 들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옆에 있던 안나에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경숙이 덕희와 안나 사이에서 무슨 말을 꺼낼 기미를 보이자 덕희가 가로막듯 입을 열었다.

“언니, 어서 가요. 차가 오인승이니 우리 식구 말고 더 태우질 못해요.”

한 식구처럼 지내는 경숙과 안나네이지만 덕희에겐 그녀들은 남이었다. 덕희는 졸업식을 마치고 안나네 식구들과 점심을 같이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번거로울 것 같아 접어버렸다. 경숙과 인호가 탄 승용차가 떠나자 안나는 졸업식장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가자고 조르는 세실리아에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그만 풀이 죽은 세실리아는 입을 다물고 울상이 되어버렸다. 혼자서 얼마든지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거북한 분위기가 그녀를 억눌렀다. 인호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눈앞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졸업을 축하해주지 못하는 아쉬움과 이별을 앞둔 허전함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는 설움으로 폭발했다.

인호는 졸업식 내내 침울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줄곧 기다렸지만 세실리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졸업장과 꽃다발을 들고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카메라를 든 황 기사의 독촉에 못 이겨 인호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대구 일정을 마무리하는 승용차가 경숙의 집 앞에 섰다. 경숙이 내릴 때 인호도 따라 내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실리아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홍조 띤 얼굴로 인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포장지에 싸인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오빠 졸업기념 선물. 부산 가서 뜯어봐야 돼.”

선물을 받아 쥐고 세실리아를 바라보던 인호는 잠시 숨을 삼키고 그녀의 눈두덩에 시선을 멈추었다. 세실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인호는 세실리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손수건으로 보이는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자. 이걸로 눈물 닦아.”

인호가 손수건을 펼쳐 세실리아에게 건네주려는 순간 손수건 속에 든 오백원 권 지폐가 가랑잎처럼 흘러내렸다. 지폐가 땅에 떨어지기 전 손에 거머쥔 인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뒤로 돌아서서 잰걸음 치는 세실리아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아는 바깥채 부엌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만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밖에서 크락숀이 두 번 연거푸 울렸다. 평상 위에 인호의 가방을 올려놓고 서 있던 경숙이 서둘러 인호 곁으로 갔다. 인호는 이모가 들고 오는 가방을 받았다. 경숙은 문밖까지 나갈 동안 인호의 어깨를 오른팔로 살며시 감싸고 있었다. 그 사이 안나가 나와 인호를 배웅하려고 승용차 옆으로 갔다. 인호는 한 번 더 집안을 살펴보고 나서 경숙과 안나에게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 중이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나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언니, 내가 괜히 인호 졸업식 안 간다 해가지고....... 세실이 운다고 난리에요. 루시아가 달래곤 있는데......”

안나가 경숙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