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11) - 제3장 성장 그리고 변화

3. 성장 그리고 변화

이광 승인 2023.05.23 18:25 | 최종 수정 2023.06.26 15:24 의견 0

3-1                                  

신흥 주택지인 대연동의 이층 양옥이었다. 담을 따라 옆으로 나란히 선 향나무들이 우아한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찬바람에 떨고 있었지만 녹색의 두툼한 외투를 걸친 향나무는 마치 귀족이 자기 신분을 뽐내는 듯 도도해 보였다. 덕희는 황 기사가 먼저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움직였다.

인호는 왜 직접 문을 열고 내려도 되는 것을 굳이 황 기사가 열어주어야 하는지를 덕희에게 물어보려다 참았다. 차에서 내린 인호는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집도 이층으로 지어져 있었고 부근엔 다 고급스럽게 지워진 집들이 내로라하며 서 있었다. 군데군데 공터도 눈에 띄었다. 덕희는 인호에게 옆집을 가리키며 변호사 댁이라고 알려주었다. 먼저 앞좌석에서 내린 준호가 대문 기둥에 붙은 도어폰을 눌러 도착을 알렸다. 초인종과 달리 통화기능이 장착된 것이었다. 자동개폐기가 작동되어 출입구의 철문이 덜커덕 열렸다. 나와서 맞아주는 사람은 황 기사의 처 정순이었다. 황 기사의 말대로 정순은 조금 불룩한 아랫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덕희에게 공손히 절을 하곤 웃는 낯으로 인호를 반겼다. 

“준호는 사장님 닮았는데, 장남은 사모님 판박이네예.”

덕희는 정순의 말을 새삼스레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인호를 쳐다보곤 빙그레 웃었다. 인호는 준호의 안내로 이층에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창 앞에 놓인 책상과 한쪽 벽의 침대가 주인을 맞이했다. 인호는 우선 방문의 손잡이부터 두어 번 반복해서 움직여 보았다. 새로운 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은 의욕이 담긴 손짓이었다. 책상 위엔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스탠드의 스위치를 켰다 끄며 백열등 불빛을 확인했다.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호는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었다.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가 잠깐 드러누워 보았다. 이렇게 푹신한 데서 잠이 잘 올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향나무들이 담장 주위를 일정 간격으로 빙 둘러 서 있어 산울타리 느낌을 주었다. 자연석으로 둘러싸인 정원에는 철쭉과 동백이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있었다. 감나무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구의 집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정원이었다. 방 안팎을 쭉 둘러본 다음 인호는 가방에서 받침대가 있는 십자고상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경숙이 지난주일 성물방에서 구입해 신부님께 축성을 받아 그에게 준 것이었다. 인호는 책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모았다.

“주님, 저의 가정에 은총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이모하고 세실리아의 가정도 지켜주시고 은총을 가득히 내려주시옵소서. 아멘.”

인호는 거실로 내려와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에서 신호가 오길 기다렸다. 대구로 장거리 전화를 신청해 놓았던 것이었다. 얼마 후 전화교환원이 대구와 전화 연결이 되었음을 알렸다. 수화기에서 경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요한이가?”
“이모! 부산 잘 도착했데이.”
“그래, 요한이 목소리 들으이 코앞에 있능 거 같네. 집 좋제.?”
“집 진짜 크다아. 이모도 와보면 좋을 낀데. 세실이는? ”
“세실이? 니 간다꼬 서운해 하더이 인자는 괜찬타. 요한아, 여 걱정은 말고 공부도 잘하고 성당도 착실히 댕기거래이. 이모도 함 놀러가꾸마.”
“이모, 꼭 와야 돼. 그라고 세실이 바꿔 줘봐.”
“세실이는 다음에 통화하거래이. 잘 도착했다꼬 이모가 전해주꾸마. 목소리 들었응께 인자 고마 들어가래이.”

경숙은 시외전화 요금이 많이 나올까봐 잘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통화를 먼저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인호는 세실리아가 울며 돌아서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건네준 손수건을 꺼내보았다. 손수건으로 감쌌던 오백 원 권 지폐도 펴서 손에 쥐었다. 세뱃돈으로 받은 돈을 쓰지 않고 건넨 세실리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이별은 인호에게 일종의 박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털어내기로 했다. 대신 다시 만난다는 확신에 찬 기다림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한 확신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매일 얼굴을 대하며 지내던 세실리아가 이젠 그의 내면에서 늘 함께하는 존재로 자리했다.

덕희는 저녁에 불고기를 할 생각으로 쇠고기를 양념에 절여놓았다. 황 기사의 처 정순이 와서 부엌에서 파 다듬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 날은 이정식도 평소보다 퇴근이 빨랐다. 밖에서 크락션 울리는 소리가 났다. 준호는 자동개폐기의 단추를 눌러 대문을 열었다. 인호가 먼저 마당으로 나가 아버지를 마중했다. 이정식은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인호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드디어 우리 장남이 왔구나. 니 방 마음에 들더나?” 
“네. 푹신푹신한 침대도 있고.”

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들어서려는 이정식에게 인호는 동네를 잠시 살펴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새 동네라 별로 볼 거는 없다. 집 부근만 둘러보든지.”
“네.” 

대문 밖을 나오니 황 기사가 차고에 차를 넣는 중이었다. 인호는 차고로 들어갔다. 차고 안쪽 벽엔 마당으로 통하는 철문이 달려 있었다. 황 기사가 인호를 보며 반색을 했다.

“아니, 인호 도령이 왜?”
“아저씨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예.”
“오, 듣기 좋은 말! 근데 내한톄 무슨 할 말이 있는 기가?.”
“혹시 이 동네, 성당이 어데 있는지 알아예?”
“성당? 가만 있자, 거가 성당이지 아마. 일단 셔터를 내루고 보제이.”

황 기사가 차고의 셔터를 내린 다음 길 한가운데로 가서 섰다. 인호가 다가갔다.

“성당이 맞을 끼다. 내나 천주교회라 카는 기제?”
“네.”

황 기사는 북동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애북 멀긴 한데, 저 쪽으로 쭈욱 가믄 버스 댕기는 큰길이 나오거등. 유엔묘지 가는 길이데이. 그 길을 건너가지고 계속 가다 보믄 또 아스팔트 깔아논 도로가 나오는데 거서 왼편으로 꺾어 좀 더 가야 될 기라. 거서는 성당이 보인께 찾아가기는 쉬워도 꽤 멀 끼구만. 여서 버스 타기도 애매하고 글타. 걸어가믄 삼십분 더 걸릴 끼야. 버스 타믄 두 구역이나 세 구역 밖에 안 되지만 정류장까지 갔다가 버스 기다리고 또 내리서 쪼매이 걸어갈 기란 말이제. 그라믄 그것도 내나 삼십분 가까이 걸릴 끼야.” 

인호는 황 기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머릿속에 약도를 그려 넣었다. 그는 오는 토요일 성당에 갈 생각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정식은 인호에게 졸업 겸 입학 선물로 미국에서 사가져 온 만년필을 내놓았다. 예전에 세실리아의 아버지가 쓰던 것이라며 받았던 만년필과 같은 회사 제품이었다. 인호는 먼저 것은 보관용으로 소지하고 오늘 받은 것을 필기용으로 쓰는 걸로 정했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 주방에는 큰 식탁이 놓여 있었고 여섯 개의 의자가 딸려 있었다. 이정식이 먼저 앉고 그 옆에 준호가 앉았다. 인호는 맞은편 의자에 자리 잡았다. 식사 준비를 거들던 정순은 이인분의 국과 반찬을 가지고 주방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이용해 나갔다. 정순이 나가는 모습을 본 이정식이 입을 열었다.

“황 기사도 같이 식사하자 안하고......”
“정순이한테 오늘부턴 밥은 따로 먹자고 했어요. 애도 있으니 정순이도 그게 편해요. 인호가 왔고 좀 있으면 가정부도 들일 건데 다 같이 식사하기는 좀 그래요.”

덕희의 말에 이정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그녀를 보았다.

“참, 가정교사도 구하기로 하지 않았나?”
“안 그래도 옆집 변호사 안사람한테 법대 다니는 참한 학생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놨어요.”
“그렇지. 법대생이 좋겠네. 자, 그럼 다들 식사하자.”

이정식이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맛을 돋운 다음 밥을 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인호는 식사 전 기도를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외웠다. 인호에게 소리 내어 기도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의 대화가 일단락지어지자 인호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가정교사 문제가 마음에 걸리었다.

“엄마, 나는 가정교사 반대야. 혼자서도 할 수 있으이 내 성적 떨어지믄 그때 가서 생각해보든가.”
“엄마, 나도 반대! 가정교사 없어도 공부 잘 할 수 있어.”

준호도 뜻을 같이하자 덕희는 빙긋이 웃어넘긴 다음 여유를 부리며 입을 열었다.

“요새 있는 집은 다 가정교사 두고 그래. 아무래도 가정교사가 있으면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은 되지 않겠어? 같이 공부해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때 내보내면 돼.”

인호는 똑 부러지는 엄마의 말투가 낯설게 들렸다. 

“그래도 나는 반대야. 공부는 누가 시킨다꼬 되는 기 아이고 스스로 하는 거야.”

인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정식이 숟가락을 국그릇 위에 놓았다.

“좋다. 가정교사는 인호 성적 나오는 거 보고 결정하자. 그건 그렇고 너희들 말이다, 앞으론 엄마한테도 존댓말 써라. 잘된 집안을 보면 기본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예절이 갖춰져 있어. 이 아버진 제대로 된 교육은 못 받았지만 본래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다. 내 말 명심하고 엄마한테 존댓말 쓴다, 알았제.”

인호가 먼저 “네” 하고 답하자 준호는 한 술 더 떴다.

“인자 엄마를 어머니라 부를까예?”

그러자 ‘엄마’란 말에 애착을 갖고 있는 덕희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아직 엄마란 말이 듣기 좋다. 좀 더 크거든, 너희들이 커서 장가갈 때쯤 어머니라 부르면 되지.”

이정식은 덕희의 말에 토를 달면서 자신의 가르침에 한 번 더 힘을 실었다.

"집에서야 엄마라 부르더라도 나가선 어머니라 부르는 버릇을 들여라. 이제부턴 우리 집안 체통을 잘 지켜 나가자 이 말이다.”

그날 밤 인호는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인호는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고등학교 입학생 예비소집을 하는 날이었다. 그는 버스를 탔다. 예전에 살던 대신동을 지나며 동전을 주우러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엿 한 조각도 마음껏 먹지 못했던 당시에 비해 너무나 달라진 오늘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반면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에 대한 그리움도 마음 한 편을 맴돌았다. 동전 하나를 줍고 환호하던 그 기쁨은 지금 훨씬 많은 동전을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니 자신이 4반에 배정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학생모에 붙일 모표와 교복에 달 단추도 지급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황 기사가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인호와 준호의 교복을 맞추기 위해 시내로 나가는 김에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덕희의 뜻이었다. 덕희가 평소보다 한결 다정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아버지가 차를 하루 써라 하셨으니 시내에 나가 점심 먹고 교복 맞추자. 그리고 나서 송도에 가볼까? 너희들하고 드라이브 한번 하고 싶다. 인호야, 너 어릴 때 우리 다 같이 송도 간 거 기억나지? 송도 해수욕장 오랜만에 한번 가보자. 겨울철 바닷가라 추우니까 옷 따시게 입고 나와라.”

 

토요일이 되었다. 인호는 그곳에도 토요일 학생미사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성당을 찾았다. 황 기사가 가리켜준 대로 길을 건너갔더니 성당으로 보이는 건물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부지런히 걸으면 삼십분까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토요일엔 학생미사가 없었고 대신 어린이 미사가 있었는데 벌써 마치고 성전 안은 조용했다. 미사 안내판을 보니 저녁에 특전미사가 있었다. 주일을 지키기 곤란한 교우들을 위한 미사였다. 시간이 아직 일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동안 인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이 있었다. 외국인 신부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으로 이탈리아에서 온 신부였는데 서양인으로선 작은 체구에 유난히 큰 코가 인상적이었다. 인호는 신부님께 꾸벅 인사를 했다. 

“첨 보는 학생인데 어떻게 왔어요?”
“대구에서 며칠 전에 이사 왔습니다.”
“그래요, 영세는 받았나요? ”
“네. 요한이라고 함니다.” 

인호가 세례명을 밝혔다. 신부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미소 띤 얼굴로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했다.

“오오, 요한! 반가와요. 집에 가거든 어머니께 전입신고 하시라 하세요.” 
“저 혼자 이사 왔는데예.”
“오오, 요한! 혼자 부산으로 유학 왔군요. 그럼 본당 사무실에 우리 요한이 가서 신고하세요. 그리고 사제관에 놀러오세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맛있는 거도 주고 원한다면 기타도 가르쳐 줄게요.”

신부는 기타 치는 시늉을 하면서 활짝 웃었다. 인호는 신부님 말씀대로 본당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장에게 자신의 성명과 세례명, 이전 소속 본당과 함께 현주소를 알렸다. 사무장은 가족 상황도 물어보았다. 인호에 대한 기록을 마친 사무장은 그를 바라보면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비신자구나. 한 분이라도 성당에 나오시면 좋을 텐데. 그 문제는 일단 수녀님하고 상의해보마. 학생미사는 주일 아홉시니까 그리 알고, 신학기라 곧 학생회에서 신입생 모집을 할 거다. 같이 활동하면 여러 모로 좋을 거야.”

“네. 잘 알겠습니다.”

인호는 온 김에 기다렸다가 특전미사를 보고 다음 주부터 주일 학생미사를 가기로 작정했다. 얼마 후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일미사는 대부분 가족이 함께 오지만 특전미사라 인호처럼 혼자 오는 사람이 많았다. 입당 성가와 함께 미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인사했던 다니엘 신부가 입장했다. 인호는 준호라도 같이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주님의 궁전에서 드리는 첫 미사에 임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 드리는 미사라 마치고 나니 배가 무척 고팠다. 집에 돌아왔을 때 덕희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준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밥 안 먹었지? 성당에서 간식이라도 주던?”
“아뇨.” 
“준호는 먼저 먹었다. 아버진 늦는다 하시니 어서 먹자. 배고프겠다.”

덕희가 이미 차려진 저녁상에 밥을 담아 올렸다. 덕희 역시 인호를 기다리느라 식사 전이었다. 식사 도중 그녀는 인호의 성당이 멀다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드러냈다.

“성당이 멀다며? 저 앞에 가까운 교회 놔두고 꼭 그 성당 가야 돼?”
“엄마, 거긴 장로교회고 성당이랑 달라요.”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다 같이 예수님 믿는데....... 다음엔 엄마 말대로 가까운 교회에 가봐라. 큰 차이 없을 거다.”
“엄마, 나는 성당에서 세례 받고 견진도 받았어요. 고향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성당은 내가 새로 태어난 곳이에요.”

인호가 나름 생각을 가다듬고 꺼낸 말인데 엄마의 안색이 바뀌는 게 보였다. 덕희는 제 몸에서 태어난 자식에게서 듣는 새로 태어났다는 표현이 탐탁하지 않았다. 인호 또한 시무룩해져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인호는 동생 준호라도 제 편이 되어주길 희망했다.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성당에 같이 나갈 생각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준호는 일요일엔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했다.

입학식을 하루 앞두고 대구에서 경숙이 왔다. 이주 만에 보는 이모가 너무 반가워 인호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경숙 또한 인호를 껴안았지만 덕희가 지켜보는 앞이라 바로 포옹을 풀었다. 경숙은 새 집의 크기와 짜임새를 보며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한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현관을 들어서면 너른 거실이 나오고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치형 출입구가 보였다. 거실에서 오른편에 위치한 큰방에는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창이 시선을 붙잡았다. 큰방 입구문과 직각을 이루며 달려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열면 세면대와 작은 화장실이 딸린 침실이 나왔다. 

거실 왼편에도 정원을 향해 창이 나 있는 방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엔 주방과 사이를 두고 화장실을 겸하는 욕실이 갖춰져 있었다. 이층 또한 화장실을 겸한 욕실이 있었으며 방이 세 개였다. 경숙의 잠자리는 이층 인호의 옆방에 마련되었다. 이층의 다른 두 방에 비해 더 넓고 벽장도 있었는데 건축설계 당시 덕희가 훗날 언니가 와서 살게 될 방으로 염두에 두었던 곳이었다. 내일 준호의 중학교 입학식과 날짜가 겹쳐 준호에겐 덕희가 가고, 인호의 입학식엔 경숙이 가기로 했다. 인호는 경숙이 있는 옆방에 가서 이모와 오랜만에 잠들기 전 기도를 바치고 나왔다.

다음날 승용차는 이정식이 긴한 볼일로 울산을 가게 되어 이용할 수 없었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방향이 같아 택시 한 대에 네 사람이 탔다. 준호의 중학교가 중간에 있어 덕희와 준호가 먼저 내렸다. 택시가 인호의 고등학교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인호는 이모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에 곧 가정부가 들어온다는 것, 가정교사도 들어올 계획이 있었는데 자신의 반대로 취소되었다는 것, 준호가 태권도 유단자가 됐다는 것 등을 말하고 성당에 간 이야기도 했다. 신부님이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것, 신부님이 사제관에 놀러오라고 했다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엄마에게 말을 붙일 때는 존댓말을 쓰기 위해 입안에서 먼저 가다듬어야 했지만 이모에겐 전과 다름없이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인호는 이모가 대구 소식도 소상히 전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경숙은 아주 짧게 함축해 말을 맺었다.

“다들 잘 있데이. 니 마니 보고 싶다 칸다.”

입학식은 국민의례와 함께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는 동안 국기에 대한 맹세가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조직의 일원이 된 기분은 이어진 애국가 제창에서 더 강렬했다. 인호는 부동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교장선생님 축사와 학생회장의 환영사로 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교련복을 입고 어깨에 모형 소총을 걸친 재학생들의 열병식이 진행되었다. 밴드 대원들의 나팔 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열병은 학생의 모습이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인호는 고등학생이 되면 군사훈련인 교련수업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예비역 소령인 교련 주임교사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재학생의 모습은 군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고교 입학 첫날 인호가 떠올린 단어는 뜻밖에도 전쟁이었다. 학생들이 교련수업을 받는다는 건 전시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전쟁 때문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이 생각났다. 우리나라는 왜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적대시하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인호는 이모와 함께 4반 교실을 찾아갔다. 한 해를 보내게 될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과의 정식 대면이 이루어졌다. 국사 과목을 맡고 있는 김형태 선생이었다. 키순으로 부여받은 번호로 책상이 정해졌다. 한 학기의 시간표 등이 들어있는 유인물을 받으며 오늘은 바로 집으로 가고 내일 지각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당부와 함께 입학식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교실 뒤에 서 있는 학부형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인호는 경숙과 함께 교실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서 서로 아는 입학생들끼리 장난을 걸거나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국민학교 4학년 도중에 대구로 전학 가서 중학교를 마치고 온 인호에겐 모두가 낯설기만 했다. 삼삼오오 어울린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며 경숙은 인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듯 말했다.  

“요한아, 친구들 자알 사귀고 사이좋게 지내야 된데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경숙은 덕희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대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나간 인호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경숙에게 다시 와주기를 청했다.

“이모, 자주 와야 돼. 나는 방학 때나 되야 갈 수 있을 끼야. 다음에 올 땐 세실이도 데려오면 참 좋을 텐데, 내가 송도 구경 시키줄 낀께.”

버스에 오른 이모를 보내고 돌아오는 인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헤어지는 아쉬움을 쉬 감추지 못해 초점이 흐트러지던 이모의 눈빛이 자꾸 어른거렸다. 인호는 떠나는 것보다 보내는 것이 더 마음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구를 떠나올 때 글썽이지 않았던 눈물이 눈가로 살짝 삐져나왔다. 

 

옆자리에 앉은 짝의 이름은 최태영이었다. 첫날은 서먹하여 서로 멋쩍게 웃기만 했는데 이틀 만에 부쩍 가까워졌다. 태영은 짙은 눈썹에 크고 쌍꺼풀 진 눈을 가졌고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인호도 잘 아는 옛 전차 종점 부근에 살았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비운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여럿이 잡담을 즐기는 동안 태영은 바둑책을 꺼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바둑을 배워 아버지와의 대국으로 실력을 쌓았는데 요즘은 완전히 바둑에 빠져 밤에 잘 때도 천장에 바둑판이 그려진다고 했다. 태영이 바둑책을 보고 있을 때 인호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었다. 그는 제롬과 알리사의 지순한 사랑이 잘 이어지길 바라며 페이지를 넘겼다.

국사 시간이었다. 담임인 김형태 선생의 첫 수업이기도 했다. 김선생은 오늘은 첫 날이니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기 전에 김형태의 개인사를 먼저 소개하겠노라고 운을 뗐다. 그는 자신이 본교 졸업생으로서 선배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말상이라고 하는 긴 얼굴에 키가 커 학교 교직원 중 자신이 제일 길다고 자랑했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었고, 그의 개인사도 전쟁을 피해가진 못했다. 피난길에 비행기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장면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꽝! 하고 터지는 소리가 언제쯤 들릴지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포탄이 공처럼 보일 땐 바로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잽싸게 달아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들었다. 

“피난 와서 겨우 정착은 했지만 우리 집 형편은 말이 아니었지. 아버지는 똥지게를 지고 어머니는 행상을 다니셨어. 나는 요즘도 똥냄새가 싫지 않아. 그때 하도 맡아서 질린 만도 했지만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 냄새였거든. 남의 집 똥을 퍼주며 자식들 교육을 시켰어. 내가 너희들처럼 이 학교 학생이 됐을 때는 나도 관록 있는 장사꾼이 되어 있었지. 밤마다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어. 찹싸알떠어억! 메미일무욱! 하고 말이야. 그렇게 하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으니 내가 지금 너희들 앞에 서 있는 거다.”

모두 다 귀를 기울이며 다음 이야기를 기대했다. 김선생은 학생들이 경청하는 모습에 만족해하며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나갔다.

“너희들 이제 고등학생이다. 인생이란 긴 마라톤의 출발점에 선 거야. 지금까지 걸어서 왔다면 이제부턴 뛰어가야 한다. 숨이 턱까지 차는 고비를 넘겨야 할 때도 있을 거야. 이 레이스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가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 가다 보면 대학이란 관문이 나오는데 앞으로 삼년 동안 얼마나 힘껏 뛰었느냐에 따라 그 관문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각자의 코스가 정해지는 거지. 요즘은 대학 진학이 대세야. 다들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고 싶어 하지. 그걸 인식 못하거나 알면서도 형편상 포기하게 되면 결국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야. 대학이 곧 여러분들 장래고, 그 장래를 결정짓는 게 바로 고등학교 삼년이다. 그러니까 너희들 앞에 최대의 명제는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다, 공부!”

모두들 김선생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공부란 말에 그만 김이 새는 눈치였다. 인호는 현재의 고등학교에서 중학교 때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 대학 진학을 전제로 교육과정이 짜여 있는 것 같았다. 이학년부터는 문과와 이과로 반이 나누어지고, 서울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우수 학생들을 선발한 특별반이 운영되었다. 소위 입시 경쟁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리고 여느 학교와는 다르게 특수반이라는 좀 특수한 학급도 편성되어 있었다. 예체능 특기생을 비롯하여 면학 분위기에 지장을 주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학생들로 채워진 반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거실엔 묘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소파에는 덕희와 함께 먼저 학교를 마치고 온 준호가 앉아 있었다. 인호가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자 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서 앉으라 했는데 그 어조엔 뭔가 할 말이 많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테이블엔 손님이 다녀갔는지 채 비우지 않은 찻잔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준호는 테이블에 남아 있는 쌀강정을 먹다말고 형에게 야릇한 미소를 보내곤 이층으로 올라갔다. 인호가 소파에 앉자마자 덕희가 입을 열었다.

“학교는 멀어도 교통편은 그런 대로 괜찮지?”
“네, 다닐 만해요.”
“좀 전에 누가 다녀갔는지 알겠니?”

인호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빤히 바라보는 덕희의 눈빛은 마치 그가 간여된 일을 묻기라도 하는 듯했다. 

“누가 왔다갔는데예?” 
“수녀님, 수녀님 하고 여신도 한 사람이......”

인호는 자신의 문제로 수녀님과 상의해보겠다고 하던 본당 사무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호가 머뭇거리는 사이 덕희는 한껏 눌러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 성당 가는 거 말이다.”

인호는 엄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순간 불안해졌다.

“너도 이참에 좀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성당 다닌다고 사람들이 다 교양이 있고 예절바른 건 아닌 것 같더라. 오늘 수녀님하고 같이 온 여자는 남의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우리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다 하면서 말이야. 나한테 뭐라 그랬는지 아니? 아들만 혼자 성당에 보내지 말고 나보고도 성당에 나와 성가정을 이루라더라. 우리 집이 무슨 결손 가정으로 보이나 보지. 말끝마다 구원, 구원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게 듣기가 거북해서, 아니 우리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구원 받아라 합니까했더니 수녀님이 그러대. 우리 모두가 다 죄를 갖고 태어난 죄인이라고. 인호야,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까지 성당 다닐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사람들, 내가 지금 바쁘다고 하니까 다음에 또 오겠다길래 여기서 딱 못 박아두는 게 좋겠다 싶어 엄마가 한 소리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꺼냈는지 덕희는 잠시 뜸을 들이며 인호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인호는 뒷말이 몹시 궁금했다.

“뭐라 하셨는데예?”
“와도 문 안 열어준다고 했다. 그라고 내 아들 성당에 안 보낼 거라고.”
“엄마!”

인호가 놀란 나머지 제대로 항의도 못하는 사이 덕희는 한결 가라앉은 어조로 자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호야, 너는 아직 다 큰 어른은 아니잖아. 종교는 어른이 돼서 가져도 돼. 나는 니가 혼자 성당 가는 거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안 편하다. 대구 이모도 처음부터 성당에 다닌 것도 아니고 또 이모부 살아계실 땐 그리 열심히 안 한 걸로 안다. 네 이모는 원래 무슨 말이든지 잘 믿는 분이고, 혼자 살면서 의지할 데가 없으니 성당에 나간 거다. 그러다가 점점 정이 들다보니 계속 다니게 된 거라. 정 니가 가고 싶다면 대학 들어가고 난 뒤로 가거라. 그땐 말리지 않는다.”
“성당 다니는 거 하고 대학 가는 거랑 연결 짓지 마세요.” 

인호는 엄마의 일방적인 설득에 그냥 넘어갈 만큼 줏대 없는 아들이 아님을 보여줄 태세로 덕희를 정면 응시했다. 덕희는 눈살을 찌푸리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잔잔한 미소로 대응했다. 그녀는 아들이 곧이어 펼쳐질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너 좋은 대학 갈려면 얼마나 독하게 공부해야 되는 줄 아니? 시간을 쪼개고 쪼개 공부해도 모자랄 판인데 성당에서 시간 뺏겨봐라, 남한테 뒤지기 딱 좋다. 엄마 아는 사람도 성당 다니는데 자식은 대학 들어갈 때까지 성당 쉬게 한다더라. 인호야, 우리 집안은 아버지가 애써 일으켜 세우셨으니 앞으로 니가 잘 지키고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 명문대학 가야지 안 되겠나, 니도 그리 생각하지?”

인호는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꿈틀거리는 반발심을 억눌러야 했다. 엄마의 설득에 흔들리진 않았지만 엄마가 흐지부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층 계단을 올랐다.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지만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 보이려고 걸음을 일부러 무겁게 움직였다. 그리고 결단코 대학은 서울로 가진 않을 것이고 반드시 대구로 돌아갈 거라는 결심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지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정식이 퇴근하자 인호는 준호와 함께 거실로 내려와 인사를 했다. 덕희는 저녁상을 차릴 준비를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정식은 다시 제 방으로 가려고 계단을 오르는 인호를 불러세웠다.

“곧 저녁 먹을 건데, 여기 아버지 앞에 좀 앉거라.”

인호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이정식은 자세를 고쳐 인호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엄마하고 대학 가기 전까진 성당 안 가기로 약속했다며? 자알 생각했다. 대학 가서는 니가 원하는 대로 해라. 대한민국엔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인호는 자신이 동의한 적 없었는데도 약속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못마땅했다. 하지만 약속을 기정사실화해버린 아버지 앞에서 밀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저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성당 안 가겠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어요.”
“됐다! 성당 안 간다고 벌 받는다면 대한민국에 벌 받을 사람 수두룩하다. 아버지 말은, 당분간 성당 가는 건 미루고 공부에 전념하란 거다. 집에서 기도하는 거야 얼마든지 해도 괜찮아. 어른들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니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니까 그리 알아!”

인호는 제 뜻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결정에 대해 거부할 명분을 찾아보았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논쟁을 벌여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물러서는 게 나을 듯했다. 인호는 뱃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식사를 않겠다며 제 방으로 올라갔다. 불과 한 시간여 흐르는 사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원인 분석을 한 끝에 담임선생이 말한 대학이라는 관문 때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대학을 나와야 안정된 직장을 얻고,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출세가 보장되는 세태를 인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대학을 못가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공돌이, 공순이라고 비하하는 시선도 있는 게 분명한 현실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엔 야간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야망이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야망보다 주어진 일에 열심인 젊은이들에게 그 성실성을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꿈 없이 살아간다고 얕잡아보는 인식이 더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아무도 인호에게 식사하러 내려오란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할 때라 인호는 시장기와 싸우는 게 무척 힘들었다. 물이라도 쭉 들이켜고 싶은 허기에 더는 못 버틸 것 같았다. 방안을 서성이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얼른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덕희가 그의 방에 들어섰다.

“뱃속이 어떤데? 밥을 안 먹을 거면 죽이라도 쑤어줄까?”

인호는 엄마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는 좀 괜찮아졌어요. 저, 성당 문제는 신부님께 상담해볼께요. 대구 가서 이모하고도 의논하고요.”
“이모한테는 엄마가 전화하마. 이모는 다 널 위한 일인데 무조건 찬성하실 거다. 신부님 찾아가는 건 니가 알아서 해라. 신부님한테 부모님 뜻이 그렇다는 걸 말씀 잘 드려 봐. 영영 안 가는 게 아니고 대학 입시 마칠 때까지만 쉬겠다하면 다 이해하실 거다. 자, 내려가서 미역국에 밥 한 술 떠라.”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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