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저번 시간엔 한국 연구팀이 개발한 상온상압 초전도체 LK99의 진위논란에 대해 국내외의 반응과 평가를 소개해주셨고, 이번 시간엔 화제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들고 오셨네요. 타이틀을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영광고 몰락의 스토리>로 잡아주셨는데, 먼저 이 주제를 선택한 배경을 들려주시죠?
-->먼저 영화 ‘오펜하이머’를 스포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저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3시간짜리 대작으로 좀 난해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과학자 이름을 영화의 타이틀로 쓴 예를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전기영화도 타이틀은 Genius죠. 물리학자 이름을 영화 타이틀로 썼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인물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래서 과학 인사이드 소재가 될 만하다고 보고, 그의 스토리와 시대적 시사점을 소개할까 합니다.
Q2. 그러고 보니 영화 제목에 과학자 이름이 들어간 건 저도 처음 보네요. 자, 그렇다면 오펜하이머가 어떤 인물이기에 영화 제목으로까지 썼을까, 차분히 그의 인생스토리를 들어볼까요?
-->이 영화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저널리스트인 카이 버드와 영문학자이자 미국역사학 교수인 마틴 셔윈이 25년간 탑사와 인터뷰를 지은 오펜하이머 평전이죠. 이 책의 내용에다 제가 갖고 있는 오펜하이머와 연관된 리학 정보를 추가해 소개드릴까 합니다.
Q3. 책의 목차에 맞춰 출생과 성장기부터 시작하는 게 인생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좋을 것 같네요.
-->오펜하이머 아버지는 유대인인데, 무일푼으로 미국에 이민을 와서 직물수입업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런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부유한 가정 덕택에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았죠. 오펜하이머는 영어, 프랑스어, 문학 광물학에 관심을 보이는 다재다능한 학생이었어요. 18세에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는데, 물리학 대학원 입학 자격까지 받고 3년만에 최우등 졸업했죠.
Q4. 박사학위는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받은 걸로 경력에 나오네요. 유럽에 유학을 갔나요?
-->1920년 당시 물리학의 중심은 유럽이었죠. 20세인 192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톰슨의 연구실에 들어갔죠. 톰슨은 전자를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당대 물리학의 거장이었죠. 이때 그는 지병인 ‘신경과민’이 심해졌는데, 지도교수인 실험물리학자 블래킷의 인정을 받지 못한 좌절감과 질투심으로 사고를 칩니다. 독을 바른 사과를 블래킷의 책상에 올려놓는 돌발 행동을 한(혹은 했다고 주장하는) 거죠. 다행히 블래킷은 그 사과를 먹지 않았고, 오펜하이머는 정신과 상담을 조건으로 사태가 수습되긴 했어요.
케임브리지에서 힘겨운 1년을 보낸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이론물리학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때마침 괴팅겐대학 물리학 연구소장이던 막스 보른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 보른의 제자가 됩니다. 당시 괴팅겐은 물리학 혁명의 산실이었죠. 하이젠베르크, 디랙, 파울리, 요르단, 페르미 등 20대 초반의 천재 물리학자들이 몰려 있었죠. 천재들 틈새에서 오펜하이머는 1년 만에 17편의 논문을 발표해 떠오르는 스타로 주목받게 됩니다. 보른의 제자로 들어간 지 2년 만인 23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물리학의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각오로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 둥지를 틉니다.
Q5. 오펜하이머의 물리학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오피는 1946년, 1951년, 1967년(사망한 해) 세 차례 노벨물리학상 후로로 공식지명 되었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죠. 후보로 지명됐다는 것 자체가 업적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해주죠. 일부에서는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중성자별과 블랙홀 발견 예측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해요. 사후에 이 연구가 확증되었으니까요. 오피 자신은 가장 큰 물리학 공헌으로 ‘양전자 존재 예측 연구’를 꼽았어요.
Q6.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네요. 그의 다른 분야 관심은 어떤 게 있나요?
-->그는 다재다능하다 보니 한 우물을 깊게 파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는 스타일이었다고해요. 그리고 그는 철학,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게 물리학 연구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기도 했죠. 특히 인도철학에 심취했는데 독학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원문으로 읽기를 즐겼죠. 그는 물리학자 동생에게 “GITA는 매우 쉽고 매우 놀랍다”며 “알려진 언어로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노래”라고 했다고 해요. 그의 힌두 사상 관심은 닐스 보어와의 교류에서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저번에 소개했다시피 닐스 보어는 양자론 철학을 정립할 때 상보성 원리처럼 동양사상을 원용한 과학자이지요.
Q7. 인생 스토리에 로맨스가 빠질 수 없겠죠? 이쯤해서 오펜하이머의 러브 스토리를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오펜하이머의 여성에는 ‘진정한 사랑’과 ‘평생 반려자’ 두 인물이 있는데요, 전자의 이름은 진 태트록인데, 그녀는 버클리대학 문학과 교수의 딸이자 스탠포드 의과대학생(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됨)인데, 열정적인 성격이었죠, 오펜하이머를 이론에서 행동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 있었어요. 그런데 진은 공산당 신문 Western Worker에 글을 썼고, 공산주의협회 회원이기도 했죠. 진과의 접촉은 후에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로 몰리는 빌미가 되기도 했죠. 진은 오피를 사랑하면서도 결혼에는 뜻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피는 캐서린 ‘키티’ 퓨닝 해리슨을 만나 결혼하죠. 그녀는 네 번째 결혼이었죠. 공교롭게도 키티 역시 버클리대학 학생이면서 전직 공산당원이었어요. 키티의 전 남편도 스페인 내전에서 사망한 공산당 활동가였거든요. 오피는 키티와 사이에 두 자녀를 두고 평생 서로 보살폈는데, 진과의 관계는 계속했죠.
Q8. 오펜하이머의 러브 스토리만 잘 정리해도 영화 한 편 만들어질 것 같은데요. 자, 이제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는 무대인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차례가 된 것 같은데요. 여기부터 오펜하이머의 영광과 몰락의 드라마가 본격 펼쳐질 것 같은데, 다음 시간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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