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
승인
2022.07.01 22:55 | 최종 수정 2022.07.04 10:13
의견
0
여름
고 명 자
새는
해가 솟는 쪽에서 날아왔다
새소리로 푸르러진 잎들 짙어간다
작은 발가락으로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
한 호흡도 흐트러짐 없다
어떤 파열음도
불꽃도
일으키지 않는다
새의 몸짓 따라해 보려고
두 팔을 허공으로 쭉 뻗었다
넝쿨풀에 나무에 그 너머에 손가락을 걸쳐본다
힘줄과 힘줄이 맞닿아 맥박이 뛴다
내 몸도 푸르스름해간다
식물들의 체온
벌레들의 체온으로
대지의 아침이 달아오른다
새는
해를 뚫고 날아갔다
푸른 것 한 잎을 물고
무한 극점을 향하여 사라졌을 때
흠칫, 흔들린 것은 푸른 가지가 아니라 나였다
텃밭으로 여름이 왔다
<시작 메모>
세상의 모든 유리창을 투과한 빛으로 새벽이 점점 앞당겨진다. 야산을 타고 내려온 넝쿨식물이 창문을 치고 들어와 방안에 풀냄새를 풀어 놓은 아침이다. 내가 잠들어 있던 밤새 푸름이 더 짙어졌다. 집 바로 옆 공터에는 온갖 생명체가 깃들어 산다. 제멋대로 자란 잡목과 여러해살이풀과 몰래버려진 쓰레기와 내가 가꾼 엉성한 텃밭이 얼크러져 넌출넌출 여름이 익어간다. 몇 개 열린 고추와 가지꽃, 작은 손바닥만한 들깻잎 모종에 온갖 벌레, 온갖 곤충이 날고 기고 먹고 번식하며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고 산다. 이 여름 땅속으로, 허공으로, 하늘로, 기어코 내 방안으로 쳐 들어오는 생명체들의 저 힘센 본능을 막아낼 수 없어 자리를 내어주기도 한다.
새는 어째서 날아왔는가, 그 작은 날개로 그 청아한 소리로 포르르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기다리는가, 영원히 풀어내지 못할 전언 하나를 내 창문 아래 툭 떨어뜨려 놓고 날아가 버리는가.
◇ 고명자 시인
▷2005년 문예지 『시와 정신』 등단
▷시집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외 1권
▷부산 작가회의 회원
▷백신애 창작기금, 「시와 정신 문학상」 수상
※(사)목요학술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시민시대』는 본지의 콘텐츠 제휴 매체입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