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씩 ‘백반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전국 곳곳을 다니며 노포나 그 고장의 대표 음식을 소개한다. 여타 맛집 방송처럼 요란하게 맛의 비결을 캐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새로 뜨는 신흥 맛집을 홍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은 시대에 뒤처진 듯한 낡고 오래된 가게들, 오래 장사를 해서 맛의 연륜이 두텁게 쌓인 음식점들을 찾아다닌다. 그곳에는 필시 그 가게의 희노애락과 영광을 함께해온 꽤 연식 있는 단골들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허영만 선생은 무얼 먹으면 좋은지를 묻고 그 집에서 내놓는 음식을 먹는다. 그것이 설령 집밥처럼 흔한 ‘백반’이라고 해도 주인장이 권하면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런 가게에는 속도전의 빠름이나 노련한 장삿속이 없다.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느 날 가수 싸이가 백반기행에 출연했다. 자칭타칭 미식가인 싸이가 허영만 선생한테 이런 말을 한다.
“노포를 찾아다니면서 제일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있어요. 간판이 센 집들이 있잖아요. 빨간 손글씨체로 ‘국밥’이런 식으로 써놓은 집들이요.”
나는 싸이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화 포스터 같은 진지한 글씨체로 주메뉴 하나를 간판에 떡 하니 적어놓은 음식점은 의심할 바 없이 진짜라는 의미다. 떠올려보면 내가 엄지를 세워 인정하는 집들도 간판에 상호가 아니라 대표 메뉴 하나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종로 피맛골 부근에는 ‘아귀탕’이라고 붉은 간판을 단 집이 있었고, 동대문 시장 부근에는 ‘닭한마리’라고 검정 글씨로 쓴 집이 있었고, 파주 출판단지 부근에는 ‘탕수육’이라는 간판을 내건 집이 있다. 그런 간판에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트렌드니 유행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롯이 내 갈 길만 가겠다는 범접하기 힘든 결기 같은 것, 묵직한 철학 같은 게 간판에 있다.
음식점에 들어서면 벽면의 메뉴 리스트나 점원이 내미는 메뉴판을 가장 먼저 들여다보게 된다. 이때 메뉴판 바라보기는 일종의 맞선 보기와 같다. 첫인상의 호불호가 여기서 결정된다. 식사의 시작은 음식이 나온 후부터가 아니라 메뉴판 구경부터이다. 메뉴판은 가게의 얼굴이다. 요리사의 요리 구력이나 장사의 이력이 읽히고, 주인장의 품성이나 인생관이 숨어 있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확대해석하면서 메뉴판을 찬찬히 뜯어본다. 메뉴판의 메뉴 구성이나 가격정책은 장사의 전략과 동시에 주인의 가치관과 음식의 지향을 품고 있다. 손님은 단순히 음식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내놓는 사람도 삶의 태도나 환대하는 마음, 음식값 이상의 숭고한 사명을 메뉴에 포함해 둔다. 메뉴판은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메뉴판은 시대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진행 경과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백서이기도 하다. 메뉴판은 여러 형태를 띤다. 벽면에 붙어있는 메뉴판부터 테이블에 세워져 있는 스탠드형 메뉴판이 있는가 하면, 넘길 수 있게 돼 있는 카탈로그나 북 형태도 있다. 분식집에 가면 아예 주문서와 메뉴판이 한꺼번에 기능하는 주문서 메뉴판도 있다. 요즘은 메뉴판이 사라지고 대신 가게 입구에 디지털 기계가 떡 하니 서 있어, 메뉴를 선택해서 입력하고 결제를 마치면 자동으로 주방에 전송되게 한 전자식 주문 기계가 점차 늘고 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일 텐데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음식점에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건 슬픈 역설이다.
메뉴는 그 사회의 경제력과 연동되어 발전하고 개별자들의 개성과 취향을 반영해 가짓수가 분화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어떤 메뉴는 시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뉴도 있다. 이제 백반이라는 말이 사라지거나 정식이라는 말을 풀코스나 세트 메뉴라는 말이 밀어내고 있지만, 사람의 입맛이나 추억의 음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업무 차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측 관계자의 초대로 제법 규모가 큰 중식당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놀란 것은 식당의 규모가 아니라 메뉴북이었다. 그야말로 두꺼운 한 권의 요리책이 내 앞에 놓였는데 그 안에는 처음 보는 수십 가지의 요리 이름들이 채소류, 고기류, 생선류, 해산물류, 면류 등등으로 분류돼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물론 우리를 초대한 중국 측 인사가 주문을 도맡아 했기 망정이지 옆에 통역이 있다 해도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문자가 메뉴에 대해 물으면 점원이 자세히 설명하거나, 혹은 점원이 메뉴북을 넘겨가며 분류별로 요리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주문이 이루어졌다. 주문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드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그 메뉴북에는 사람은 안중에 없고 위압적이고 화려한 허세가 가득했다. 인간의 문제는 늘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발생한다. 가짓수가 많은 메뉴판에서 적당한 음식 하나를 고른다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의 전제가 되는 다양성은 모든 경우에 다 좋은 건 아니다. 한 사람에게서 다중의 인격이 보인다거나 뚜렷한 정체성이 드러나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피하게 되지 않던가. 나는 점점 단품 메뉴를 파는 집을 즐겨 찾는다. 단품이 아니라도 고기면 고기, 국밥이면 국밥, 국수면 국수처럼 카테고리가 명확하게 나뉜 집을 선호한다. 주메뉴는 가장 간결하게 그 집의 정체성과 본질을 말하고, 동시에 나 자신의 욕망을 명확히 읽게 만들어 망설임 없이 메뉴를 선택하도록 돕는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조용한 주택가에 ‘진진’이라는 중식당이 있다. 그 받기 어렵다는 미쉐린가이드 별점을 받은 집이다. 여기 주인장 왕육성은 코리아나호텔 중식당 ‘대상해’의 주방장 출신이다. 50년 업력을 가진 그가 인생 2막으로 선택한 식당은 그의 명성에 알맞은 삐까번쩍한 강남이나 번화가 한복판이 아니라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힘든 후미진 곳에 있다. 그는 동종업계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고, 동네 상권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위치뿐만 아니라 메뉴에서도 그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 집에는 온갖 화려한 중화요리 대신에 딱 10가지 메뉴만 있다.
그는 메뉴를 극단적으로 줄임으로써 주방의 집중력과 음식의 질을 높이고, 신선한 재료를 확보하고 소진할 수 있게 했다. 중식당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 메뉴인 짜장면과 짬뽕도 없다. 이 두 음식은 추억의 음식이고 대중적인 음식이지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느긋하게 요리를 음미하면서 먹는 게 아니라 뚝딱 허기를 면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는 먹기 위해 먹는 요리가 아니라 즐김과 사귐이 있는 요리를 내놓고 싶었다고 한다.
음식은 생존을 넘어 놀이처럼 인간의 외로움을 충족해주고 고단한 영육을 위무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진의 메뉴 정책은 오너의 철학과 지향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곳의 메뉴판은 어떻게 사람과 사회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음식의 대답이다.
메뉴판은 단순히 차림표가 아니다. 메뉴는 자유로운 선택 방식을 통해 동등성과 평등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어떤 메뉴판은 적나라하게 계급성과 차별성을 드러낸다. 어떤 메뉴는 일반의 선택을 제한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가격뿐만 아니라 생경하고 관념적인 메뉴의 이름이나 식재료의 희소성을 통해 음식 수용자를 극소수로 한정한다. 인종과 신분과 계층을 나눈다. 메뉴의 차별성은 자본주의의 슬픈 표상이다. 메뉴판은 사회학이고 정치이고 심리학이면서 인생의 요약이다. 결국 우리는 가장 익숙한 음식을 찾는다. 수많은 세상의 메뉴 중에 한 끼에 한 그릇, 그 순간의 욕망을 충족해 줄 단 하나만을 선택한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 순간 우리는 늘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게 된다. 그래서 어떤 메뉴를 선택해야 효용가치가 높고 현명한지가 아니라, 어느 것이 내게 더 소중한지, 무엇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평소에 정확히 아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메뉴가 더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금세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지만, 기꺼이 내 앞에 놓인 내가 선택한 음식을 맛나게 먹어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이고, 내가 주문한 삶에 대한 예의이므로.
◇ 림태주 시인 :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다. 출판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관계의 물리학』, 『그리움의 문장들』, 『그토록 붉은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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