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42) 숨은 보석들을 캐낸 시사토론반 

나의 교단일기 /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2.07.11 17:13 | 최종 수정 2022.07.13 09:47 의견 0

학교를 옮기다 보면 근무환경이 아주 좋은 학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교도 있다.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은 학교에도 빛나는 아이들은 많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은 참말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고 선발된 집단으로 이루어진 학교에 근무하다가 옮기게 된 다음 학교는 대체로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다. 그 학교도 지금은 주변환경이 나아진 데다 격차를 줄이려는 교육청의 노력, 학교 공간혁신 사업 등으로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시멘트 바닥에 교실에는 기자재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데다 남녀공학에 급당 인원도 많은 학교여서 교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학교였다.

가정이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이 많다 보니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대화의 절반은 욕인 아이들도 많았고, 시멘트 바닥이다 보니 실내화도 안 신고 다녀 흙먼지가 자욱해 목이 자주 아팠다. 무엇보다 학생 중심 모둠 수업은 엄청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짚어주어도 기본적인 과제조차 해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서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내가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그 시절이 나에게는 교사로서 가장 보람이 큰 시절이었다. 좋은 동료들과 귀한 아이들을 만나 교사로서도 인간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시기였다. 그 학교가 지닌 자연조건,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은 매우 훌륭했다. 학교 바로 뒤에는 등반하기 딱 좋은 정겨운 산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점심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 있었고 교무실, 교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낙동강도 펼쳐져 있어 긴 하루가 지나가는 무렵에는 황홀하기까지 한 저녁노을도 볼 수 있었다.

모여서 함께 학습하는 사진 삽입
단체 교육 학습

힘든 아이들이 많다 보니 교사들은 더 자주 모여 고민을 나누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교사들은 모였다 하면 결국 아이들 이야기로 귀결된다. 같이 모여서 수업 방법도 나누고 아이들 생활교육도 협의하게 되면서 교육에 관련된 좋은 책도 같이 읽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 영화모임도 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교사들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고 토론하다 보니, 교사들의 협력적 성장은 자연히 수업, 평가, 학급 운영, 생활교육 등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수업이 아이들 중심으로 변하고 학교 축제나 행사를 아이들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자치의 길도 열어주게 되면서 학교생활을 신나고 행복해하는 아이들도 늘어갔다.

어릴 때부터 평화로운 가정에서 의미 있는 체험들을 많이 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방치되거나 어린 나이에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아이들이 있으나,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이것을 나는 숱한 교육이론과 책, 교육전문가가 아닌 내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바로 방과후수업으로 운영한 ‘시사토론반’에서였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할까? 고민 끝에 나는 방과후수업으로 ‘시사토론반’을 열기로 했다. 

“신문이나 책을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싶은 사람은 다 이리로 와라.”

교실마다 모집 공고를 붙여 두었다. 성적 등의 조건을 내걸지 않았음에도 책 읽고 토론하는 게 부담이 되어서였던지 신청한 아이들은 의욕적이거나 대체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매주 2일 정도 방과후에 모여서 다양한 주제로 토론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만들고 싶은 학교는 어떤 모습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자유냐, 밥이냐?’ ‘부산은 살기 좋은 사회인가?’ 등등.

그러다 간혹 직접 현장 체험도 하고, 전문가를 초청해 특강도 들었다. 아이들은 서로 경청하고 존중하면서 토론하는 이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참여도가 높아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도 이루어짐을 느끼게 되었다. 

시사토론반에서 전문가 특강 듣는 사진 삽입
전문가 특강을 듣는 시사토론반

시사토론반을 운영하면서 내가 몸소 깨달은 것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아이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것, 보석을 알아보고 다듬어 주는 부모와 교사의 힘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 대화와 질문, 토론을 통해 아이들은 생각이 자라고 성장한다는 것,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할 시간이 주어지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성장한다는 것,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 자연스럽게 학업성적도 올라가고 진학으로 이어진다는 것.
 
원래 보석인 아이들이었지만 또 그런 아이들이 주로 모여서였겠지만 시사토론반에서 함께 한 아이들의 진학 결과는 놀라웠다. 소위 일류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자신의 진로를 잘 개척하여 현재 훌륭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다.

허준이 교수가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것은, 벼가 익기를, 김치가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듯 구구단을 제때 못 외웠을 때도, 대학가서도 학교생활에 별 흥미를 못느껴 우울증을 앓고 연이어 F학점을 받았을 때도 믿고 기다려준 부모님이 계셨다. 히로나카 교수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겠지만, 그는 오늘의 영광은 자신의 수첩에 기록된 매순간 함께 해준 고마운 친구들과 자신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선생님들, 수십 명의 롤 모델들 덕분이었노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을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래서,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는 나태주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고 정성을 다하며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이 할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르 클레지오 말처럼, 어떤 아이도 인류의 향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 주변이 혼잡하고 불편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아주 작은 불빛 아래서 글을 읽는 그 보잘것 없은 아이에게 온 인류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선 원장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교육학 박사>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