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39) 아이들이 그린 양심(良心)

나의 교단일기 /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2.05.31 15:24 | 최종 수정 2022.06.03 21:29 의견 0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아픔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

-이해인의 〈꽃잎 한 장처럼〉 중에서

 

살아오면서 이해인 시인의 시(詩)는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때로 시 한 편이 열 권의 책보다 힘이 되기도 했다. 나 역시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워 숨고 싶을 때가 있다. 최근 아끼는 후배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서 딱 이 맘이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아 문자를 보내다 말고, 글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그래,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겠지. 그의 아픔을 꽃잎으로 포개어 들고 가자.’

조카들이 추앙(推仰)하는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건 평범한 현대 직장인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은 갑갑하고 막막하고 아프다. 직장인만이 아니라 한창 꿈을 꾸고 끼를 키워나가야 할 시기의 아이들도 아프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짠~하다. 공부만 하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공부밖에는 할 일이 없는데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말하는 어른들도 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학교를 흔히 군대나 감옥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고 뭔가 감시하고 통제하는 듯한 느낌도 그렇다고 말한다. 참으로 슬픈 비유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수 없어 더 우울하다. 교육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실타래처럼 엉켜있고, 아이들 학창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니 교육개혁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적어도 내 수업에서라도 우리 교실에서라도 자존감을 찾고 희망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학급경영과 수업에 몰입했다. 
  
실패하거나 부끄러운 수업도 더러 있었지만, 스스로 감동한 수업들도 제법 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양심과 도덕’ 수업이다.

1995년 3월부터 본격 적용되기 시작한 6차 교육과정,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단원이 처음 들어왔다. 6차 교육과정은 창의성과 도덕성이 처음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교육과정이기도 하다. ‘양심과 도덕’이라......교재 연구를 하면서 이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양심(conscience)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사람의 세계관, 가치, 인생관, 신념 등 그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탄생된 인격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마음의 소리”로 정의한다. 변호사인 조카 형진이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양심’의 법률적 의미가 잘 외워지지 않아 좋아하는 노래에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 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 개사해서 불렀더니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다는 경험도 들려주었다.

뻔한 말인 거 같은데 막상 말해보라고 하면 어려운 인생처럼, 도덕수업도 그러하다. 그래도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물꼬가 트인다. 교과서에 양심의 뜻을 마음속의 재판관, 어둠을 밝히는 등대로 표현한 것에 착안해 등대 그림을 그렸다. 그날의 수업은 등대 그림을 보여주며 시작했다. 

“조용히 해라, 바로 앉아라, 주목하라, 오늘 어디 배울 차례냐.....”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아이들은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된다. 통상 나는 교과서를 펴는 대신 이야기나 시, 노래로 말문을 연다. 그러면 약속한 듯이 아이들은 제 자리로 돌아오고 교사에게 주목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물론 그 이야기나 시, 노래는 자연스럽게 그날의 수업 내용과 연계되어 물 흐르듯이 수업이 진행된다. 

그림을 보여주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등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등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양심 상태를 그림으로 한번 그림으로 나타내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신나게 양심을 그린다. 아이들 발표를 듣다 보면 교사의 백 마디 말이나 교과서보다 그림 한 점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기막힌 시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중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양심 그림 몇 점을 소개한다.

멈춰버린 시계
양심 그림 - 멈춰버린 시계

-내 양심은 멈춰버린 고장 난 시계와 같다. 멈춰버린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일치하듯이 내 양심과 행동도 하루에 두 번 정도밖에 일치하지 않는다. 앞으로 정상적인 시계처럼 나도 내 양심에 따라 실천하도록 노력하겠다.

 알이 빠진 진주 목걸이 사진 삽입
양심 그림 - 알이 빠진 진주 목걸이 

- 내 양심은 알이 빠진 진주 목걸이와 같다. 원래는 알이 꽉 채워진 진주목걸이였는데 양심을 팔아먹어 알이 빠져있다. 다시 알을 채워 완전한 목걸이로 만들겠다. 팔아먹은 양심도 찾아 다시 아름다운 나로 거듭나겠다.

 독버섯 사진 삽입 
양심 그림 - 독버섯. 이 사진은 후에 교육부에서 자료를 가져가 도덕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 내 양심 상태는 마치 겉으로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사실은 독을 품고 있는 독버섯과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모습은 양심적으로 비춰지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두운 부분이 많다. 반성을 통해 올바른 양심을 채워 나가야겠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보면 배우는 게 참으로 많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쇠귀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가 가르치고 배운다. 

이미선 원장
이미선 원장

답답한 학교 현실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다. 다행한 것은 이런 교육 현실을 혁신하고자 뜻있는 교원들이 ‘새로운 학교 네트워크’ 같은 자발적인 연구 모임들을 만들고 공부하며 함께 실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청 역시 이런 교육현식을 위해 적극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최근 우리 교육은 경쟁보다 성장으로, 소수의 엘리트 중심보다 한 아이도 놓치지 않는 공공성의 길로 큰 걸음 내딛고 있다.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면서도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이.'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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