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한 주간의 피로를 풀며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폰에 ‘유나’라고 이름이 뜬다.
“아 유나구나,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선생니임 ~~~” 하고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왜, 유나야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그래, 전화 잘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어. 잘 지내지?”
“모르겠어요. 잘 지내는건지.....그런데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요.”
“왜, 무슨 일로? 제약회사에는 계속 다니는 거지?”
“아니요, 선생님. 회사는 그만두고 이 나이게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그래? 무슨 공부를?”
“응용바이어공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중이예요. 아이 둘 다 아직 초등학생이라 손이 많이 가는데, 학비를 벌려고 틈틈이 일하면서 빡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정말 힘이 많이 드네요. 저도 제가 왜 이리 힘든 길을 찾아서 고생하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제가 욕심이 너무 많은가 봐요. 그러다보니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만 같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러네요. 내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일인데도 왠지 오늘은 너무 지치고 방전이 된 거 같아 선생님에게 전화했어요.”
“그래, 전화 잘했다. 정말 힘들겠다. 그래도 대단해. 역시 유나다.”
“생각해보니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제 나이 정도였던 거 같고, 아이 둘의 엄마에다 직장여성이었는데, 제 눈에 선생님은 하나도 힘들거나 지쳐 보이지 않고 한없이 밝고 우아해 보였어요. 근데 저는 왜 이럴까요?”
“하하 그럴 리가. 나도 많이 힘들었어. 학생인 너희들 눈에는 잘 안 보였을지몰라도 난 물 아래에서는 발을 정신없이 움직이지만 물 밖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나도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이 보면 육아에 공부에 용기 있는 여성으로 보일걸? 그래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늦게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해나가는 유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응원할게.”
“아, 감사합니다. 늘 연락드려야지 하면서도 바쁘다보니 이렇게 연락이 늦었어요. 그래도 마음속에는 늘 선생님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롤모델인거 아시죠? 오늘도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 속이 풀려요. 선생님의 위로가 많이 그리웠나 봅니다. 앞으로는 자주 연락드려도 되지요?”
“좋지. 나도 늘 유나를 잊지 않고 있었어. 연락해주어서 고마워. 언제든 전화해도 좋아. 밤이 늦어도, 휴일이라도 괜찮아. 유나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기쁨이기도 하니까. 이제 교사와 학생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의 선후배로, 직장여성으로 서로 다독이며 지내자. 나도 위로가 필요해. ^^ ”
유나는 고등학교 때 만난 제자이다. 그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학생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친구들의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학생이어서 반장이 된 거 같다. 유나는 아이들에게 신뢰도 두텁고 리더십도 뛰어나 반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많은 교실에 들어가다 보면 자꾸 들어가고 싶은 반이 있고, 왠지 부담스러운 반도 있는데, 유나가 속한 반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주고 반응이 좋아 수업을 하면 절로 신이 났다. 크게 웃어주고 맞장구치며 호응해주어 수업을 하면 되려 힘을 받는 반이었다. 심지어는 기립박수까지 쳐준 반이어서 교직생애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 반이었다.
유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소위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는데, 1학년을 마치고는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겠다고 찾아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가정형편도 썩 좋지 않은데 서울에서 공부하기가 부담이 많이 되고 자신이 오래도록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난 응원한다고 말했다. 서면의 한 냉면집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기가 어렵지, 찾은 경우는 대체로 성공한다. 유나도 1년 후 목표로 했던 부산대학교 약학대학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유나는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약대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 이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아 기르며 열심히 살아왔다.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충분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유나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해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나 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유나가 왜 울면서 전화를 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얼마 전 서울 출장이 있어 서울에서 만났는데 자신이 쓴 책이라며 선물로 내놓았다. 세상에! ‘대한민국 신약개발 성공전략’ 이라니. 제목부터 나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이런 책은 그냥 생활 속 경험으로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해도 나오기 어려운 책이 아닌가.
책 첫 표지를 펴니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이미선 선생님,
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이다.
서울에서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교사와 제자의 관계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 직장 다니다가 배움의 길로 다시 들어선 동지로, 직장여성으로 아이 둘의 엄마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공감대가 많아 지금도 서로 소통하며 힘을 주고받는다.
- 선생님 주말에 애들 데리고 한국민속촌 가서 찍은 사진이예요. 목련을 보니 선생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저도 후덕한 아줌마 다됐죠?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 어머나 이뻐라. 아이들이 많이 자랐네. 고생 많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정성과 사랑이 필요한지 나는 알지. 더욱이 맞벌이 여성의 고충은 더하지.
- 선생님 저 드디어 책 출간해요. 만나면 드릴게요.
- 축하해. 대단하다 우리 유나. 정말 어려운 과제를 수행했네. 나처럼 그냥 경험을 나누는 신변잡기도 아니고. 대단해.
- 에이 선생님이 쓰시는 글도 신변잡기는 아니죠. 얼마나 감동적인데요. 사실 이 책 정말 피, 땀, 눈물 흘려가며 쓴 거 맞아요. 이렇게 결과로 나오니 정말 뿌듯하네요.
- 그래, 고마워. 우리 서로 길동무가 되자.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도 흐르고 희망도 흘러갑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노회찬님의 말처럼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지 않는다.
눈물도 피와 땀도 흐른다.
다행한 것은 희망도 꿈도 같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산다.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교육학 박사>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