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게 준 선물 (31) - 사고뭉치 아이들의 대모(代母)

나의 교단일기 /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장

이미선 승인 2022.01.26 19:53 | 최종 수정 2022.01.29 09:06 의견 0

저마다 유일하고도 귀하게 이 세상에 왔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능력주의 신화에 빠진 우리 사회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 결과에 중점을 두는 교육 풍토 때문.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보석인지를 알지 못하고 아픈 오늘을 살아내는 아이들은 ...... 불안하고 무기력하다. 

교사 시절, 아이들은 제각기의 고민을 안고 찾아온다. 자신도 잘하고 싶고 부모님 기대도 저버리고 싶지 않은데 현실은 쉽지 않다며 좌절감과 불안함을 이야기하며 우는 아이가 많았다.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그림을 잘 그려도 노래를 잘 불러도 성적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너진다고. 나 역시 그 한계를 알기에 당장의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거 같다. 다만 옳은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며 멘토가 되어주는 일이 ‘나의 길’이었다.

유난히 사고뭉치가 많아 선생님들마다 수업을 다녀오면 힘들어한 해가 있었는데, 겨울방학이 지나고 새 학년 반 편성을 앞둔 2월 어느 날, 사고뭉치 녀석 열댓명이 나에게 몰려와서 대뜸 말했다. 소위 그 반의 짱들이었다.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그 시절 별빛같던 아이들 하나 둘 셋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그 시절 별빛같던 아이들 하나 둘 셋

“쌤, 부탁이 있습니다. 3학년 올라가면 선생님이 우리들 다 모아서 담임해주면 안돼요? 사람들이 우리를 문제아라 하는데, 쌤은 우리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잖아요. 쌤은 우리들의 대모(代母)입니다. 쌤이 우리를 담임해주면 열심히 학교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는 크게 웃어 넘겼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정말 아이들 말대로 해볼까? 한 반에 다 모아서 내가 담임을 하면 다른 선생님들의 짐을 덜어드리고 아이들도 본인들이 원한 일이니 책임지고 잘 해내지 않을까?’ 

다음날 교감선생님과 의논을 해보니, 웃으시며 그건 어렵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 아이들이 한 반에 모여있으면 그 반 들어가는 교과 선생님들마다 수업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냐, 생각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답이 아니라고 하셨다. 

“담임은 어렵고 대신 너희들 3학년 수업을 전담하면서 1년 내내 같이 할게.”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주면 좋겠다며, 자신들도 이제 3학년도 되고 놀만큼 놀았으니 앞으로는 잘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마음먹은 것처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는 그 아이들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어느 날 흥분한 얼굴로 찾아왔다. 아이돌 수준의 외모를 가진 데다가 춤과 노래 실력도 뛰어나고 특히 체육대회 하는 날이면 빛나는 스타가 되는 아이였다. 릴레이 마지막 주자였던 그 아이는 말처럼 빠르게 달려 한참 뒤떨어진 자기 팀을 1등으로 만들었고 전교생에게 환호를 받던 아이였다. 그 아이를 보면서 우리 교사들은 입을 모았다. “운동장에서 저리 날아다니는 아이를 교실에 붙잡아 놓고 재미없는 수업을 듣고 있자니 지는 또 얼마나 지루하겠노. 우리가 잘못했네.” 하면서 웃기도 하고 반성도 했다.
 
그 아이는 흥분한 듯 말했다. 

“선생님, 저 선생님 집에 데려가 주면 안 됩니까?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거던요. 어릴 때부터 술만 마시고 오면 엄마와 저를 때리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어 공포 속에 자랐습니다. 근데 이제 제가 아버지보다 키도 더 커졌고 주먹도 쎕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보면 왠지 사고를 칠 거 같습니다. 어제 학교 마치고 시장 노점에서 채소 파는 어머니 일 도와 드리러 갔는데, 엄마 노점판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어 가보니 우리 아버지가 대낮에 술을 마시고 와서는 어머니를 발길로 차고 좌판을 엎고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난 이성을 잃고 뛰어들어 아버지를 밀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말리고..... 쪽 팔려서 나오긴 했는데 아직도 분이 안 풀립니다.” 

“그래 그러자. 가자 우리 집으로. 집에 가서 짐 챙겨서 와라.” 그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다시 와서는 친구 집에 가서 당분간 지내겠다고 말하며, 자기 편이 되어주고 받아 주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며 그 고마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어른들 때문에 아픈 아이들이 많다.

교단에 서면서 나를 지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일은 불합리한 제도나 업무 중심의 학교시스템, 민주적이지 못한 관리자, 자기 아이의 이익이 걸리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학부모 등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를 제일 힘 빠지게 하는 일은 나의 한계(?)와 만날 때였다. 그 아이를 둘러싼 가정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 아이를 위해 애를 써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중도에 포기하거나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길을 들어설 때, 학교교육과 나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한동안 힘이 빠져 살게 된다.  

교육잡지 '우리교육' 2020년 가을호 표지(부분)

그럴 때 교육잡지 ‘우리교육’에서 읽었던 작은 새 이야기를 떠올리며 일어서곤 했다. 

“어느 날 산에 불이 나서 숲속 동물들이 다들 정신없이 도망가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도망가지 않고 그 작은 입에 한 모금 한 모금 물을 머금어 불을 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동물이 그렇게 한다고 이 큰불이 꺼질 거 같으냐며 어리석은 일 그만하고 빨리 도망이나 가라고 비웃으니, 그 작은 새는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라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 했다는 소박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나 역시 크게 세상을 변하게 하거나 절망에서 아이를 건져내는 거창한 일은 못하더라도 우리 아이들 곁에서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손잡아주는 일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교단을 지켜왔다. 

아이들에게 난 늘 이렇게 말했다.

“너로 인해 세상이 빛나는 날 올거라고 나는 믿는다. 너가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씨앗이 있을거야. 그 씨앗이 복숭아인지 사과인지 수박인지 잘 생각해 봐. 잘 모르겠으면 커리어넷 같은 싸이트에 접속해 적성 검사도 해보고 학과 정보, 직업 정보도 찾아봐. 흥미가 생기는 자료는 더 검색해 보고 관련되는 책도 읽어보고.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나 멘토를 찾아 진로상담을 해보는 것도 좋아. 관심이 가는 일은 직접 경험해보면 정말 도움이 된단다. 경험이야말로 자신의 그릇을 더 커지게 하고 넓어지게 하는 소중한 것이지.

무엇보다 가만히 자신과 대화를 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다보면 뜻밖의 순간에 길이 보이고 놀라운 답을 찾을 수도 있어. 나는 그랬거던. 신은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카드를 숨겨 두었다잖아. 근데 아무에게나 그 카드를 내밀지는 않는대. Try Try Try again! 늘 너의 꿈을 응원할게.”

다행히 이런 나의 말과 실천은 아이들에게 힘이 되었던 거 같다. 이제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을 해주는 제자들이 많은 걸 보면.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보낸 지난 시간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 지금의 시간들도 내일에는 그런 의미가 되리라.

‘here and now’의 힘으로!

 

이미선 원장
이미선 원장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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