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연수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해운대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범규 부장님이 나를 발견하더니 “원장님, 저 태양 한 번 보세요.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매일 아침 차를 대고 그 기운을 느끼고 사무실로 들어갑니다.” 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렇지! 정채봉 선생님은,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가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에게는 봄은 그냥 가지 않고 제비꽃 한송이를 피워두고 간다 하셨지. 매일 아침 찬란하게 빛을 선사해도 보는 눈이 없고, 마음을 내지 않거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떴다가 그저 지는 해일 뿐이겠구나 싶다. 일상에서 이를 알아차리게 해준 멋진 김 부장님께 고마움 전하고 싶다.
선물을 받은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출입문을 들어서기 전, 잠시 오늘의 태양이 주는 빛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몸과 마음에 담는다. 아침 햇살 가득 받으니 새해 카톡으로 보내온 수녕이 그림이 떠오른다. 수녕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참 따뜻하고 힘이 생긴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선한 마음과 간절한 바람, 진실한 삶에서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수녕이를 만난 건 첫 발령지 부곡중학교에서였다. 발령 첫해 나는, 북한이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2 때문이라는 바로 그 무서운, 중2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사에 대한 꿈만 가득 안은 채 겁 없이 교단에 선 나는 첫해부터 전쟁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2학년 중에서도 그 해 별나기로 소문난 2학년 2반의 반장이었던 수녕이.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치고 난장을 만들어도 소를 닮은 맑고 순수한 눈빛을 가진 수녕이는 목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잔잔하게 그 임무를 수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리 순한 아이가 반장이 되었을까 싶다.
남자 아이들은 질풍노도의 중2를 거치고 중3이 되면 신기하게도 말이 적어지고 점잖아진다. 1년 사이인데도 철이 확 드는 느낌이다.
중학교 3학년 말, 수녕이는 진학상담을 신청해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반 인문계고로 진학하지 않고 공예고(지금의 조형예술고)로 진학하겠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리 선택한다니 한편 맘이 짠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아서 “그 학교로 진학하면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고,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거 같다. 너의 꿈을 응원할게.” 라며 용기를 주었다. 수녕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한얼전’이라는 학교 전시회에 초대해서 가보았는데, 예상대로 학교생활도 잘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흐뭇했다.
수녕이는 그림에도 두각을 나타내었지만, 공부도 그에 못지않아 졸업 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그 어렵다는 임용고시에도 합격해 미술교사가 되었다. 같은 교직에 있다보니 간혹 출장지 등에서 만나면 그렇게 뿌듯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동안 소식이 뜸해 궁금했는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 휴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은 완치 되지 않아 조심하고 있지만, 많이 회복되었다며 복직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갑자기 닥친 불행이 오히려 자신을 더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림에도 삶이 묻어나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겸손할 것도 없는 사람은 꼭 이렇게 성찰한다. 야간자습 시간에 도망간 친구들 대신 남아있는 우리가 괜히 혼나던 고등학교 시절처럼.
코로나19로 학교 문을 열지 못하고 애를 태웠던 그 시절, 수녕이는 쉬지 않고 참으로 따뜻하게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곳곳에 아이들을 기다리며 수업 자료를 만들고 공간을 꾸미고 창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사랑의 글을 적어둔 사진들을 보내왔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했다.
아, 세상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더니, 곳곳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할 곳이구나 싶었다.
이전에 수녕이 그림은 약간 어두웠는데 아픔을 겪고 난 뒤라 그런지 그림이 더 따뜻해지고 희망적인 거 같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저처럼 갑자기 생각지 못한 황망한 소식을 듣게 되는 환우들과 그 가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 그림이 그늘진 세상에 한 줌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선생이었던 나보다 제자가 훨씬 낫구나 싶다. 이런 게 바로 교단을 지켜온 보람이고 기쁨이다. 수녕이의 바람대로 그의 그림이 많은 아픈 이들에게 위안이 되면 좋겠다. 매일 차별 없이 온 누리를 비추는 아침 햇살도 많은 이들이 선물로 받았으면 좋겠다.
하늘에서 비추는 태양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샘솟는 한줄기 빛이 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 지혜로움으로 임인년을 살아가 보자.
오늘 아침도 햇살 찬란하다.
마음에서 샘솟는 한줄기 빛 또한 아름답다. 눈이 부시게!
◇ 이미선 원장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현 부산시교육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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