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 (6)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2장 서촌댁 유복자

이득수 승인 2022.01.03 18:17 | 최종 수정 2022.01.07 16:48 의견 0

2. 서초댁 유복자 ③총명한 막내 기출이, 서촌댁 품을 떠나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오누이가 오라비는 웃각단에 삼간 겹집을, 누이는 아래각단에 삼간 홑집을 짓고 서툰 농사일에 적응하면서 피차 대여섯 자식을 낳아 기른 지 벌써 15년이 된 것이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

서촌댁의 귓가에 일곱 살 막내 기출이가 부르던 <새야, 새야!>의 가락이 쟁쟁했다. 벌써 남의집살이를 나간 지 석 달, 제일 어린 막내지만 제일 정이 많고 생각이 깊어 한 번도 어미의 속을 썩인 일이 없이 착하고 기특한 아이의 생글거리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가끔씩 제 어미나 외삼촌 곰쇠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른 네 아이들은 겨우 1절이나 따라 부를 정도인 <새야, 새야!>를 그 어린 것은 2절까지 글자하나 빼지 않고 다 외웠고 노랫가락도 틀림이 없었다.

막내의 상념에서 돌아온 서촌댁의 눈앞에 물이 철렁철렁한 논바닥이 펼쳐져 하얀 나락 꽃이 둥둥 떠 있고 한창 물이 잡혀 통통해지는 벼이삭을 탐내는 참새 떼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별 탈 없이 농사가 끝나면 적어도 넉 섬은 거뜬할 것 같았다.

먹는 것이야 해마다 달랑거리는 양식에 온갖 푸성귀를 다 뜯어 보충하는 것이 한 두 해가 아니니 올해처럼 아이들을 이리저리 남의 집으로 흩어 밥벌이를 시키고, 아니 입을 줄여 명절이나 제사에 쓸 쌀을 제하고 한 두어 섬은 타작마당에서 바로 팔아 돈을 만들 생각이었다. 우선은 다섯 아이의 겨울 옷을 갖추어야겠고 특히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는 큰 딸 귀남이에게는 가람 옷 한 벌에 댕기와 노리개까지 갖추어줄 작정을 하느라 절로 입이 벙긋해졌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서촌댁은 한창 토실토실하게 알이 든 논두렁의 흰콩 두 뿌리를 뽑았다. 잘 여문 가을에 털어 메주를 끓여야 할 것이지만 어차피 여섯 식구 먹을 된장을 담기에는 태부족이니 차라리 제법 중농으로 사는 오라비 곰쇠의 아내인 너그럽고 손이 큰 본동댁이 콩이든 메주든 간장이나 된장의 형태로 이리저리 맨밥은 면하도록 도와줄 것이었다.

얄밉기로 치면 명색 장남이면서 맨 날 어디가 아프고 삭신이 노곤하다며 구들을 지고 놀고먹는 장남 선출이에게 이렇게 풋콩을 뽑아 삶아 먹일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미움 그 자체가 정인지 봉당골의 오두막에서 동사직전의 자신을 거두어준 역시 조그맣고 눈만 반들반들하며 아녀자보다도 힘을 못 쓰던 죽은 남편 복성이를 가장 빼닮은 장남 선출이를 날마다 타박하면서도 단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미워해본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실제 저도 몸이 아프고 힘이 없으니 그렇지 설마 일곱 살 짜리 막내 기출이까지 읍내 조호방네 집에 남의집살이로 가서 제보다 두 살이나 많은 좀 덜 떨어진 도령의 아이보기노릇을 하는 판에 자신인들 그렇게 1년 내내 구들을 지고 뭉개는 것이 속이 불편하랴, 소금도 먹은 놈이 물을 켜는 판에 스스로도 얼마나 체면 없이 멋쩍을까 생각이 들어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풋콩이라도 삶아 먹일 작정이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그래도 장남에다 제 아비를 가장 많이 닮은 선출이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은 서촌댁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골목길을 접어드는데 마당가에 조그만 그림자하나가 얼른거렸다. 잰 걸음으로 다가가 사립문을 여니 왠 아이하나가 우물가에 찬물을 길어 두레박 째 마시는데 막내 기출이었다.

“야야, 기출아! 니가 웬 일이고?”
“...”

두레박을 놓고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쭈뼛거리더니

“엄마, 인자 호방댁에 오지마라 카더라.”
“와? 머따문에?”
“...”

겁에 질린 채로 엄마에게 다가오던 아이가 다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눈빛이 애절했다.

“와, 도령이랑 쌈 했나?”
“어은제요.”
“떡이나 음식을 훔쳐 먹었나?”
“어은제요.”
“그럼 양반 욕을 했나? 아이보기 상놈이.”
“어은제요.”
“그람 와 그랬노? 어은제요, 어은제요 아이라고만 하지 말고 속시원히 말을 좀 해봐라 말을...”
“그 기 그 기... 엄마...”
“그래 제발 말 해 봐라. 내 숨통이 막혀 허패가 터질라 칸다.”
“그런데 그 기 그 기 엄마...”

아이의 눈에 고인 두려움이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듯이 촉촉해졌다. 순간 서촌댁이 슬그머니 그 넓은 품을 벌렸다.

“엄마아, 엄마, 엄마아!”

몇 달 만에 어미의 가슴에 안긴 아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참새처럼 바들바들 뜨는 심장의 고동이 어미의 심장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 울지 마라. 나중에 생각나면 이바구해도 된다.”

한참 만에 많이 진정된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면서 어미가 말했다.

“쪼깨만 있거라. 내 콩 삶아 주꾸마.”

바깥에서 그렇게 소동이 나도 그 때까지 방안의 선출이는 내다보지도 않았다.

기출이가 모 호방(戶房)네 아이보기로 간 것은 지난해 참꽃이 처음 피기 시작한 음력 2월 초하루 영등을 지난 며칠 뒤였으니까 벌써 1년 반이 지난 셈이었다. 설, 추석 명절과 제 아비 제사를 제하고는 거의 집에도 오지 않던 아이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으니 서촌댁이 놀랄 만하기도 했다.

위로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모 호방의 마흔이 넘은 늦둥이 외동아들 치만(治萬)이는 만사를 다 능숙히 다스리라는 이름과 달리 젖먹이 때부터 시난고난 온갖 병치레를 다 하는 제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 하는 좀 모자란 아이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울음을 터뜨리지 않아 혹시 죽은 아이를 낳았나 싶어 산파가 한참이나 엉덩이를 두드려 간신히 울음소리를 낸 후로 목을 가누고 허리를 이기고 몸을 뒤집어 기며 안고 서고 걸음마를 떼는 모든 과정이 늦고 말을 베우고 오줌을 가리는 것이 보통아이보다 늦었다.

닷새장이 서지 않는 무심 날에도 쌀, 면포, 장작, 숯, 솜, 소고기와 두부 등의 생필품을 파는 장터골목에서부터 성내는 물론 상북면, 하북면, 중북, 중남면, 상남면, 삼동면, 할 것 없이 언양현 6개면에 구석구석에 모 호방네가 다 늙어서 간신히 얻은 외아들이 팔삭둥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금방 소문을 더해 그게 다 언양읍은 물론 현청관할의 모든 호구별 장정(壯丁)과 딸린 식구와 경작지, 농사작황을 조사하여 추수후의 현물세는 물론 부역을 매기면서 모질게 착취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악담도 돌았다. 특히 슬그머니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묵어버린 예전의 논밭을 몰래 경작하는 은결(隱結)을 찾아내는데 귀신이라서 두더지처럼 그저 먹고살려고 땅만 파는 무지한 사람을 해마다 여럿 잡아넣거나 그 와중에 엄청난 뒷돈을 받았으니 이는 사필귀정,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거기다 이미 나라가 기울어 곧 왜놈의 세상이 되고 불과 20년 전에 고쳐 지은 동헌을 폐하고 현감이 없어진다는 판국에 멀리서 보면 어느 것이 동헌이고 어느 것이 조 호방네 집인지 모를 정도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어 호의호식하는 것 자체가 모두 이번 외동아들을 병신아들로 태어나게 한 죄밑이라고도 했다.

그 아이가 남들이면 다 글을 배울 여섯 살이 되도록 글을 배울 염은커녕 사람들의 말귀를 알아듣거나 인사를 차리거나 제 앞을 가리기는 고사하고 사람을 보고 아는 채를 하거나 웃거나 말을 거는 경우도 거의 없이 매일 먹구름이 낀 듯 미간을 찌푸리다 누가 쳐다보거나 말을 걸기만 해도 사색이 되어 금방 울음을 터뜨려 늙은 어미아비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명색 언양바닥에는 행세께나 하는 집안으로서 대대로 중인계급의 육방관속에 머물러 한양에서 내려오는 과거출신 사또들에게 온갖 수모를 받고 아부를 바쳤을망정 갑오경장 이후 이제 명목상 양반상놈이 없어진 판에 그저 돈 많은 것이 제일이라는 게 조 호방의 자부심이었다.

호방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아전이라는 자리는 본래부터 무슨 녹봉(祿俸)이 있는 벼슬자리도 아니고 조정에서 한 두 해 사이로 바뀌는 새 현감이 내려올 때마다 새 사또를 보필한다면서 그 비위를 맞추고 술과 여자를 들이대어 그저 음풍농월 세월만 보내게 하고 논밭에서 거두어들이는 지세(地稅)와 장정들에게서 받아들이는 군포(軍布)에 흉년에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환곡(還穀)에 이르기까지 온갖 협잡과 부정을 저질러 그 일부는 현감에게 바치고 나머지를 횡령하여 사는 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생존방식이었고 기본녹봉이 없는 아전등속이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기는 물론 엄청난 치부를 하여도 그저 그렇거니 넘어가는 것이 당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조선왕조의 한계였다.

거기에다 모 호방은 같은 아전 중에서도 특히 눈이 매워 무언가 돈이 될 만 한 일이 있으면 결코 놓치는 일이 없으며 또 수완이 좋아 만사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얼버무려 특별한 말썽이 나지도 않았기도 하지만 현감의 눈에도 절대로 나는 일이 없어 그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나기만 했다.

그래서 지금껏 긁어모은 돈으로 금쪽같은 외동아들하나만 입신출세시키는 것이 단 한 가지 희망이었는데 정작 그 금쪽같은 아들이 문제였다. 보통아이라면 너덧 살이면 깨치기 시작하는 천자문(千字文)은 물론 언문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이었다.

아니 모르기보다도 아예 배울 염을 내지 않아 언양바닥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이면 으레 보내는 둔기의숙이나 조일의숙은 물론 소소한 서당에 보내려 해도 제 성인 조(曺)자 하나도 겨우 썼다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는 처지라 아무리 언양바닥의 산천초목도 울린다는 모 호방이지만 차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독선생을 들여 한 해를 가르쳤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래도 우선 천자문의 몇 구절과 언문의 기본은 어느 정도 되었다는 선생의 말을 믿고 가까운 송대의 작은 서당에 보내었지만 보낸 지 한 달 만에 또 동티가 났다.

갑오년 경장 이후 이듬해 을미년부터 현이 아니라 군으로 바뀐 군청으로 훈장이 모 호방을 만나러 갔지만 다들 아직 호방인줄 알고 있는 조일갑은 벌써 파직된 지가 서너 해가 지난 후였다.

이미 덕천역도 부로산봉수대도 점점 쓸모가 없어지고 인원이 줄어들고 마침내 폐지되고 마는 판국에 군청역시 을사보호조약 이후로는 구식 아전들이 물러나고 조직이 개편되고 일본도를 찬 왜인들이 진출하는 판이라 어디에서도 조일갑이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조일갑으로서도 그까짓 것쯤은 미리 예견하고 있는 일이었다. 본래부터 녹봉을 받는 자리도 아니었고 알아서 눈먼 백성들을 다그치고 속여서 먹고 살고 남겨서 자신이 생각해도 상당한 재물을 모은지라 이제 양반상놈이 없어지고 누구나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되는 판에 언양을 떠나 부산포나 구포, 하다 못 해 울산이나 경주에라도 가서 넓은 전장(田場)을 장만하고 시내에 커다란 집을 짓고 특히 다달이 세가 나오는 점포건물을 지어 겨우 아전이나 하는 중인이 아닌 언양부자 양반으로 행사하며 살 복안으로 여기저기 땅을 보러 다니던 중이었다.

며칠 뒤 조일갑이 남천내 건너 버든마을의 훈장이 자신을 찾아왔더라는 호방댁의 말을 듣고 송대마을의 서당을 찾았을 때 훈장은 저승에서 아비라도 만난 듯이 반색을 하며 다짜고짜로 오신 김에 치만이를 데리고 가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치만이를 가르칠 재간이 없다고 했다.

아니, 멀쩡한 남의 아들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고, 이미 속사정을 짐작한 조일갑이 딴청을 피우자 예순이 다된 훈장이 이미 희고 노란 새치가 듬성듬성한 구레나룻을 비비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니, 멀쩡하기보다 의젓하기로야 호방님네 자제만한 사람이 언양바닥에 더는 없지요. 듬직한 체구에 입을 꼭 다물고 태산처럼 앉았으면 미륵불이 따로 없다고. 그렇지만 도무지 공부할 염을 내지 않아 책을 펴지도 따라 외우지도 먹을 감고 붓을 쥐고 글을 쓰지도 않으려고 하니 훈장 아니라 사또가 와도 어쩔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당에 출입한지가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이제 겨우 천자문의 첫 장 넉 자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루 황(黃)을 떼고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어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을 깨쳐야 되는데 도무지 그 간단한 우(宇)자와 주(宙)자를 구별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씨름하다 이번엔 혹시나 싶어 다시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물어보니 아닐까, 다르랴 하늘천자를 빼고는 나머지 석 자를 또 몽땅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호방님 아시다시피 서당공부라는 것이 우선 기초가 되는 강독(講讀)으로 천자문, 동몽선습을 익히고 소학에 통감, 서서삼경과 사기를 익히고 제술(製述)로 오언절구, 칠언절구, 사율에 고풍, 18구시, 작문, 당송문, 절구에 당율을 배워야 하고 그 위에 습자(習字)로 해서, 초서를 익혀야 예전처럼 향시나 과거를 치르지는 않더라도 어디 가서라도 선비행세라도 하며 살터인데 저래서는 가용의 지방(紙榜)하나 제대로 쓸 수가 없을 터라 도무지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고 통사정을 한 것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사정이 딱한 줄은 알고 있지만 내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어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서 뒹굴기보단 서당에 앉아만 있어도 좋으니 그대로 두어두면 내 수업료는 넉넉히 드리겠다고 사정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치만이 때문에 공부분위기도 산만하고 다른 아이들이 치만이를 놀리거나 백안시하고 또 가끔 다투기도 하여 이제 서당이 저잣거리가 되어간다고 정히 그러신다면 내 차라리 서당 문을 닫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조일갑은 그날부터 입맛을 잃었다. 여태껏 위로 매끄럽기 참기름 같은 한양출신 현감나으리들의 온갖 수모와 아래로 언양현 수많은 무지렁이로부터 모진 원성을 들으며 악착같이 살아온 인생이나 벌어온 돈이 모조리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튿날부터 새로 들인 언문독선생만 괜한 트집으로 사납게 다그쳐 여럿이 물러나니 명색 글을 배운 사내로서 솥을 달아매거나 목구멍에 거미줄을 쳐도 조호방네 아이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였다. 그렇게 몇 명의 독선생이 물러나고 난 지난해 봄 꽤나 공을 들여 기세등등한 집성촌이 아닌 세궁민이 모여 사는 허허벌판인 버든마을의 쉰이 넘은 신(辛) 씨성 쓰는 선비 하나를 어렵게 모셨을 때였다.

당시에 삼동과 중남의 중심세력인 신  씨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좁을 골짝을 떵떵거리며 호령할 부자도 아닌 그는 소싯적에 서당훈장으로부터 옛날 같으면 향시는 물론 식년시라도 능히 통과할 것이라고 소문이 퍼질 정도로 머리도 좋고 학문도 깊은 데다 율(律) 잘 짓고 술 잘 먹는 풍류한량으로 근동에서는 꽤 명망이 높아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진정한 선비였다.

그는 먼저 자신이 어떻게 가르치든 석 달 열흘 그러니까 100일간을 아무도, 어떤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고 제 코가 석자인 조일갑 호방은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지긋한 나이답게 근 보름간을 억지로 가르치기보다는 이리저리 뜯어보거나 어르면서 아이가 가끔 웃기라도 하면 잘 한다고 추어주며 둘이 무어라 주고받고 하는 품이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이전보다 얼굴이 밝아지더니 잘 먹고 잘 자며 숨소리가 고르고 침착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제 먼저 어미나 누이들에게 말을 걸고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늘 사색이 되어 피하기만 하던 아비에게도 슬슬 웃으며 품에 안기기도 하니 이제나 저제나 자식의 정신 차리기만 기다리던 모 호방으로서는 하루아침에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때부터는 공부도 사뭇 달라졌다. 우선 벼루에 먹을 가는 일만 해도 전보다 흥이 나는 모양이었고 늘 하품을 하고 졸다가 선생이 나무라면 울음이나 터뜨리는 지난번과는 달리 제법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품이 모호방이 보기에는 천지개벽, 아니 갑오년에 쓸고 지나간 저 녹두장군의 후천개벽보다도 더 눈이 번쩍 뜨일 일이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 이제 천자문도 여남은 장이 넘어간 세밑에 그간의 노고도 위로할 겸 호방은 모처럼 큰맘을 먹고 버든마을 신 선생의 집으로 쌀 두 섬과 쇠고기 열 근과 뒷다리 하나에 명주와 무명베도 한 필씩 실어 보냈다. 자린고비 모 호방으로서도 대단한 선심이었지만 신 선생과 식솔들도 소스라지듯 놀랠 일이었다.

그날 저녁 모 호방은 가득이나 놀란 신 선생을 읍내에 단 한 집밖에 없는 색주가로 모셔갔다. 지금껏 늘 관아에 딸린 늙은 관기를 사또 몰래 직접거리다 가끔 혼쭐이 난 적이 여러 번 이었지만 이렇게 술과 계집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장바닥의 술집에 출입한 일은 참으로 삼이웃이 다 놀랄 일이었다. 거기다 시골부자를 족치는 대접자리나 뇌물로 마시는 자리도 아닌 제 돈을 주면서 마신다는 일이...

아무튼 그 귀한 자리에서 수차 신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제 자식만 잘 가르쳐주시면 먹고사는 일은 물론 상당한 전답까지 마련해주겠다고 말을 꺼낼 때였다. 신 선생이 정색을 하면서 자신이 이 과분한 자리에 억지로 따라온 것은 사실 해가 바뀌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대경실색, 사색이 된 모 호방이 도대체 왜 그리시느냐, 우리 아이가 겨우 이제 사람 꼴이 나고 사람을 알아보는 판에 이 무슨 말씀이시냐, 혹시 제 보답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드리겠다고 통사정을 했다.

그런데 신 선생의 답변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끝이 났다고, 겨우겨우 익힌 글자가 한 쉰은 되지만 지금부터는 한 자를 배우면 또 한 자를 잊어버릴 것이 불을 보듯 빤한 지라 자신의 본관과 이름자를 깨친 지금의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고 접어야 된다고 했다.

어째 그러냐고, 아이의 공부를 위해서라면 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넣겠다는 호방의 말에 만약 억지로 그러면 아이를 다치게 한다고, 아니 그것도 마음을 다쳐 몸을 다친 것보다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이라고 그 아이는 어쩐 셈인지 마음속에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채워져 있어 잘못 건드리면 그 심연처럼 깊은 시북(뻘)으로 빠져 기어이 죽고 만다는 것이었다.

낮에 미리 연통을 해서 울산정자에서 갓 잡아온 산 문어와 활 전복에 방어진의 고래육회와 등심과 안심에 돼지수육과 삼계탕까지 곁들인 산해진미의 큰 상에 누구도 젓가락을 대지 않고 노래하는 꽃이라는 해어화(解語花), 두 명의 기생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입을 열지 못 했다.

연달아 천장이 무너지도록 한숨만 쉬는 모 호방에게 신 선생이 이미 차려 논 큰상이니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잔을 맞들어보이자 모 호방이 마지못해 잔을 비웠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잔을 내려놓으며

“제가 드릴 이 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호방나리께서 하도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애련하고 또 자신도 어느 새 아이와 정이 들어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순간 모 호방의 얼굴에 십년대한에 소나기를 만난 듯, 저승에서 아비를 만난 듯 화색이 돌면서

“내 선생의 말씀이면 무엇 하나 빠트리지 않고 영(令)대로 따르리라. 어서 말씀하시라.”

채근했다.

거기에서 나온 신 선생의 대책은 치만이와 어울려 놀 만한 아이를 구해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방자처럼 곁을 지키고 잔심부름도 하며 같이 읍내는 물론 가까운 화장산이나 남천내 건너 봉수대가 있는 봉꼴산과 가난한 마을 버든의 논밭과 어음의 미나리꽝을 나다니게 하며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가 좀 더 밝아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물론 공부도 해야겠지만 공부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세상이 굳이 예전처럼 사서오경, 한학을 해서 과거를 볼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변할 지도 모르니 공부는 그저 제 앞이나 가릴 정도로 하고 남들과 어울려 사는 기술을 가르치면 호방나리의 지금의 재산을 물려받아 충분히 살 수 있고 그렇게 살며 장가 들어 아이라도 낳으면 다음 대에선 어떤 수재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곰곰이 말을 듣던 모 호방의 얼굴이 그 제서야 화색이 돌면서

“우리 석암선생은 참으로 하늘이 제게 보낸 귀인이십니다. 정말 이 백골난망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향교에서나 부르는 큰선비의 호칭 석암선생을 들먹이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는 바람에 놀란 석암 선생이 맞절을 하여 기생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포복절도할 술판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 비싼 술자리의 덕분으로 모 호방은 다시 생기를 찾았고 급히 아이보기를 찾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우선 아이가 몸이 가볍고 눈치가 있으며 성격도 차분하고 머리도 총명하며 더욱이 인물도 반듯해 양반집 도련님과 잘 어울려야 하는데 그만한 아이도 귀할 뿐더러 그만한 아이가 있을 정도로 밥술께나 뜨는 집에서 모진 악바리로 소문난 모 호방에게 아이를 줄 턱도 없었다.

그렇게 해를 넘긴지 두어 달 만에 장터거리의 솜 장사 이 씨에 의해 기출이가 추천된 것이었다. 이 씨에게 평소 술잔이나 얻어먹으며 잘 알던 모 호방은 추천을 받자말자 일부러 버든까지 와서 아이를 보고 그 자리에서 찬성을 한 것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야야, 니 이름이 뭐꼬?”
“예, 성은 월성 이가고 이름은 터기(基)자 날출(出)자 기출입니더. 이기출.”
“니 아부지는 어데 가셨노?”
“돌아가셨심더.”
“아니, 그럼 아부지가 없다는 말이가?”
“아임니더. 아부지가 있었는데 제가 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입니껴? 처음부터 아부지가 없으면 태어날 수도 없지만 태어나도 호로새끼 아입니꺼?”
“...그으래?”

모 호방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여섯 살 어린아이치고는 당돌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리고 얼굴도 눈빛도 맑고 심덕도 있는 것 같아 맘이 끌렸다. 또 무엇보다도 모자라는 자기자식 치만이를 무시하거나 골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아이보기로 결정이 되고 이튿날부터 기출이는 서촌댁의 품을 떠나야했던 것이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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