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90 가을의 노래 - 호박, 저 황홀한 주황빛이여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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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 23:17 | 최종 수정 2021.10.27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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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노랗게 잘 여문 맷돌호박을 잘라 부산 딸네집에 전을 부칠 호박 속을 가져다주려고 파낸 껍데기입니다. 가을을 대표하는 색깔이 황금벌판과 단풍, 감과 사과가 익어가며 햇빛에 반사되는 붉은 윤택 같은 것인데 그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가을빛은 역시 호박 속 같습니다.
백만장자가 금괴를 겹겹이 쌓아놓든, 온갖 황금빛 보석으로 장식한 귀부인만 그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폭에서도 저렇게 눈부신 주황색에 은은한 줄무늬를 새길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다 보니 한 움큼의 호박씨도 죄다 보석 같고요.
아래 사진은 가운데로 자른 호박껍데기 둘을 본모습 비슷하게 쌓아놓은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저 모습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요? 저는 우선 꽃당시기가 떠오릅니다. <당시기>는 옛날에 대나무 속껍질을 잘게 찢어 말려 염색해 꽃무늬까지 아로새겨 저 호박통처럼 동그랗게 만들어 지금의 보석상자나 반짇고리처럼 쓰던 물건입니다.
옛날 양반댁 아가씨들은 노리개와 보석과 은장도, 알록달록한 헝겊조각을 담았겠지만 해방 후 가난한 농가의 우리누님들은 시집갈 때 시댁식구들에게 선물로 줄 채송화꽃무늬가 그려지고 초록색 테두리가 박힌 손수건을 수십 장씩 수놓아 수틀과 색색의 실들과 함께 담아논 걸 본 기억이 납니다.
언양장에는 우리 버든마을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구시골의 황씨네에서 한 집에서만 만들어 팔았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꽃당시기>라는 고운 단어를 찾아내어 흐뭇합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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