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정초부터 유독 신불산에 산불이 잦았다. 밤마다 영축산에서 신불산을 건너 간월산에 이르는 긴 능선에 잉걸불에 단 철사처럼 새빨간 불빛이 일렁거리며 가뜩이나 흉년과 폭정으로 웅크린 세궁민(細窮民)들의 마음을 졸아들게 했다. 그렇게 뒤숭숭한 밤이 새면 아랫마을 버든에는 간밤에 여우가 울고 갔느니, 뒷골의 어느 노인이 급사했느니, 안골의 묘지기 김서방이 아홉 식솔을 이끌고 야반도주 했다니, 당수(堂樹)나무 밑이나 행상 집에서 얼어 죽은 거지가족이 발견되었는데 어쩌면 얼어서기보다는 굶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모진 흉년일수록 겨울바람은 왜 그다지도 사나운지 모를 일이었다. 장꾼들조차 잘 모이지 않아 주린 동냥아치로 가득한 언양읍장터에는 추위나 배고픔보다도 더 살벌한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리산 너머 녹두장군이 나와 세상이 뒤집혔다, 여태까지 온갖 고생을 하고도 늘 괄시받던 농사꾼과 뱃사람, 머슴과 백정 같은 하층민이 이제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며 모두들 낫과 죽창을 들고 나섰다고 했다. 이제 곧 세상이 뒤집혀 양반이나 상놈이 똑 같은 세상, 아니 양반이 상놈이 되고 상놈이 양반이 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세상이 온다고도 했고 그 동학군이 몰살당해 붉디붉은 전라도 황토벌이 신불산 단조성의 철쭉꽃보다도 더 붉게 물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세상이 흉흉하건만 부로산봉수대 위에는 더 이상 불빛도 연기도 피지 않았다. 역졸과 역마가 가득하고 마발과 보발이 줄을 잇던 덕천역도 횅하니 비고 역졸들마저 모두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퍼지더니 곧 왜놈들의 세상이 온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면서도 쉼 없이 눈이 내려 온천지가 솜털처럼 포근한 산야에 아침마다 눈부신 햇살이 부서졌지만 삼동을 쫄쫄 굶은 농사꾼들의 눈에는 그저 시장기만 부추길 뿐이었다. 그 위에 운문고개 너머 차디찬 북풍은 상북, 하북, 언양, 중남 할 것 없이 언양현 여섯 읍면을 온통 눈보라도 덮어버렸다.
“잰잰이 무라. 언칠라.”
“언칠 끼 뭐 있노? 목궁가리에 넘어갈 것도 없는데 급하고 말고가 어딨노?.”
“그래도 잰잰이 무라. 찬물에도 언치고 접시 물에도 빠져죽는다 안 카나?”
부로산봉수대의 위전이 있던 봉당골의 단 하나뿐인 움막집이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금방이라도 강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움막집 안에서 머리가 하얀 노파가 스무 살이 좀 넘은 떠꺼머리총각에게 자신이 깐 굴밤 한 개를 건네주고 있었다.
뭉툭하게 닳은 손톱으로 그 여문 굴밤뚜껑을 깔려고 용을 쓰는 바람에 앞니가 네 개나 빠진 얼굴이 마귀할멈처럼 이지러졌다. 간신히 남아있는 송곳니에 대고 겨우 굴밤을 깐 노파가 총각에게 마지막 굴밤을 건네자
“엄마는 안 묵나? 엄마 무라.”
“내는 배 안 고프다. 니나 무라.”
“아이다. 난 일곱 개나 묵었다. 엄마는 이적지 하나도 안 묵었다 아이가? 한 개라도 묵어라. 안 무믄 죽는다.”
아들이 억지로 새끼손톱크기의 굴밤을 입에 넣어주자 우물거리던 노파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지면서
“눈이 빨리 안 그치면 큰일이다. 산속에 있는 칠기는 못 캐더라도 엉뚝 밑에 띠뿌리라도 캐 무야 겨울을 넘길 것이 아이가? 정말 눈도, 눈도 이렇게 숭악하게 오는 해는 처음이라 이러다가 무슨 변이나 안 생길지 모르겠다. 늙은 내야 죽으면 그뿐이지만 니가 큰일이다. 너거 아부지가 만날 입에 달고 살던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다.’란 말이 바로 니 꼬라지다. 안주 장개도 못 간 니 청춘이 아까바서 우짜겠노?”
“에이 씨! 또 그 소리.”
지난 가을도 흉년이었다. 동지가 되기도 전에 이미 나락은 물론 고구마, 조, 콩까지 양식이란 양식은 모조리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늦가을에 챙겨둔 싸라기와 두 모자가 근 보름이나 걸려 간월산에서 캐 온 짚단만큼 큰 칡뿌리 여남은 개와 푸렁바우 앞 벼락디미 낭떠러지의 참나무에서 딴 동구리 두어 말, 진장과 각골의 야산에서 딴 굴밤 몇 됫박으로 정월달을 넘겼다.
2월 초하루 영등할미가 저 먼 들 끝으로 아직도 차갑기는 하지만 한결 순해진 바람을 몰고 와 날씨가 풀리면 봉당골과 회나무진의 나지막한 논둑밭둑의 띠(茅)뿌리를 캐먹고 겨우 고비를 넘기고 온 들판에 쑥과 냉이가 나고 솔가지에 물이 올라 송기를 벗겨먹을 수 있는 봄까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다. 지난 가을엔 유독 가을가뭄이 심해 평소 같으면 한 해 닷 섬은 너끈한 봉당골논에서 겨우 석섬 반의 나락밖에 거두지 못 했고 그것도 덕천역에 딸린 위전(位田) 소작이라 농사를 더럽게 지어서 곡수(穀數)가 적다고 아우성인 역졸 조만길이에게 원래 반반씩 나누기로 한 도조(賭租)를 두 섬이나 뺏기고 겨우 한 섬 반이 남았던 것이었다.
그것마저 지난봄에 대대로 아전을 지난 읍내의 조부자집에서 먹은 장려 쌀 서 말을 너 말 닷 되로 갚고 나니 제대로 쌀밥 한 번 해먹지 못했다. 절구통에 대충 찧은 현미밥 두어 번 먹은 것이 전부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곡식이 떨어지자 뒤란에 땅을 파고 독 속에 묻어둔 고구마 두어 가마와 메밀 한 말과 메주콩 두어 되로 몇 달을 연명했다. 하나 남은 자식인 복성이가 고구마를 구워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하면 불에 탄 껍질부분을 많이 버려야하는 까닭에 실뿌리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씻어 삶아먹었지만 거의 태반은 솥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고픈 복성이가 날로 먹었다.
그렇게 고구마를 삶는 사이사이에 절구로 메밀을 빻아 삼베로 걸러 메밀묵을 끓이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주걱으로 묵 을 젓던 복성이는 솥에서 보글보글 끓던 묵당숙이 동그랗게 거품을 뿜어 올리기도 전에 흥건하게 침이 고여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당숙이 줄줄 흐르는 주걱을 입으로 가져갈 판인데
“야야, 묵은 주개가 안 돌아가고 똑 바로 서야 묵을 수 있단다.”
어미의 말에 깜짝깜짝 놀라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잠시 후
“엄마, 봐라. 주개가 섰제?”
아들이 그 뜨거운 묵 당숙을 삼키려하면
“야야, 샛바닥 딘다. 주개 좀 대강 빨아라.”
하면서도 시원한 동치미를 꺼내
“야야, 겨울철 묵은 무시김치하고 무야 지 맛이야.”
하고 안심을 했다.
원래는 편편한 단지뚜껑이나 반티에 담아 말려서 두부처럼 칼로 잘라 파와 정구지와 고춧가루, 참기름으로 맛을 낸 묵장에 찍어먹어야 제 맛이지만 우선 복성이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펄펄 끓는 묵 당숙을 대접에 퍼 넘겨주고 허겁지겁 퍼먹는 복성이대신 차꼴댁이 주걱을 잡고 한참을 더 저어야했다.
물론 배고프기나 먹고 싶기는 어미도 마찬가지였지만 제대로 묵장을 갖출 틈도 없이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뜨거운 묵 당숙을 후후 불며 단숨에 다 떠먹는 아들을 보면서 차꼴댁은 그저 자식 입에 무언가가 들어가는 것을 쳐다보는 것으로만 배가 부른 것처럼 먹을 염을 않았다.
그것마저 떨어지면 이젠 동구리와 굴밤의 차례였다. 푸렁바우의 험한 언덕에서 딴 밤알만큼이나 굵고 둥근 동구리는 멍석에 말려 솥에 쪄 껍질을 벗기고 물에 불려 가루를 내어 밥에 얹거나 도토리묵을 만들기도 하지만 물에 불려 아릿한 맛만 우려내면 그대로 씹어 먹어도 시장기를 달래기에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고을 원(院)이 부임을 하면 맨 처음 뒷동산에 도토리부터 심었다고 했지.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묵고 살라고 말이지. 물론 춘향전의 변학도처럼 기생점고부터 한 탐관오리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야. 하하하.
조금 배가 부르자 문득 복성이의 눈앞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은 언제나 허탈하고도 어색한 웃음으로 끝을 맺는 민망한 얼굴, 말이 살았다 뿐이지 길쭉한 얼굴에 살점 하나 없이 두 눈만 살아있는 해골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7년 전 복성이 열다섯 적 이야기였다. 대대로 삼동골짝 둔터에서 서당훈장을 지낸 집안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죽고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몇몇 해를 유리걸식 떠돌다 겨우 어릴 적 둔터서당에 다니며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는 덕천역 역장의 호의로 부로산봉수대에 딸린 봉당골이라는 작은 논배미와 황무지가 달린 오두막에 정착하던 해였다.
평생 책상물림 선비에서 졸지에 유리걸식 부랑자가 된 아버지 차꼴양반 무석씨가 겨울을 넘길 도토리를 따러 작천정을 돌아 화천마을을 지나 간월산에서 도토리를 가득 따고 간월폭포에서 땀을 식히면서 하던 말이었다.
곧 죽어도 양반이고 훈장 집 자손이라 말 하나는 번듯하다고, 나는 이제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말만 번듯하면서 늘 배를 곯는 샌님 훈장집자손이나 양반꼬랑대기가 아니라 읍내장터에서 소캐(솜)은 물론 장작과 숯을 팔거나 상놈소리를 듣는 고기장사나 소를 잡는 백정이 되어 일 년 내내 비린내나 에 절여 살아도 절대로 배를 곯지는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는데 정작 아버지가 죽은 이후 겨우 하나 남았던 동기간인 두 살 많은 복실이누나마저 죽어버린 데다 여전히 굶기를 밥 먹 듯 하는 처지인 것이었다.
“봐라. 복성아.”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어미가 합죽 웃는 것이 복성이는 수상쩍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저러다가 엄마마저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 어미는 일곱을 낳아 다섯을 어려서 잃고 5년 전에 열여덟이나 먹여 비명횡사한 딸 복실이 보다도 하나 남은 막내 복성이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오십 평생(사실 못 먹어 너무 말라 그렇게 마귀할멈처럼 늙어 보여도 아직 쉰 한 살이며 시집오기 전까지만 해도 곡식을 쉰 섬, 반접이나 하는 양갓집의 귀한 딸이었다.) 그 탈도 많고 한도 많던 평생에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기는 처음인 것이었다.
“복성아, 오늘은 우리도 뭐 좀 찾아 묵어보자.”
“찾아 묵기는, 뭐 묵을 꺼라도 있나?”
“우선 헛간에 묻어둔 칠기를 꺼내서 톱으로 끊어 맷돌에 갈아라. 오랜만에 칠기떡에 칠기국시나 해 묵구로.”
“어매, 그건 굶다굶다 정 배고프면 묵을라꼬 애끼 논 것 아이가?”
“묵고 죽은 귀신이 화색이 좋단다. 굶어죽기 전에 우선 좀 묵고나 보자.”
“...”
아무래도 어미의 태도가 이상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데 이러다가 어미마저 죽고 이 눈밭 속에 혼자 남겨질 것만 같은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엄마, 엄마, 와 그라노? 뭐 헛 거라도 비나?”
묻는데 기다리기다도 한 듯 반색하며
“그래 사실은-”
바짝 다가앉으며
“내 희한한 꿈을 꿨다. 들어봐라.”
연신 싱글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도 배가 고파 오늘은 무얼 좀 구해서 먹어볼까, 하나 남은 자식인 복성이는 무얼 먹여서 올 겨울을 넘기고 하다 못 해 눈먼 처녀라도 얻어 손자를 보아 대를 이을 것인지 혼자 들길인지 산길인지를 헤매던 참이었다고 했다.
어디서 커다란 방아개비가 한 마리 무지갯빛이 선명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는지라 ‘야아, 홍굴레다. 억수로 통통하네. 저거라도 꾸버서 우리 복성이를 믹이야겠다.’ 쫒아가다 눈앞이 아찔하면서 무논인지 웅덩이인지 모를 끝도 없는 시북에 빠졌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발밑이 훤해지며 향기가 진동을 하는지라 자세히 살펴보니 눈앞에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보름달처럼 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고 했다. 덥석 꺾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느새 꽃송이는 사라지고 수중엔 돼지 콧구멍처럼 생긴 연밥이 들려 있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또록또록한 연실이 여섯 개니 쏟아지더라는 것이었다.
“엄마, 그기 바로 개꿈이다. 못 묵어서 헛 기 비는 기라. 마 정신 채리라. 정신 채리라.”
“아이다. 정말 기분이 좋은 꿈이다. 인자 우리 집안에도, 아니, 복성이니한테도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끼다. 암, 사내나이 스물둘이니 뭔가 존 일이 있어야지. 있어야말고. 옛날 니 애비나이라면 벌쌔...”
“마 치우소. 배가 고프니 밸 소리를 생각을 다 하네. 내 장심배기나 한번 돌아 올라요. 혹시 목매에 걸린 토끼 아니면 무시꼬랑대기라도 하나 좌 올랑가.”
“아이다. 거기 앉아봐라. 오늘은 뭔가 존 일이 있을 끼다. 니 헛간에 묻어 논 씬나락 한 바가지를 퍼서 맷돌에 갈아라. 나는 니 몰래 묻어놓은 호박하고 무시오가리를 좀 꺼내고 팥도 한 호콤 있으니 모처럼 호박 풀데기라도 좀 쑤어보자.”
“아니. 엄마! 그 나락은 내년에 모 부울 씬나락하고 아부지 제사 때 메 올릴 것 아이가? 그걸 묵어뿌면 우짠단 말이고?”
평소에 그 목숨 같이 아끼는 마지막의 나락을 배고픈 아들이 몰래 먹어버릴까 늘 감시하던 어미가 왜 저럴까 싶어 역정을 내는데
“한두 호콤 꺼내도 모 붙고 메밥 뜨고는 할 끼다. 오늘은 우쨌기나 내말 좀 들어라.”
“야아.”
내키지 않는 듯 대답하면서도 복성이는 벌쭉 웃었다. 모처럼 쌀내끼에, 호박과 팥에 목구멍에 풀칠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못내 멋쩍은 기억 하나가 있어 그렇게 맘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재작년의 봄날이었다.
<계속>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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