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9)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3장 아이보기 기출이

이득수 승인 2022.01.07 12:19 | 최종 수정 2022.01.10 10:30 의견 0

3. 아이보기 기출이 ③갑오년 탄원서

좌우간 지난겨울 내내 치만이와 기출이는 그렇게 연줄과 씨름을 하며 세월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살구꽃이 피는 봄이 오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가지산에서 흘러내린 청수(淸水)가 깨끗하게 씻어낸 모래톱의 눈 속에서 한 겨울을 보내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나리를 뽑아 화전(花煎)을 갔다. 맑은 물, 맑은 바람과 솔향기가 어린 언양 미나리는 그 맛이 특출해 옛날부터 한양의 대궐로 진상을 할 만큼 향기롭고 감칠맛이 있어 웬만한 언양사람이면 그저 된장 한 덩어리만 있으면 앉은자리에서 미나리 한 소쿠리쯤 먹어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 그저 미나리와 된장, 막걸리 한 뚝배기면 천지강산이 바로 극락이었고 불콰해진 얼굴들이 반신선이나 된 듯도 했다. 그럴 때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먼저

언양이라 좋은 곳에
앞에는 무수정자
뒤에는 산호자요
둔터를 터를 닦아
화장산에 집을 지어
송기울산 울을하여
새미소라 맑은 물에
구늪이라 깊은 물에
고기 낚아 보신하니
기운이 다개로다
악철바위는 대바우요
울산은 선 바우요
양산은 술리 바우
경주는 팔 바우라
층계층계 올라가여
풀물을 재기치니
구경오네 구경오네
반구대사 구경오네

<언양의 소리> 한 가락을 길게 뽑아대면

“얼쑤!”
“잘 한다!”

손뼉을 치거나 둥실둥실 춤을 추며 추임새를 맞추다 또 한 사람이

고아를 비켜 앉아
못안들에 버들심어
가지뻗어 숲이로다
엉실덩실 덩천내야
놀기좋다 반구대사
올라가면 괴정지요
내려가면 황정지라
천천히 가이더니
명촌은 부촌이요
장촌은 질촌이요

소리를 이어받았고 신명이 난 사내들이 술잔이나 밥그릇이나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면 멈칫대던 아낙들이 하나들 끼어들어 어느새 신명이 가득한 춤판이 벌어지자 짜구난 강아지처럼 배가 빵빵한 아이들도 주먹만 한 돌을 주워 딱딱 두드리며 망아지처럼 우줄대는데 다시 누군가 소리를 받아

덕천가여 역말몰아
다개가여 다갈 박아
삼정가여 삼정 채여
마산가여 마부 세워
디끼타고 디끼타고
들내 버든에 휘둘러서
배네고개 올라가서
좌우 한편 바라보니
신목은 예심하고
잡목은 총총하고
노고지리 쉰 질 뛰고
청앙받이 쨍쨍 울고
속잎 났네 속잎 났네
약쑥밭에 속잎 났네
이네 일신 잦아지면
어느 귀한 친구가 날 찾으리요.

마침내 소리가 끝나면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남녀노소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우줄거리며 놀았다.

그렇게 어른들이 한창 화전을 다닐 때쯤 치만이나 기출이는 볕이 따뜻한 담 모퉁이에서 주로 사발고누를 두거나 돌치기를 하고 네 누이들은 공기받기나 땅따먹기를 했는데 한참 놀다보면 밑에 두 누이 끝님이와 순님이는 어느새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저도 돌치기를 하다가 치맛자락이 펄럭이거나 짧은 저고리 깃이 올라가 맨살이 드러나 멋쩍게 웃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세째 끝님이는 본성이 장난스러운지 아니면 네 살 아래 기출이가 유별나게 귀여운 건지 사발꼰을 두다가도 돌치기나 살구받기(공기받기)를 하다가도 괜히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찡긋대어 기출이는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장마철이 닥치자 밖으로 나돌지도 못 하고 방안에만 처박힌 치만이와 기출이는 물론 끝님이 순님이는 갑갑하고 지루해서 난리가 났다. 그러다 차츰 빗줄기가 잦아지고 가끔 해가 얼굴을 내밀면서 어느 듯 우물가와 장독간에 새빨간 봉숭아가 만발을 했다. 네 자매가 나란히 봉숭아물을 들이느라고 법석을 떠는데 간혹 연분홍꽃잎이 보이면 젖에다 피를 탄 죽은피의 빛깔이라고 던져버리기도 했다.

위에 둘은 어느새 흥미를 잃고 제방으로 들어가자 아직도 신명이 남은 끝님이가 기출이를 불러 억지로 봉숭아물을 들이고는 가시나 손보다도 더 예쁘다고 수선을 떨면서 또 손을 꼬옥 잡아보곤 했다. 그러나 누구도 덩치 큰 치만이에게는 봉숭아물을 들이려 않았고 그도 그냥 히히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저녁 미처 손을 씻지 못하고 석암선생을 만난 기출이는

“사내자식이 꽃물이나 들인다고, 너 그러다 고추가 떨어지면 우짤 기고? 벌써 떨어졌는지 아직 있는지 당장 확인해보자.”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어울리면서 남녀 네 아이는 어느 새 한 덩어리가 되어 한 나절 내내 같이 붙어 다니기가 일쑤였다. 봉숭아꽃이 지고 깨알같이 검고 통통한 씨알이 폭죽처럼 터지며 흩어질 때쯤 네 아이들은 그 봉숭아씨앗을 모아 손바닥에 담다 소꿉놀이에 빠져들었다. 검은 옹기, 하얀 사기그릇의 깨어진 조각으로 그릇을 다듬고 도토리 뚜껑 같은 온갖 둥글고 오목한 것들이 다 살림살이로 변했다.

네 아이 중에 유독 끝님이가 신명을 내었는데 그건 희고 조그만 손으로 깨어진 사금파리를 돌로 조심조심 다듬어 동그란 그릇, '동두깨미'를 만들어내는 기출이가 너무 신기했던 것이었다. 납작한 돌을 펴 방바닥을 만들고 널찍한 기왓장을 깨어 밥상을 만들고 굽이 있는 밥그릇의 밑바닥을 다듬어 가마솥을 만들고 하얗거나 파랗거나 누르스름한 온갖 조각들을 둥글거나 네모로 또는 타원형이 쟁반으로 만들어내었다.

심지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에 담가 먹은 풋감의 씨앗을 껍질을 벗기고 이빨로 살며시 물자 속에서 마치 숟가락처럼 생긴 하얀 씨눈이 비어져 나와 그걸 숟가락이라고 밥상에 올려놓는 데는 절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자기로서는 도무지 생각도 못 할 솜씨였던 것이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동두깨미 살림도 한층 풍요해진 것이 크고 동그란 분꽃의 씨앗에 영판 볍씨를 닮은 강아지풀의 씨알, 마치 쌀밥의 밥알이나 개미의 알처럼 생긴 닭의장풀 꽃의 열매도 풍부하고 그 밖의 별별 꽃과 풀잎도 색이 짙어 밥을 차리고 나물을 무칠 거리가 너무나 좋아졌던 것이다.

하루는 이렇게 동두깨미 살림이라도 질서가 있어야 된다면서 끝님이가 엄마아빠를 정하자고 했다.

그렇다면 제일 덩치가 큰 치만이가 아빠가 되고 언니는 엄마, 기출이와 자기는 아들딸을 하면 되겠다고 순님이가 말하자 끝님이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치만이는 덩치만 컸지 시근이 없어서 아버지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도 키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온갖 살림살이를 잘 만드는 기출이가 당연히 아버지가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끝님이는 억지로 기출이의 손을 당겨 밥상머리에 나란히 앉고 순님이와 치만이에게 너희들은 아들딸이니 절을 하라고 했다. 어리둥절한 둘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해도 끝님이는 민망해서 빼내려는 기출이의 손목을 더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초가을이 지나고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아침, 동헌에나 나가보려다 뭔가 자꾸만 뒷덜미를 당기는 느낌에 작파하고 안방다락 위에 모셔둔 병풍이랑 고서, 족보를 챙기면서 축문 쓸 준비를 하던 모 호방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어 여기저기 먹물이 번진 두꺼운 한지 한 장을 들고 방금 명심보감을 시작하려는 사랑채로 득달같이 달려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치만아, 이 바보같은 놈아! 그라고 이 밤톨 같은 놈아!”

깜짝 놀라 바라보는 석암선생도 안중에 없이

“이 새끼들 너거가 손댔제?”

치만이에게 철썩 뺨을 올려붙이더니 이어 조그만 기출이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석암선생의 놀란 눈빛과 마주치자 팔에 힘을 풀면서

“이 밤톨 같은 놈아! 니가 그러자고 꼬았제? 꼬았제?”

사정없이 멱살을 흔들다 놓으니 옆으로 픽 고꾸라져버렸다.

“그래 이 종이 반 똥가리를 째서 우쨋노? 도대체 무얼했단 말이고?”

앙 울음을 터뜨린 치만이가 덜덜 뜨는데 구석에서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기출이가 자기에 방에서 커다란 방패연 하나를 들고 왔다. 검은 먹물과 붉은 인주(印朱) 빛이 바랜 두껍고 우중충한 연이였다.

“이이고, 이기 웬 일고? 누가 그랬단 말이고?”

다시 죽일 듯이 역정을 내는데

“지, 지난 음력보름 때 가부리연, 뱡패연이 자꾸 끊어져 날아가자 아주 크고 실한 연을 만들자고 새이가, 치만이 새이가 다락에서 찾아온 겁니더.”
“뭐라고! 치만이가 그랬다고?”

아이를 돌아보던 호방이 멈칫했다. 치만이가 정말 자기가 그랬다고 고개를 주억거렸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문쇄길래 삼대독자 귀한 아이를 개잡듯이 하오? ”

석암선생의 말에 반쪽짜리 넓은 문서와 방패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모 호방이 무심코 연과 문서를 건네주었다.

“연을 잘 풀어보면 완전하게 복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건, 이건...”

석암선생이 깜짝 놀라며 더듬거리자 아차 싶은 모 호방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니, 갑오년의 탄원서가 아니오? 저 천지개벽의 갑오년에...”

순간 말을 하던 석암선생의 얼굴도 사색이 되고 말았다. 바로 젊은 아전 모 호방의 가렴주구를 순무사에게 탄핵했던 탄원서였던 것이었다.

“...”
“...”

두 어른은 말이 없고 아이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이 일이 밖으로 나가면 절대로 안 되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석암선생과 내, 우리 둘 중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하는 일이 생길 것이오.”

한참 만에 호방이 윽박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기출이를 더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버든 본가로 보내고 돌아온 호방과 석암선생은 김장배추를 솎은 새파란 포랑나물에 청주 한 주전자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야에 물을 떠 와 조심스레 방패연에 적셔 종이를 풀어내어 뒤쪽에 창호지를 대고 원래의 반쪽과 붙였다. 비로소 제대로 면목을 드러낸 탄원서는 단정한 행서의 소원(訴願)과 그 행간(行間)에 이를 조사한 순무사의 답변이 흘림체로 쓰이고 다섯 건의 각 사안마다 암행어사의 마패로 날인한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맨 말미에는 언양읍민의 곤궁한 처지와 조 씨 성을 가진 두 아전이 읍청사를 지으며 무려 4천량을 횡령하고 그 밖에도 김모 아전과 짜고 수많은 민폐와 악행을 저지른 죄상을 고발한 문건으로 진정자 47명의 명단도 수록되어 있었다.

아아, 갑오(甲午)년!
쉰이 훌쩍 넘은 초로의 석암선생도 아직 그 해의 혼란과 난리법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계속>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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