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7)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5장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이득수 승인 2022.01.16 16:09 | 최종 수정 2022.01.20 17:25 의견 0

5.  너무 이른 사랑에 못난 형님 ②"니는 내 남자가 되고 나는 니 여자가 되뿠다."

“도대체 어디서 뭐를 하고 살았노? 장터에서 너거 둘째, 셋째 형님들만 만나도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그 말짱 불곰 같은 사람들을 보고서도 말이야. 내 어디서 우리아부지가 5년간은 나타나지 말라는 엄명을 했다는 말만 듣고 오늘만을 기다렸다. 틀림없이 씨름판에 나타날 줄 알았다.”

“...”

이번에는 기출이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키도 많이 컸지만 더욱 커진 것은 손이었고 길어진 것은 손가락이었다. 작고 통통한 끝님이의 손이 기출이의 손등을 쓰다듬다 손바닥을 간질이고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접어보다 펴기를 반복하는 사이 만지는 손이나 만지키는 손바닥에 흥건히 땀이 고였다. 끝님이의 얼굴에 홍조가 점점 번져 잘 익은 복숭아 빛이 되고 기출이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창백해지면서 깊숙한 눈빛에 물기가 서려 반짝거렸다.

“이라면 안 된다. 안 된다. 안...”

끝님이의 손이 자신의 옷고름을 풀려는 기출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밀어내자

“그래. 안 그라께. 내 이렇게 가만히 있을 테니 그대로 날 좀 보듬어 조.”

끝님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콩닥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가슴에 전달되자 기출이의 가슴도 갑자기 물꼬를 헌 봇물처럼 사정없이 우당탕거리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팔을 둘러 끝님이를 보듬고 아이를 재우듯 토닥토닥 두드리는데

“아이 좋다. 니 가슴팍이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하구나. 우리 이렇게 평생을 살면 안 될까? 내가 니 각시가 되고 니가 내 신랑이 되고 말이다.”

끝님이가 이번엔 손끝으로 기출이의 허벅지를 슬쩍 건드리며 빤히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안 되지. 니는 언양성내서 젤 부잣집 호방나리의 딸이고 나는 아비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에다 제 입 하나 앞가림할 아무 재산도 기술도 없는 비렁뱅이 아이가? 우리가 우쩨 신랑각시가 된단 말이고? 그라고 니 아부지 아니 호방나으리가 허락을 할 것 같나?”

점점 노골적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밀어내는데

“인자 우리 집도 큰 부자는 아닌 갑더라. 우선은 언양땅에 현감나으리도 군수영감도 다 사라지고 나니까 대대로 육방관속 아전으로 살아온 우리 집도 더 이상 묵고 살 일이 없어진 기라. 우리 아부지가 석암선생 모시고 기출이 니 놉해서 악착같이 벅수 같은 치만이를 공부시킨 것도 나중에 세전가업인 아전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젠 장남이 자동으로 물려받는 아전자리도 차남이나 여염집 자손이 임시로 들어가 잔심부름이나 하며 자리 나기를 기다리는 통인(通引)자리도 다 없어진 기라.

그래서 이적지 벌어 논 돈을 가지고 치만이가 평생 먹고살 밑천을 장만 할라카는데 어장이나 산판은 기술도 없고 사람 다루기도 힘들 것이고 장사는 눈치도 없고 셈도 빠르지 않아 못할 것이 뻔해서 우리 아버지는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서 평생 지세를 받을 수 있는 논밭이나 다달이 세를 받는 장터의 가겟집 건물을 사거나 지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것도 여의찮은지 만날 돈이 모자란다고 한숨을 푹푹 쉰단다.”

“아니 그럴 리가? 너거 집 논밭이 저 앞 마구뜰은 물론, 성문 동밖에 뜰, 서쪽 섬밖에 뜰에다 송대뜰, 직동뜰, 감대거랑, 개씹또랑뜰의 절반을 차지하고 중남이나 천전, 심지어 작천정 너머 화천뜰 자갈논까지 엄청나다면서?”

“아이다. 안 그렇다. 자 단디 들어봐라.”

단디 들어보라면서 끝님이는 기출이의 손을 더 단단히 조였다. 단디 들으라면서 단디 조여 가는 것이었다.

“재작년에 우리 큰님이 새이를 명촌 양반 집안에 시집보낼 때 이불마실 지화뜰 열두 마지기에 밭 육백 평에 화초문갑에 보료와 오동나무장롱에 시어마시 야시목도리와 배자, 시아바시 정자관에 도포와 시조부모, 시부모의 요이부자리에 시누이 다섯과 집안 식구를 비롯한 예단에 또 논 스무 마지기 값이 들었다카더라. 세상이 변하여 아전자리도 없어지는 판에 맏딸이라도 근본 있는 양반집에 보낸다고 허리가 휜 기라. 여북하면 종살이하던 열 네 살짜리 금춘이까지 딸려 보냈을까?

어데 그 뿐이가? 작년에 우리 작은님이 새이가 삽재로 시집갈 때도 족히 논 여남은 마지기는 날아갔제.

거다가 추석 시자말자 팔월 스무하루 날 우리 셋째 순님이새이도 울산 병영의 무슨 군관나부랭이집에 시집보낸다 카더라. 큰님이새이 시집보내면서 하도 골병이 들어서 이번에는 처지가 비슷한 데 보내지만 그래도 화초장이랑 문갑에 울산논 일곱 마지기를 딸려 보낸다더라.

“그거야 형편이 되니 보내는 거겠지.”

끝님이 땀이 흥건한 손으로 자꾸만 조물거리는 바람에 어느세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후끈하고도 끈적거리는 충동에 기출이가 몸을 배배 꼬는데 이번에는 끝님이가 재빨리 그 땀이 흥건히 고인 기출이의 손을 끌어당겨 한 바퀴 휙 돌리는데 일부러 그랬는지 뭉클하면서도 탱글탱글한 두 개의 젖무덤이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거기 아이다. 이러다가 순님이언니까지 다 시집보내고 내 차례가 되면 논밭은커녕 화초장하나 오동나무장롱 하나 못 가지고 갈 판이 될지도 모르는 기라. 그래서 니캉내캉 우리 아부지 돈 가방을 들고 도망가자는 거라.”

“에이 그래도 어떻게 도둑질을?”

말을 하던 기출이가 훕, 숨을 내쉬더니 입을 다물었다.

자기 손목을 움켜잡은 끝님이의 손등이 툭 자신의 아랫도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바보, 부모 돈을 가주가는 것은 도둑질이 아이다.”

“그래도...”

“이말 저말 할 것 없이 그냥 우리 둘이 어데 도망이라도 가면 안 될까? 내 우리아버지가 돈 가방을 어데 넣어두는지 안다. 현청이 없어지고 나서 우리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고 맨날 돈 가방을 들고 울산으로 부산이나 구포로 댕긴단다. 내 그 가방을 넣어두는 궤짝 쇳대를 어디 두는지도 다 안단 말이다.”

“안 되지, 안 돼. 우리 울산경찰서나 언양주재소처럼 방방곡곡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생겨서 대번에 칼 찬 일본순사한테 잡힐 끼다. 그 사람들은 무법천지로 못 하는 짓이 없어 젊은 여자들은 다짜고짜로 겁탈한다 카더라.”

“그거사 나중일이고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 어데로 가서 니캉 내캉 둘이서 이렇게 하루 종일 껴안고 한 삼년만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한 석 달이라도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그렇지만. 그건, 그건, 그...”

기출이가 헉 숨 끊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쭉 펴더니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집요하게 파고들던 손길이 기어이 그의 빳빳하게 성난 사내를 건드려버린 것이었다.

“...”

서로가 놀라 한참이나 마주 보는데

“니는 가만 있어라. 내가...”

홍시처럼 방금 터질 듯 한 눈빛의 끝님이가 기출이의 입술을 덮치더니 혀를 쑥 집어넣었다. 기출이가 가만있자

“봐라. 니도 좋제.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거란다.”

뒤로 물러앉은 끝님이가 제 손으로 저고리고름을 풀어 하얀 명주 속저고리가 드러났다.

“이거 좀 풀어줘.”

기출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주 고름을 푸는데 고개를 숙인 끝님이가 사정없이 기출이의 바지 띠를 풀어버렸다. 기출이의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

둘 다 눈을 내리깔고 멋쩍게 옷을 입는데 떡갈나무 가지에 앉은 종달새 두 마리가 재재거리고 있었다. 야산의 묏등에 산다고 묏새나 미새라고 부르는 그 노고지리 두 마리는 마치 여태껏 모든 걸 다 보았다는 듯이, 그래서 무슨 흉이라도 보는 듯이 주고받고 차례로 재재거렸다. 어릴 적 진장만디에서 소를 먹이며 너덧 개의 새알이 소복한 새집을 찾으려고 미새가 앉는 자리를 슬슬 덮치면 어느새 포르르 날아올라 새도 새알도 얻지 못 하고 그냥

“노고지리 봄지 봤다! 노고지리 봄지 봤다!”

소리 지르던 그 노고지리에게 거꾸로 참으로 민망한 꼴을 들킨 셈이었다.

“와 웃노? 이기 웃을 일이가?”

책망하듯 쳐다보던 끝님이도 픽 웃고 말았다. 기출이의 머리 위의 하늘에 아까부터 커다란 솔개 한 마리가 빙빙 맴을 돌고 있었다. 들켜도 참 여러 군데 들킨 셈이었다.

“아이고, 이거 참.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기고? 이기 우째 된 일이고?”

갑자기 다리를 쭉 뻗고 퍼질러 앉은 끝님이가 다리를 덜덜 떨면서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기출이가 놀라 바라보니 두 눈에 눈물이 흥건했다. 말없이 두 손을 그러잡아 조용조용 주무르는데

“인자는 할 수 없다. 니는 내 남자가 되고 나는 니 여자가 되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끝님이가 빤히 쳐다보았다.

“할 수 없다. 내일 도망을 치자. 내가 내일 해질녘에 울 아부지 돈 궤짝에서 지전(紙錢)을 몽땅 들고 올 테니 그길로 바로 도망을 치자. 그 돈이면 우리 둘이 십년은 좋키 묵고 살 끼다.”

“도대체 가면 어데로 간단 말이고?”

집을 나선다는 것이, 객지로 떠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강원도의 거친 바닷가의 뱃사람들과 태백산, 치악산, 소백산 깊은 산골의 산적보다 더 거친 숯쟁이들을 겪으며 누구보다 잘 아는 기출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묻는데

“공굴 건너 정거장으로 오너라. 재수 좋으면 차도 얻어 탈 수 있지만 새로 닦은 치도로 하루쯤 부지런히 걸으면 부산 동래에 닿을 수 있단다. 부산이나 동래 또는 구포에는 우리 아버지가 자주 나드니까 거기서 배를 타고 제주도나 인천, 아니면 울릉도 같은 먼데로 떠나자. 나는 니만 있으면 지옥이라도 천당이겠다. 처음부터 신작로에 나와 있지 말고 어데 숨어 있다가 내가 나오면 바로 신호를 해라. 니가 잘하는 뻐꾹소리를 내든지 아니면 그 만나보세, 만나보세 아주까리선창가로나 한 절 부르든가.”

 

그랬다. 경술년의 한일합방으로 삼천리강산이 왜놈의 세상이 되자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일본인 측량기사들이 빨간 깃발과 요상한 기계를 들고 산과 들 온천지를 누비더니 지지난 해부터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도로를 닦는다고 가을걷이가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일본도를 차고 회초리를 든 왜놈 감독을 붙여 혹독하게 부역을 시켰다. 그렇게 이태 동안 닦은 치도는 읍의 남문에서 남천내를 건너 덕천고개를 넘어 부산으로 향하고 북문을 지나 감대거랑을 지나 직동과 반곡을 거쳐 경주로 향했다. 그렇게 영천과 안동을 지난 도로는 마침내 서울에 닿고 다시 개성과 평양을 거치 의주에서 끝이 나는데 거기서 다시 압록강철교를 건너면 중국에도 갈 수 있다고 했다.

갑오년 녹두장군이 한 번 일어났다 쓰러진 후 세상이 변해도 너무나 많이도 또 급하게도 변하는 지라 도깨비불이라는 전깃불이 들어오고 천만리 밖에서도 귀신처럼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는 전화라는 것이 들어오면서 부로산봉수대도 덕천역 역도 어음리와 방기리의 원도 모두 사라지고 현감자리가 군수가 되더니 다시 울산에 통합되어 군청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영명학교가 들어섰다. 물론 그 와중에 끝님이 아버지 모 호방 같은 육방관속이나 역장, 역승, 역정에 기발, 보발, 파발꾼도 봉수군도 모조리 없어지고 마구뜰의 마위전도 봉당골의 봉수군 거주촌도 수남의 덕천역 역마을도 모조리 폐지되어 그 역이나 원, 봉수대에 딸린 논밭들이 모 호방처럼 수단 좋은 사람이나 약삭빠른 왜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비록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이긴 하지만 매사에 정직하고 억척같이 일하는 데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기술도 역시 대단했다. 논밭이나 산허리를 허물어 길을 닦거나 숙소용의 간단한 기와집을 짓는 것은 그렇다 해도 그 넓은 남천내를 돌로 놓는 뚝다리도 아니고 나무기둥을 세우고 솔가지를 깔고 흙을 덮는 섶 다리도 아닌 돌가리 공굴로 단 몇 달 만에 해치우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도 했다.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돌가루(시멘트)에 모래와 자갈을 섞고 물을 부어 갠 후에 돌보다도 더 단단한 공굴(콘크리트)다리를 만든다는데 말 같잖은 소리라고 혀를 끌끌 찼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정말 바위보다 더 단단한 돌가리공굴(언양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다.) 완성되고 그 입구인 남부와 서부 방천마을 사이에 큰물이 져도 물이 못 들어오게 단단한 물문까지 만들어 달아주는 데는 절로 혀를 차고 말 일이었다.

그 왜인 기술자가 얼마나 대단하면 군청 뒤의 언양읍성 둑을 여기저기 허물어 남천내 공굴에서 어음리 마을에 이르는 방천(防川)을 쌓는데 공사가 다 끝나고 준공검사를 한다고 망치로 여기저기를 톡톡 두들겨보다 여기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영 엉뚱한 소리가 난다고 허물어보라고 하니 그 속에서 행방불명 된 지 몇 달이 지난 사람의 시신이 나왔다고도 했다.

 

끝님이는 애가 타서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데 기출이는 둘이 도망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발뺌하면서 별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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