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오른쪽은 그가 옥중에서 쓴 에세이를 묶은 『옥중수고』한글 번역본의 하나
평소 서민은 물론이고 영세 소상인이나 저소득층이 경제적 기득권을 줄이고,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경제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괴이한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다. 부동산 자산이 매우 적거나 작은 집 한 채를 가진 서민들이 ‘종부세’를 세금 폭탄 운운하며 반대하는 시위를 보노라면, 어이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 경제학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이런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행동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적인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부키/2014)에서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기존 질서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소수의 이익만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한계가 극명히 드러난 후에도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때로는 현 상태에서 혜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로비, 대중 매체를 통한 선전, 뇌물, 심지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누군가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더라도 기존 질서는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시장의 ‘1원 1표’ 원칙 탓에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을 거부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때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신념에 넘어가기도 한다. 이런 경향 때문에 현 체제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마저 그 체제를 변호하는 현상이 생긴다.
독자들 중에는 미국의 노령 연금 수령자들이 “정부는 내 메디케어에서 손을 떼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오바마 케어’에 반대해 데모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메디케어는 (쉽게 말하면) 정부가 돈을 대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도 ‘정부’더러 손을 떼라고 하는 것이다.
참고로 메디케어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공공 의료보험이다. 미국에는 노인을 위한 메디케어, 극빈자를 위한 메디케어 외에는 공공 의료보험이 없으며, 이를 확대하려는 것이 이른바 ‘오바마 케어’이다.」(pp.443-4)
한국 사회에서도 자신의 단기적 이익만을 고려해, 실질적 이득이나 장기적 이익과 반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최저임금 반대. 매장·식당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중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알바 일감이 줄어들까봐 사장들과 함께 반대 집회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더 악화될 수 있는데도, 정작 내 일감·임금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둘째, 연금 개혁 저지. 노년층이, 국민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거나 연금 지급액을 조정하자는 논의에 반대해 대규모 반대 집회를 연다. 인구 고령화에 대비한 안정적 연금 재정 마련은 궁극적으로 연금제도를 유지·보완하는 길인데, 단기적으로 ‘내 연금 깎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셋째, 외국인 노동자 확대 반대. 제조업·서비스업 현장에서는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 수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우려하며 수입 확대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일손 부족으로 서비스 질 하락,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 압박이 커지는데도 ‘내 일자리 안전’을 이유로 반대한다.
위의 사례들은 심리학·행동경제학에서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단기적 불안·불확실성을 더 크게 느끼다 보니, 실제로는 내게 돌아올 더 큰 긍정적인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저항과 저소득층의 단기적 불안감이 경제 개혁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를 극복하고 경제발전의 과실을 소수가 독식하는 현 체제를 넘어 공정한 분배가 가능한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을까? 장하준은 앞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존 경제 질서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난 30년여 동안 세계를 풍미한 경제 체제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안정적이고, 더 평등하고, 더 지속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을 포기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 변화는 어렵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우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진다.
기억하자. 200년 전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 영국 정부는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감옥에 가뒀다. 50년 전에는 현재 개발도상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테러리스트’로 영국이나 프랑스 정부의 수배를 받았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 말처럼, 우리는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p.444)
의지로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믿음이 현실에서 절망으로 바뀌는 경우가 하 많던가! 하여 믿음이 ‘신념’으로 돈독해지기 위해서는 ‘증거’를 필요로 한다.
그 증거를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