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2)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4장 모 호방네의 기막힌 내력

이득수 승인 2022.01.10 17:35 | 최종 수정 2022.01.13 12:49 의견 0
ⓒ서상균

4. 모 호방네의 기막힌 내력 ① 석암선생 "기출아. 니는 인자부터 남한테 넉 사자든 큰 대자든 한문 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어정칠월, 둥둥팔월. 그렇게 아직 날은 덥고 농사일은 바쁘지 않은, 그러면서도 온갖 곡식이 익는 농사꾼에게 가장 넉넉한 계절이 왔다. 남의집살이를 하는 머슴에게는 더더욱 호시절이었는데 신이 나기로야 기출이도 뒤지지 않았다.

그해 추석에는 모처럼 언양 남천내 갱빈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다. 수십 년 어지러운 시국에 뜻밖의 숨구멍이 틘 것이었다.

그러나 갑오년 녹두장군이 한번 일어나서 삼천리강산이 쑥대밭이 되고 오늘은 청국 사람이, 내일은 왜놈이 한양도성과 구중궁궐을 좌지우지하고 왕비가 시해되면서 이름뿐인 황제는 여기저기 도망치기에 급급한 데다 지난 을사년 이후 나라가 이미 송두리째 왜놈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돌다 지난여름 마침내 500년 조선의 사직이 문을 닫고 반만년을 이어온 배달민족의 삼천리강산이 짓밟히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글을 읽은 식자들은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의병이 궐기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왜놈들이 비밀리에 사주해서 씨름판을 벌였다고도 했다.

그러나 골짝골짝에서 밀려온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아등바등 코밑이 단 무지렁이 농사꾼들로 자갈밭을 골라 천막을 치고 차일(遮日)을 두르기도 전에 갱빈이 그득해지며 장국밥을 끓이는 냄새와 탁주를 마시면서 늘어놓는 욕지거리로 시끌벅적한 장터로 변해버렸다.

 

이제 추석이 지난 지 이틀이 된 팔월 열 일해 날이라 스무날까지 사흘이나 더 노는 날이 남은 재출이, 또출이와 막내 기출이 삼형제가 모처럼 동행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씨름판을 향했다. 앞세메에서 웃각단을 지나는 길가의 벼이삭에 한창 물이 잡히고 여기저기 그 달짝지근한 물을 빠는 참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그 논길에는 지난여름의 가뭄을 용케 이겨낸 여뀌 풀과 앉은뱅이 꽃이 붉고 흰 마지막 꽃송이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또 제비꽃으로 불리기도 하고 오랑캐꽃으로 불리기도 하는 앉은뱅이 꽃도 자세히 보면 그 작은 키에도 올망졸망 옹골찬 씨앗들을 매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정구지를 심은 돌담을 기고 올라가는 다섯 손가락 모양에 날카롭고 억센 가시를 매단 며느리배꼽풀 환삼덩굴도 붉고 흰 쌀알이 뒤섞인 식혜 같기도 하고 약밥 같기도 한 꽃송이를 가득히 매달고 있었다.

방금 점심을 먹었지만 그들은 벌써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징검다리엔 도착했을 때 그들의 손에는 예외 없이 벼이삭 하나씩이 들려있고 입가엔 풋 나락을 까먹던 쌀 물이 허옇게 붙어있었다.

“뚝다리를 건널 때는 몸에 힘을 빼야 된다. 발밑에 돌이 꼰들꼰들 해도 당황하지 말고 저쪽 약국대쪽을 보며 무심한 척 앞으로 발을 내딛어야 된다. 자, 내가 하는 것 잘 봐라.”

그래도 형이라고 셋째 재출이가 하얗게 반사되는 여울목의 여뀌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세 형제가 차례차례 징검다리로 냇물 위로 들어서자마자 정작 가장 먼저 물에 빠진 것은 재출이었고 몸이 부드러운 막내 기출이만 무사히 건넜다. 셋이 멋쩍게 허허 웃었지만 아까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맨발이라 그까짓 짚신쯤 젖어도 그만이었다.

 

이번 씨름판에는 단골로 참석하는 본토박이 두동장군, 상북장군 외에도 울산장군과 청도장군도 오고 특히 멀리 마산장군과 대구장군은 천하무적이라고 했다. 그렇게도 멀리서 여러 장군이 몰려오게 된 것은 하도 오랜만에 벌어진 씨름판이기도 했지만 1등 장사에게는 황소 한 마리가, 또 하다 못해 5등만 해도 무명 한 필이 주어지는 부상이 상당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직은 열여섯 명의 본 씨름꾼을 뽑는 동네 머슴들의 추첨 판이라 별 열기도 없이 지게질, 쟁기질에 아랫도리가 어두워진 농사꾼들이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금방금방 어이없이 나동그라지는 모습들에 사람들은 너나 없어 허허 웃기만 했다. 그 모래판 귀퉁이 여기저기에는 울산과 청도와 마산과 대구에서 온 키나 덩치가 비교도 안 되도록 커다란 장골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몸매를 자랑하다 가끔씩 일어나 모래판 주위를 한 바퀴씩 돌면 와아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 마산에서 온 얼굴빛이 잘 익은 대추처럼 검붉은 장사는 왼쪽 허벅지에 혹인지 부스럼인지도 모를 살덩이가 불룩 솟아있어 사람들은 제게 혹이라면서, 옛날부터 세상을 뒤집을 장사는 어깨 밑에 날개를 달거나 이마나 몸에 뿔을 달고 태어난다는데 과연 장군이 태어나기는 났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날개나 뿔이 난 장군이 태어나면 세상이 뒤집힌다는데 그러면 큰일이라고 또출이가 말하자 재출이도 어디서 들었다면서 금년 여름에 나라가 몽땅 넘어가 이제 더는 큰일 날 일도 없다면서 삼형제가 주고받는데 누가 기출이의 머리를 툭 쳤다.

“?”

고개를 돌리던 기출이의 눈이 반짝했다.

“행님아, 치만이 행님아!”

자기들 또래 열 살이라고 들었는데 키가 한 뼘이나 크고 몸이 절구통처럼 생긴 치만이를 두 형들이 놀라서 쳐다보자

“인사해라. 우리 모 호방댁 도령 치만이 행님이다. 그라고 행님아, 여기는 우리 둘째 재출이, 셋째 또출이 행님이다.”

근 한 달 만에 만나 어안이 벙벙한 기출이의 손을 잡은 치만이는 아무소리도 없이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저쪽 모서리를 가리켰는데 그기에 색동옷으로 잘 차례 끝님이, 순님이가 있었다. 아까부터 내내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끝님이는 기출이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휘적휘적 걸어가던 치만이가 발을 멈추고 삶은 밤 한 개를 꺼내어 기출이에게 주더니 아직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재출이, 또출이에게도 하나씩 던져주었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 화문석 초시기(草席)를 걷은 두 누이와 함께 넷은 씨름판을 벗어나 징검다리보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비로소 씨름판의 웅성대는 소리가 잦아질 때 쯤 걸음을 멈추고 다시 자리를 펴려는데 어디에서 찢어지는 듯 물떼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앙증맞은 새끼 두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도망을 쳤다.

“아이구, 놀래라! 낄룩새 집이 다 있네.”

마른 풀줄기로 동그랗게 짠 새집을 주워들고 순님이가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데

“기출아, 기출아, 기출아...”

목이 꺽꺽 메는 소리를 내던 끝님이는 뚫어질듯 기출이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참, 오랜만이다. 그제?”

희고 맑은 커다란 눈을 감았다.

끝님이가 얇게 벗긴 대나무껍질로 짠 네모난 초배기를 열어 초시기 위에 자기 손수건을 펴고 송편과 찌짐부스러기를 꺼내놓았다. 호박떡과 정구지전도 있고 소고기에 군소, 소라, 열합으로 만든 산적도 있었고 단술을 넣은 작은 호리병과 따라 마실 간장종지도 있었다.

 

한 달이 가깝도록 오랜만에 만나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에 조그만 기출이의 손을 커다란 자기 손안에 넣고 주물럭거리면서도 치만이는 눈만 끔뻑끔뻑할 뿐 도무지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만난 기출이가 자기 집에도 있는 호박떡은 외면하고 노란 콩고물과 빨간 팥고물이 든 송편을 하나씩 먹고 소고기산적을 허겁지겁 먹는데

“기출아, 언칠라. 이 단술 좀 마시고 천천히 묵어라. 그라고 정구지찌짐에 지렁은 쪼끔만 찍어라. 너무 짭다.”

기출이가 젓가락질을 가져가는 간장종지를 밀어내고 빈 잔에 단술을 따라주더니

“기출아, 이번에는 이 열합 좀 묵어봐라. 어른들이 그라는데 이 열합이 거시기 뭐 아무튼 그 뭐를 닮아 이걸 제사상에 올려야 딸네들이 잘 산다고 반드시 산적에 넣는 거란다. 니가 이거를 먹으면 니 처가집이 잘 살지, 내가 좋을지...”

발그레한 열합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어주는데

“아이고 쌔꼴시러버라. 새이 니는 기출이한테 꼭 신랑각씨 하는 맨시로 하는구나. 기출이는 명촌형부 김서방이고 언니 니는 꼭 큰님이 언내맨시로. 나는 당최 앵꼽아서 몬 보겠다.”

비아냥거리며 순님이가 눈을 흘기는데

“기출아!”

재출이, 또출이 형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기름진 음식냄새에 끌린 모양이었다.

“...”

삼남매가 동시에 돌아보았지만 치만이는 여전히 말이 없고 두 누이는 고개를 꼬더니

“우리는 한 바퀴 돌아보고 올께.”

손을 잡고 씨름판 쪽으로 다가갔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떠오는 모양이었다.

ⓒ서상균

넷이 남게 되자 먹어보란 말도 하기 전에 재출이 또출이는 허겁지겁 산적과 송편을 집어먹고 마지막으로 호박떡과 정구지찌짐을 우겨넣더니 호리병에 단술을 따라 마시고 거꾸로 흔들어보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비로소 푸우 트림을 했다.

그러다 문득 민망한 눈빛으로 치만이를 바라보는데 치만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는 씨름판에 간다. 망내이 니는 놀다가 우리를 찾아오든지.”

둘이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어디서 보고 있었든지 두 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참 잘도 묵제? 입도 걸제?”

둘이 중얼거리며 빈 그릇들을 초배기에 담고 보자기로 싸매는데

“애라이 이놈들!”

이번에도 누가 기출이의 머리를 툭 쳤다.

“서, 선생님, 석암선생님.”

기출이의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치만이도 긴장해 허리를 꼿꼿이 세웠지만 눈만 끔뻑하고 말이 없었다. 두 누이들도 일손을 멈추고 가만히 엎드렸다.

“이 사방팔방이 훤한 데서 아무나하고 어불리면 우짜노?”

먼발치로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색동저고리가 바짝 더 긴장하는데

“아녀자들이 함부로 올 데도 아이고 이래 오래 있을 곳도 아이니라. 아가씨들은 치만이 데리고 그만 집에 가고 기출이 니는 이리 좀 오너라.”

휘적휘적 자갈밭을 걸어 씨름판을 향했다.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목판을 울러 맨 엿장수가 두드리는 가위소리와 엠메에, 어디서 우는지 모르는 염소울음이 끼어들어 씨름판은 바야흐로 정신이 아뜩하게 붕붕 뜨는 거대한 소음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문 앞 물문거리에서 씨름판에 이르는 길에는 삶은 고구마와 밤을 팔거나 능금과 홍시를 펼쳐놓은 아낙들이 여럿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붉고 굵은 양대를 넣은 밀떡과 말린 호박오가리와 팥을 넣은 모둠백이, 볶은 메뚜기를 파는 사람도 있었다.

비록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두 중노동으로 어깨가 굽고 허리가 휘었지만 오늘 하루는 활기가 가득했다. 얼굴이 검게 탄 사내, 기미가 가득 낀 여자 할 것 없이 누구 하나 잘 먹고 잘 살아 기름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아무 생각 없이 소리를 내지르고 웃고 있었다. 이렇게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모이고 모처럼 농사일을 잊고 거기에 서 있는 것만도 즐거운 모양인 것 같기도 했다. 점잖게 장죽을 빼문 두루마기차람의 노인이나 앞니가 몽땅 빠져 귀신같은 형상을 한 할머니 역시 합죽하게 웃으며 즐거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어가 좋겠군.”

푸푸, 구수하고 푸근한 김을 연방 뽑아 올리는 길게 늘어선 장국밥집 하나를 가리키며 석암선생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거게 앉거라.”

시꺼멓게 낡은 멍석바닥에 개다리소반 하나를 놓고 좌정한 석암선생이 차마 마주 앉지 못 하는 기출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살도 붙고 키도 좀 컸구나. 역시 엄마 밥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구나.”

한 번 더 앉으라는 눈빛을 보내더니 포장 앞을 지나가는 엿장수를 황급히 불렀다. 긴 엿 한가락을 사 자기도 조금 떼어 맛을 보고는 몽땅 기출이에게 주었다.

탁주와 장국밥이 들어오자 천천히 사발에 부어놓고 무김치를 집으면서

“국밥은 니가 묵어라. 나는 배부르다.”

수저를 건네주었다.

“...”

건성으로 수저를 받아 쥔 기출이 말도 없고 먹지도 않자

“안 되겠다. 내 니놈에게 꼭 할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안 되겠구나.”

급하게 막걸리를 들이켠 석암선생이

“보소, 아지매. 있다가 이 아이더러 빈 그륵하고 술뱅이를 보낼 테니 반티에다 이 음석들 좀 담아 주소.”

하여 주모가 함지를 들고 오자

“따라 오너라.”

막걸리가 든 호리병을 들고 성큼성큼 자갈밭으로 걸어갔다.

작고 납작한 함지에 국밥 한 그릇과 김치보시기, 그리고 술잔으로 쓸 빈 사발 하나를 싼 보따리였지만 여덟 살 기출이에게는 제법 무거운 짐이었고 뚝배기 속에 출렁거리는 장국밥이 넘칠까봐 조심스럽기도 했다.

둥그런 씨름판과 이를 둘러싼 국밥집을 벗어난 한 귀퉁이에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사내들이 여러 장의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솔잎으로 윷판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고 벌써 판이 벌어진 두어 곳에는 윷을 던지는 사내와 말을 쓰는 사내가 서로 ‘잡고 가자, 두동으로 굽고 가자.’ 면서 승강이가 한창이었고 또 한 편에서는 마지막 동을 빼고 판이 끝났는지 커다란 탄성과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이 가득한 얼굴들이 죄다 불콰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려라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게 좀 내라놓고 숨 좀 돌리라.”

윷판에서 댓 걸음 떨어진 자리에 우뚝 서서 돌아보던 석암선생이 기출이가 든 함지가 든 보따리를 받아 바닥에 놓았다. “너 저기에 쓰진 글자 중에 아는 것이 있느냐?”

무심한 척 윷판 옆에 펄럭거리는 깃발을 가리켰다.

“예, 두 번째는 나무목(木) 옆에 넉 사(四)자, 그 뒤에가 큰 대(大)자 그래서 척사대회장이 아입니꺼?”

순간 놀라운 기색이 역력한 석암선생이

“두 번째가 넉 사자라는 것은 우째 알았노?”

되물었다. 사람 인자와 큰 대자에 하늘 천자를 연결시켜 외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 그 큰 대자를 잊어버리지 않는지 시험 삼아 물어본 것인데 한 술 더 떠서 넉 사자를 다 아는 것이었다.

“어디서 한 두 번 듣기나 본 거 같심더. 앞에 나무목변은 윷을 만든 재료 마무를 말하고 뒤에 넉 사(四)자는 윷의 개수를 말하는 것 같심더. 누구한테 배운 게 이이고 그냥 지 짐작임더.

“그래. 그렇다면 저게 척사대회장이라는 것은 또 우째 알았노?”

“그것도 그냥 짐작입니다. 동빼기하는 윷은 나무로 깎은 네 개의 윷까치를 던지는 것이라 척사라 한다고 들었으니 아마 척사대회장일 기라고 말입니더.”

“허허 그 놈 참...”

한참이나 혀를 차며 조그만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던 석암선생이

“여기서 부터는 내가 들꾸마.”

보따리와 술병을 양손에 들고 휘적휘적 앞서 나갔다. 어린 기출이가 보아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선비차림으로서는 어딘가 어색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석암선생이 한참이나 떨어진 갱빈바닥에 큰물에 휩쓸려온 솔보대기가 겨우 뿌리를 내린 손바닥만 한 그늘을 의지하고 앉더니 보따리를 풀고 다시 판을 폈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묵어라.”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은 기출이에게 국밥그릇을 밀어주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라니까. 그냥 니 친 할배라고 생각하고 어서 묵어라.”

“예에...”

겨우 숟가락을 드는데

“천천히 묵어라. 언칠라. 그라고 장터국밥이란 이렇게 바람이 슬슬 부는 툭 터진데 앉아서 국그륵에 모래도 들어가고 지푸라기도 들어가야 제 맛이다. 농사꾼이든 장사꾼이든 너무 까다롭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탁주를 두어 잔 더 마셨다. 점차 숟가락질이 느려지던 기출이가 고개를 들자 기출이를 바라보는 석암선생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벌겋게 상기되고 눈빛에도 술기운이 돌았다.

“잘 들어라. 기출아. 니는 인자부터 남한테 넉 사자든 큰 대자든 한문 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

의아하게 바라보는 기출이에게

“어떤 사람은 글을 깨치면 힘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글을 배우면 짐이 되고 병통이 되어 제 몸을 헤치게 되는데 니가 바로 그런 상이다.”

“와 그렇능교? 지만 와 그렇능교?”

“차차 알 끼다. 우쨌기나 그렇게만 알아라. 다시 내 앞에서 글자 운운하면 경을 칠 줄 알아라. 없는 사람은 그저 소나 개나 돼지처럼 주는 대로 묵고 열심히 일이나 하고 자식새끼 낳아 기르며 살다 죽으면 된다. 그래서 상것이라 커지 달리 상놈이가? 내가 하는 이 말이 지금은 니한테 섭섭하겠지만 니도 나이 들면 알게 될 끼다.”

“...”

차마 말대꾸는 못 해도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빈 그륵은 니가 챙겨서 갖다 조라.”

석암선생은 다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씨름판이 아닌 성문을 향해서였다.

 

팔월대보름씨름판에서 치만이와 끝님이, 순님이를 만나고 석암선생을 뵈 온 며칠 뒤였다. 비록 낯선 땅에서 온 홀어머니가 올망졸망 5남매를 키우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살림에 유복자신세였지만 다시 어미 품에 살게 되니 무밥, 시락밥이 달았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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