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8)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5장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이득수 승인 2022.01.16 16:33 | 최종 수정 2022.01.21 11:36 의견 0
ⓒ서상균

5.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③끝님이와 야반도주 약속 
 

끝님이는 애가 타서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데 기출이는 둘이 도망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발뺌하면서 별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알았제? 꼭 나올 끼제?”
“...”
“만약에 니가 안 나오면 나는 저 참나무에 목을 맬 끼다. 그리고는 머리를 산발한 귀신이 되어 평생 니만 따라다니며 해꾸지를 할 끼다. 알았제?”
“...”
“알았제? 벌써 아이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벌써 신세를 조진 것이다. 나올 끼제. 나올 끼제?”
끝님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래 아, 알았다.”
엉겁결에 내뱉는 말에

“아이고 좋아라! 인자 우리 둘은 진짜 신랑각시가 되는 기라. 니가 진짜 내 신랑이 되는 기다. 그리고 니 닮은 아들도 놓고 내 닮은 딸도 놓고 우리도 아이를 한 다섯이나 일곱쯤 놓아기르자. 그중에 한 둘은 공부도 많이 시켜 벼슬도 시키고.”
“그래 알았다. 니가 좋다면 뭐든지 하는 거지.”
“아이 좋아. 기출아 나는 니가 정말 좋다. 얼굴도 잘 생겼고 눈빛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숨소리도 좋다. 심지어 코푸는 소리나 훌쩍거리는 소리, 하품하는 입도 좋고 입 냄새도 다 좋다. 벌써 팔 년이나 되었제. 일곱 살짜리 니가 우리 집에 첨 왔을 때 열한 살인 나는 와 그래 가슴이 울렁거리는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땅딸보에 아랫배가 나온 우리 아버지나 곰처럼 덩치만 큰 치만이가 아닌 호창호창 날씬하고 여릿여릿 부드러운 남정네를 처음 보아서 그런지로 모르지. 니가 우리 집에 온 후로 난 잠자리에 들 때 하루라도 널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다시 품을 파고든 끝님이의 숨소리가 다가오더니 달콤하면서도 끈적이는 살 냄새가 기출이의 코끝을 엄습했다.

“좋제? 니도 좋제? 나는 정말로 좋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원래 사내란 다 이렇게 좋은 건가? 아니면 기출이 니가 참 좋아선가 모르겠다. 정말로 좋다 기출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바빠지더니 기출이의 홋 적삼을 헤집고 젖꼭지 하나를 꼭 깨물었다. 헉, 소리를 내며 깜짝 놀란 기출이가 고개를 들어 황소처럼 히잉 웃더니 끝님이의 치마고름을 휘익 낚아챘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며 또다시 하늘과 땅이 서로 다가오는 질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

이번에는 솔개도 노고지리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옷매무시를 다 추스른 끝님이가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설 때 쯤 포르르 수십 마리의 참새 떼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며 촘촘한 그물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끝님이가 먼저 정거장을 지나 남천내 공굴을 건너 물문거리로 들어설 때까지 기출이는 선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문 앞에서 돌아선 분홍치마에 자주 빛 저고리의 끝님이가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이어 끝님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기출이는 허리가 뻐근하며 질척한 아랫도리가 헛헛하면서도 뻐근한,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고봉밥을 넉넉히 먹은 것처럼 푸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큰 대(大)자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던 그는 다시 일어나 앉아 곰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널장사 널을 지고 
찌구등찌구등 넘어간다
덕석장사 덕석 지고 
허리야 휘청 넘어간다
소금장사 소금 지고 
둘러둘러 건너간다
짚신장사 짚신 지고 
십리 걸어 오리 간다
내 팔자 달비 팔고 
곤달비 반달비 캐러 간다.
...

 

덕천고개를 넘어 수남마을 새 공굴을 건너고서야 비로소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미의 모습을 지운 기출이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아보아도 읍내도 버든도 보이지 않고 봉수대가 있는 부로산 봉우리만 봉긋하게 서있다. 언양사람들이 봉꼴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봉우리는 묘하게도 처녀의 젖가슴처럼 아주 아담하고 봉긋하게 솟아있고 그 꼭대기에 봉홧불을 피우는 가마인 새까만 봉돈(烽燉)이 세워져 누가보아도 영락없는 젖꼭지의 형상이었다. 마산뜰 한 가운데서 다시 고개를 돌려 봉꼴산을 바라보던 기출이가 벌쭉 웃었다. 그 황망 중에 끝님이를, 아니 한사코 만져보라고 들이밀던 끝님이의 젖가슴이 생각났던 것이었다.

 

그렇게 불각 중에 가시버시가 되는 신랑각시놀이를 하고 아직도 얼얼한 하초를 부여잡고 먼저 끝님이를 내려보낸 그날 오후에 기출이는 한참이나 이튿날 만나기로 끝님이와 약속한 장소에 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여야 했다.

제 집을 떠나 객지를 떠돈다는 것이, 낮선 곳에서 끼니를 때우고 한 간의 방, 아니 한 뼘의 자리를 보아 머리를 누이고 잠이 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기출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네 살이나 많으면서도 그렇게 목을 매고 달려드는 끝님이를 외면하기도 참으로 힘든 일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들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무서리가 내린다는 말처럼 어떻게도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 그 황당한 교접 중에 잠깐 본 끙끙 앓으면서도 입가에 웃음기가 가득한 잔뜩 달뜬 얼굴과 빨아들이듯 사내를 쳐다보던 붉게 충혈 된 눈동자에 잠깐 스쳐가던 검고 깊은 반짝거림을 어떻게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기도 했다. 그 악착같은 끝님이, 얼굴도 몸매도 통통하며 눈이 크고 검으며 입술이 붉은, 무엇하나 거리낌 없이 제 할 말 다 하고 좋다, 싫다 숨기는 법이 없는 그 불같은 성질에 이미 신랑각시놀이까지 한 자기가 약속을 어기고 혼자 숨거나 도망이라도 가면 온갖 원망과 포원을 안고 살구나무가지나 디딜방아간의 서까래에 당장 목이라도 맬지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죽은 몽달귀신이 산발한 머리에 피 묻은 얼굴로 혀를 길게 빼 문 모습으로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며 앙물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상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좀 성가시기는 해도 자신에게는 먹는 거든 입는 거든 무엇 하나 아끼는 것 없이 다 내어주며 말 한마디라도 마음 상할까 조심하고 남이 건드리거나 해코지하는 것을 죽기로 막아서는 그런 고맙고 살가운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비록 네 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어 자기가 형이라고 부르는 치만이보다도 두 살이나 더 많아 만약 가시버시가 되면 치만이에게 자신이 오히려 자형이 되는 형편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이미 신랑각시놀음을 하였으니 그것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비록 치만이를 돌본다는 명분이 있기는 해도, 또 갑오년의 경장으로 이미 양반상놈이 없어졌다고는 해도 근 4 년간이나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밥을 얻어먹던 주인집 딸이라는 것이 언감생심 오르기는커녕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나무였다. 그러나 이미 네 살이나 아래 키다리 왼손잡이에게 마음이 빼앗긴 끝님이는 늘 집안에 갇혀 살면서도 어디에서 듣고 왔는지 나이는 네 살 아니라 골 백 살이 적어도 남자가 아이를 만드는 사내노릇만 할 수 있으면 신랑자격에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또 아주 옛날부터 민며느리와 꼬마신랑이 있었고 주인집 딸이라는 것도 옛날 홀어미와 딸이 사는 홑진 농가에는 힘센 머슴이 들어와 몇 년의 기한을 무사히 넘기고 그 집의 사위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느새 자신도 그런 끝님이를 꽤나 좋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설령 서로 만나서 끝님이가 간지럽게 말을 붙이거나 손을 내밀면 매번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사렸지만 그것은 주인집의 나이 든 누나라는 생각에서였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는 끝님이가 다소 부담스럽기는 할망정 굳이 싫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열 살 적의 그 철없는 소동 이후 다섯 해나 객지를 떠돌며 한뎃잠을 자면서 손발이 시리고 이빨이 덜덜 떨려 잠을 못 이루면서도 늘 뇌리 속을 맴돌던 얼굴이 바로 끝님이, 그 사람이었고 서늘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들길에 남의 집 머슴으로 벼를 지고 들어오거나 귓불이 떨어질 것 같은 겨울바다나 포구에서 반짝이는 물결이나 얼음조각 속에서도 늘 새까만 눈동자에 윤기가 가득한 크고 맑은 눈망울로 반짝이는 것도 끝님이 그녀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불각 중에 당한 일, 그리고 순식간에 저지른 두 번의 신랑각시놀음, 그러니까 남녀가 배를 맞추는 그 놀음이 그렇게 사람을 붕붕 들뜨게 하고 찌릿 찌릿 온 만신을 저리게 하는 건지 그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늘 뒷걸음질을 몸을 사리던 그 일이 지금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고 그 숨가쁜 순간을 생각만 해도 다시 숨결이 가빠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조화로 낯선 남녀 간에 서로 만나 가시버시가 되어 알콩달콩 정분이 나면서도 때론 아등바등 싸우고 등을 돌려도 다시 또 살을 비비고 아들딸 낳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조화였다.

봉꼴산 땅군마을의 무덤가에서 벌어진 그 민망한 일로 끝님이도 자신도 그렇게 정신이 없도록 황홀한 재미를 보았으니 나이 네 살이 많은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또 이미 그렇게 발가벗고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생땀을 흘리면서 온갖 신음을 다 질렀으니 머슴도 주인댁 아씨도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발가벗고 주인행세 마님 행세를 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같이 살을 비비고 머슴이 되고 종년이 될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반상이 무너진 이 대명천지에 말이다.

거기다 끝님이는 제 아버지의 가죽가방에서 둘이 몇 십 년을 너끈히 먹고살 돈을 들고 온다고 했다. 돈, 그렇지, 돈! 그 돈이면 스무 마지기, 서른 마지기, 넉넉히 전답도 사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짓고 바닷가라면 커다란 고깃배도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아주 외진 강원도나 추풍령 아래의 넓은 들을 차지하고 앉은 커다란 기와집과 마님이 된 끝님이와 나리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기출이의 입가엔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그랬다. 어느 외진 항구에서 커다란 고깃배를 여럿 가지고 둥둥둥 북을 울려 풍어제를 올리는 잘 차려입은 선주가 되고 만선한 고깃배를 보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하긴 또 깊은 숲속 몇 개의 숯가마를 가진 숯쟁이가 되면 또 어때? 아니 그보다는 숯 도매상이나 술도가가 되어도 되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둘이 야반도주를 한다면 우선 호방댁이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밥도 못 먹는 메마른 핏덩이를 4년이나 거두어주었는데 은혜를 앙물로 갚는다는 소문이나 원망도 그렇지만 어쩌면 호방나리의 그 사나운 성정으로 자기 어머니 서촌댁이나 소캐집 가서방까지 온갖 고통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지만...

아무래도 약속장소로 나가야 될 것만 같았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이젠 그 뜨겁고 실팍한 끝님이의 어깨와 가슴과 허리와 속살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내와 계집이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나와 끝님이도 이미 사내와 계집으로 짝지어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기출이가 멋쩍은 웃음을 머금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어느새 그의 아랫도리에 뜨거운 기운이 내려뻗치고 있었다. 

 

  왈강달강 서울 가서 
  밤을 한 되 받아다가
  살강 밑에 묻었더니 
  머리 깎은 새앙쥐가 
  오며가며 다 까먹고
  밤 한 톨이 남았구나
  껍질 벗겨 할매 주고 
  보내 벗겨 엄매주고 
  알캥이는 불에 구워 
  니캉내캉 갈라묵자.

 

끝님이 누나가 알던 단 하나의 노랫가락을 떠올리며 즐거운 상상으로 입이 헤벌어진 기출이가 자신이 쫓겨 가는 신세임도 잊어버리고 신명이 잔뜩 난 걸음걸이로 어느새 자갈마실과 공암마실, 들내와 강당과 방터를 지나 사기점 고개를 넘어 통도사 앞 새뜰을 지나고 있었다. 새뜰마을의 삼거리기와집에서 귀남이누나와 자형이 맞을 아편을 사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기출이의 가슴이 써늘해졌다.

맘을 다잡고 다시 터벅터벅 걸어보아도 자꾸 휘청거리며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논꼴마을 누님네 마을로 가는 들길이 펼쳐지고 저만큼 작은 오두막이 흐릿하게 보이자 기출의의 억장이 무너졌다.

자형은 딸 하나만 더 만들어놓고 이듬해에 죽었다고 했다. 만 스무 살에 청상과부가 된 누님은 아직도 잘 살고 있는지 덩치만 컸지 철이 없는 곰 같은 두 형, 재출이, 또출이형이 전해주는 이야기로는 자형이 죽자 시가 집안에서 아들 만택이만 주고 간다면 핏덩이 딸은 데리고 가든지 두고 가든지 어디로 개가를 해도 좋다고 했지만 누이는 한사코 거부하고 그 외딴 집에서 모질게 버텨내며 두 아이를 키우며 산다고 했다. 누이의 말로 한 번 흠이 나서 신세를 조진 년이 서방까지 죽고 두 번 흠이 나서는 절대로 개가할 수도 없고 사람대접받기도 힘들다며 한사코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그 만택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을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수중의 몇 푼 남은 노자를 몽땅 털어서라도 하얀 백미 몇 되와 고기 몇 근을 떠서 당장 찾아가 더운밥을 해먹고 밤새 누님이랑 이야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묵고가고 싶어도 그러다가 모진 결심을 잊고 눌러앉기라도 한다면 버든에 남은 어머니나 어디론가 숨겨놓았다는 끝님이에게 여러 가지로 좋지 못할 것이었다. 모진 마음을 먹고 돌아서려는데 오 년 전에 본 생질 만택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떠오르더니 이내 이제 네 살이나 다섯이 되었을 얼굴도 못 본 생질녀를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 역시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돈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명색 손위라는 세 형님들은 왜 그리 진득하게 돈벌이를 할 줄도 모르고 또 돈을 모으거나 지킬 줄도 모르고 콩알만 한 막내의 코 묻은 돈을 넘보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우선 평생을 아랫목에 뒹굴면서 무의도식 팔자 좋은 큰형 선출이가 애꿎은 막내 기출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은 그 매값을 몽땅 들고 가출하여 논 몇 마지기를 능히 산다는 그 거금을 단 두 달 만에 몽땅 탕진하고 시월 달 서리 맞은 무시래기처럼 후줄근하게 풀어져서 돌아온 건 또 그렇다 치자. 

둘째인 재출이, 셋째 또출이는 그리 덩치는 팔대장승처럼 멀쩡하게 크면서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특히 돈 벌고 모으는 것은 또 왜 그리 아둔한지 생긴 것 마찬가지로 영판하고도 곰이었다. 같은 곰통이라도 지리산 달궁에서 언양으로 흘러온 원조 곰통인 외삼촌 곰쇠만 해도 그 듬직한 덩치만큼 사람이 신중하고 수매가 깊을 따름이지 조금도 둔하거나 어리석은 편이 아니어서 객지바닥에서 제 먼저 딸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재출이, 또출이형은 기출이가 호방네 집에 치만이를 돌보던 한가위씨름판에서 끝님이가 들고 온 주전부리를 허겁지겁 몽땅 삼켜버린 것처럼 단지 먹는 것이나 밝히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만 같았다. 기출이가 호방에게 멱살을 잡혀 죽도록 얻어맞고 객지를 떠돈 지 5년이나 되어 그 모진 유랑생활에서 몇 푼의 돈을 모아 제법 멀쑥한 차림으로 돌아왔을 때 벌써 열아홉, 열일곱이나 된 두 형은 여전히 별 진전이 없이 남의집살이를 하다말다를 계속하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간간히 집으로 돌아와 놈팡이 장남에 지친 어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가 일쑤였다.

단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먹는 것뿐인지 진장 산비알에 드문드문 자라는 밤나무, 그나마 온 마을의 아이들이 새벽부터 드나들어 땅바닥이 반질반질한 몇 그루 밤나무에 덩치가 태산만 한 형제가 밤을 딴다고 곰처럼 나무둥치에 달라붙어 낑낑거리며 가지를 흔든다고 법석이었다. 어쩌다 마을에 엿장수가 들어오면 수중에 돈이 없어도 무엇인가 부러진 쇳조각이나 떨어진 삼베조각, 하다 못 해 어디에서 소뼈를 구해서라도 엿판에 눌러 붙었고 얼마 전부터는 읍내 술도가의 탁주를 한 두 되 사다 먹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출이가 돌아온 가을에는 이제 바야흐로 여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는지 골목으로 옆집의 처녀가 지나가기만 해도 둘이 마주보며 쿡쿡 웃거나 한참이나 정신없이 쳐다보기가 일쑤였다. 봉꼴산 기슭에서 끝님이에 이끌려 그 황홀한 첫 경험을 하고 내일 약속장소로 나가야되느냐 마느냐 한참 고민하며 기출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그날이 닷새를 쉬는 팔월 한가위 머슴들의 휴가가 끝나는 날이라 한동안 떨어져 지내던 두 형제가 걸뱅이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언양 술도가에서 막걸리 두 되를 사오자 어미가 이제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김장 무를 솎아 무나물로 무쳐주어 한창 술추렴을 벌이다 술이 거의 떨어질 무렵이었다.

그들은 이제 집에 돌아온 지 이틀이 되는 막내가 아침에 씨름판에 나갈 때까지는 같이 나간지라 점심때는 같이 국밥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실은 둘은 돈이 별로 없지만 기출이는 늘 돈 떨어지는 법이 없으므로 기출이 덕에 모처럼 넉넉히 좀 얻어먹어볼 요량으로 씨름판을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모호방댁 끝님인가 뭔가 가슴이고 엉덩이고 몽땅 통통한 기집애가 번쩍거리자 말자 당최 흔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동생이 해가 다 진후에 그들의 술판에 나타났을 때는 평소 단정하던 머리도 헝클어지고 눈도 갤갤 풀린 데다 몸을 못 가누고 풀썩 쓰러지는 지라 처음엔 

“막내야, 왜 이러느냐, 누구랑 싸웠느냐, 맞기라도 했능가?” 걱정하며 들여다보다 기출이의 몸에서 난데없는 동백기름과 지분냄새가 진동을 하자 

“에게게. 이 콩알만 한 아우님이 도둑장가를 들었구나, 그래 그 여자재미가 정말 꿀맛보다 낫더냐?”

징그럽게 묻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두 형이 와아, 웃으며 놀리는 데다 잘못하면 큰방의 어머니나 큰형이 건너와서 무슨 일이냐고 따지면 큰일이라 싶어 기출이가 얼른 주머니에서 지전 두 장을 꺼내 형들 막걸리나 사다 마시라고 건네주자 둘은 신이 나서 읍으로 술추렴을 하러 나갔다. 

비록 큰돈은 없었지만 이번에 집으로 온 기출이는 돈 얼마를 어미에게 주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절대로 장롱에 넣거나 꺼내놓지도 않았고 잘 때도 옷에 넣은 채 머리에 배고 잤다. 건들대는 두 중간형들은 막걸리 값이나 꺼내가겠지만 말 한마디 없이 눈만 반들거리는 큰형이 제일 문제였다. 

지난번 그 매 맞은 값을 몽땅 들고 간 일은 기출이도 어미도 차마 입 밖에 내지를 못했다. 기출이가 돌아오자 말자 선출이가 먼저 질겁하고 아침밥상에도 같이 앉지 않고 눈만 마주쳐도 눈빛을 내려 까는 바람에 도무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길 나선지가 서너 시간이나 지나 어느 듯 내원사 입구 용연마을에 닿고 있었다. 걸으면서도 줄곧

   껍질 벗겨 할매 주고 
   보내 벗겨 엄매 주고 
   알캥이는 불에 구워 
   니캉 내캉 갈라묵자

 

땀으로 끈적거리던 끝님이의 통통한 앙가슴과 팥알 같던 젖꼭지와 번들거리던 눈빛을 떠올리며 ‘니캉 내캉 같이 갈라묵자.’ 반복하던 기출이의 흥얼거림이 뚝 그쳤다. 걸음보다도 더 빠르게 달려가던 그의 상념이 마침내 가장 괴로운 장면에 봉착한 것이었다.

 

마침내 기출이와 끝님이가 돈 가방을 들고 줄행랑을 치기로 약속한 날이 밝았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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